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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淨土)란 청정한 국토, 깨끗한 세상, 살기 좋고 편안한 곳 등을 말한다. 그에 반하는 말이 예토(穢土)이다. 정토의 다른 말로는 안락토(安樂土), 안양국(安養國) 등이 있는데, 이러한 정토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볼 수 있을까. 두 가지로 말하자면 정토세계는 공덕장엄토(功德莊嚴土)라 하여 공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또 청정심에 의해서 발견되는 국토이다. 그래서 장엄정토(莊嚴淨土), 유심정토라고 한다. 마음이 맑아지면 정토가 보이고 마음이 맑지 못하면 볼 수 없는 세계이고, 공덕을 지어야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정토이다. 복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가는 곳 마다 정토라고 가르친다. 만약 좋은 곳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이사를 갔을 때 과연 그 곳은 생각처럼 좋은 곳인가? 혹 좋지 못하였다면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마음이 청정치 못하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정하고 복이 많다면 가는 곳 마다 정토이다. 마음이 깨끗한 만큼 정토가 보이고, 마음이 높아진 만큼 정토가 높아진다. 정토에는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이 있고, 각 품마다 또 상, 중, 하로 나뉘어 져 있다. 그래서 구품정토(九品淨土)라고 한다. 또 연꽃이 피어있는 곳이라 하여 구품연대(九品蓮臺)라고도 한다. 유마경 14품 중 제일먼저 나오는 것이 불국품(佛國品)이다. 이 불국이란 부처님의 나라이며, 곧 정토이다. 불국품에 “보살이 정토를 만나려고 하면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 마음의 깨끗한 정도에 따라 불토가 깨끗함을 얻는다.”라 하였다. 이 어려운 세계도 나의 마음만 깨끗하다면 다 깨끗해 지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 하실 적에 마음이 깨끗하셔서 성불을 하셨을 텐데, 부처님이 계시는 이 세상에 왜 더러운 것이 아직 많은가?”라고 질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밝은 햇살이 비추이는 날에 맹인이 그 햇살을 보지 못함이 햇살의 허물인가, 아니면 맹인의 허물인가?” 아무리 해가 밝아도 나의 눈이 어두우면 해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정토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데, 번뇌와 근심걱정이 눈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신통으로 발가락으로 땅을 눌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가 구품연대의 최상품의 세계의 연꽃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다. 자기가 현재 머물러 있는 곳 만큼 좋은 곳은 없다. 지구만큼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은 없다. 그러나 근심걱정이 늘 따라다니므로 늘 편안하지 못할 뿐이다. 참으로 살기 좋은 곳이란 내가 복이 있는 곳이고, 내 마음이 편안한 곳이다. 육조단경에는 ‘깃대 위에 깃발이 달려 흔들리고 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깃발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바람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육조스님은 흔들리고 있는 것은 너의 마음 이다.”고 하셨다 한다. 이러한 인식의 바뀜이 바로 깨달음이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천지 만물이 모두 없어졌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다 자기의 의식 만큼 세계를 보고 있다. 세계는 의식의 산물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이다. 나에게 보여지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보여지는 것이다. 나에게 느껴지는 것도 나의 의식 만큼 느끼는 것이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맛 등 모두가 마찬가지다. 마치 달팽이가 자신의 집을 짊어지고 다니듯이 사람도 자신의 의식으로 만든 자신의 세계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사라지면 그 사람이 생각했던 세계도 같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심생법생(心生法生) 심멸법멸(心滅法滅)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맑아져야 세계가 맑아진다. 깃발이 움직인다는 것도 생각이고, 바람이 움직인다는 것도 생각이다. 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지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는 보는 데로 보이는 것이지 있는 데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게 있는 데로 본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천지만물이 모두 없어졌다고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깨닫기 전에 보던 세계는 깨닫는 순간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인식이 바뀌었으므로 세계가 바뀐 것이다. 고로 마음이 맑아지면 국토가 깨끗해진다는 말이다. 