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통도사에서 사미계
1969년 통도사에서 구족계
1971년 통도사 강원 강주
1980년 중앙승가대 강사,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
1985년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
현재 중앙승가대 총장
회수 : 135회      
제목 : 발심성불(發心成佛) 법회일자 : 2005-04-18
  불교의 최종 목적이란 성불이라 하겠다. 성불이란 깨닫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깨닫는 것은 부처님이 되는 것이므로 부처님이 되는 것을 성불이라고도 하며, 또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서 많은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므로 생사해탈하여 중생제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님이 되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생사 고통에서 벗어나 중생을 제도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실천은 고사하고 이해자체가 힘든 것이다.
예전에 대학생불교연합회에서 찾아와 법회를 하게 되었는데, 한 학생이 질문하기를 “우리가 생사윤회를 받는다고 하는데, 생사윤회를 받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하는 것이다.
쉽게 알기 어려운 문제라 여러가지로 공부를 해보니까 의상대