불교의 가치관은 깨우침이다. 깨달음을 통해서 편안하고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이 불교이다. 조선조 초기에 태조대왕과 무학왕사의 일화가 있다. 어느 따뜻한 봄날에 수창궁에서 태조대왕이 무학대사에게 투열희화(鬪劣戱話)를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래서 먼저 태조대왕이 “왕사를 보니 꼭 돼지와 같소”하니 무학왕사는 “대왕을 보니 꼭 부처님과 같습니다.”하였다. 그러자 태조대왕이 무학왕사에게 “아니 상대의 열등한 부분을 꼬집어 말하기로 하였는데 어찌 부처님이라 하오.”하였다. 그러자 무학왕사는 “저안(猪眼)으로 관지즉(觀之卽) 저야(猪也)요, 불안(佛眼)으로 관지즉(觀之卽) 불야(佛也)”라 하였다. 이에 태조대왕은 박장대소 하였다 한다. 혼탁한 마음으로 세계를 보면 예토가 되는 것이고, 청정한 마음으로 보면 정토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만큼 국토가 깨끗해 지는 것이다. 자꾸 공덕을 지으면 가는 곳 마다 극락세계요, 마음을 닦으면 모든 것이 깨끗이 보이므로 정토이다. 불심이 깊어지면 정토가 깊어지고 불심이 성장하면 정토가 성장하는 것이다. 불심을 키워가려면 먼저 신심불심(信心佛心)이다. 신심이란 불성을 믿고 인과를 믿는 것이다. 사람은 절대적 가치와 상대적 가치가 있는데, 인과는 상대적이고 불성은 절대적인 것이다. 불성은 허공과 같고 인과는 생명과 같다. 생명이 허공 없이 자랄 수 없다. 또 생명이 허공만 있어 존재할 수 없고 시시각각 자라나가는 것이다. 생명이 유지되려면 호흡을 해야 하고, 물도 마셔야 하고, 음식도 먹어야 하고, 운동도 하여야 하고, 잠도 자야 한다. 내일의 생명을 오늘 만들고 있는 것이다. 몸은 인과이고 정신은 불성이다. 인과는 시간이 있고 불성은 시간이 없다. 인과를 잘 알아야 복을 짓고 재를 멀리할 수 있고 항상 원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인과를 믿고 불성을 믿고 그 마음이 확실할 때 그것을 ‘신심이 견고하다’라고 한다. 불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과연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듯이, 우리는 중생이 될 수도 있고 부처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성과 인과의 법칙이다. 인과를 믿고 좋은 공덕을 닦으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 인과는 차별이고 불성은 평등이다. 인과를 믿지 않으면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인과만 믿고 불성을 믿지 않으면 항상 중생으로만 있어 부처님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원력((願力)을 세우는 것이 불심이다. 서원이 있어야 희망과 힘이 생기게 된다. 원력이 없으면 게으르고 실증만 나게 된다. 그 어떠한 세력보다도 강한 것이 원력이다. 세력은 무상해서 없어지지만 원력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어리석음으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력에 의존하려 할 뿐 원력으로 성취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원력불심(願力佛心)을 가져야 한다. 지혜가 있으면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통을 받는 이유는 영원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고 얽매이기 때문이다. 보아도 그기에 얽매이지 말고 들어도 들은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지혜불심(智慧佛心)이다. 다음은 자비불심(慈悲佛心)인데, 자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섭수(攝受)하는 것이다. 우리가 불공을 올릴 때 부처님께서는 가리지 않고 온갖 것을 다 받아들이신다. 또 참여하는 것이 자비이다.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를 말할 때 천수천안(天手天眼)을 이야기 하는데, 천안이란 보는 데에 걸림이 없어 천안이고, 참여의 의미가 천수이다. ‘보문시현(普門示現) 구고구난(求苦求難)’ 온갖 넓은곳에 나타나서 고통스러운 것 구제하고 어려운 것 구제하는 것이 바로 자비불심이다. 자비가 있으면 고통은 사라진다. 모든 고통은 자비가 부족해서 생겨났다고 경전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자비에 의해서 고통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비불심은 학습이 필요한데, 거슬려도 들어주는 연습, 보는 연습을 해야 하고 실천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불심이 높아지면 정토가 높아진다. 불심으로 정토를 이루어야 한다. 얼마전 어느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산토끼에 대한 문제가 나왔다. 질문자는 80년대에 사람들은 산토끼라고 하면 ‘산에 사는 토끼’를 생각하고, 90년대의 사람은 ‘살아있는 토끼’를 생각한다. 그러면 2000년대의 사람이 생각하는 산토끼는 무엇이겠는가? 라고 질문하였다. 그 해답은 ‘시장에서 구입한(산) 토끼’였다. 80년대의 산토끼는 편안해 보인다. 90년대의 산토끼는 사느냐 죽느냐가 중요한 과제였던 것 같다. 2000년대의 지금은 ‘사느냐 죽느냐’ 보다도 시장경제가 더 우선시 되어 보인다. 이렇게 세상은 자꾸 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배우고 익히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불심을 잘 닦아서 인과도 믿고, 성불도 믿고, 원을 세우고, 지혜도 닦고 자비도 닦아서 항상 편안하고 행복한 극락정토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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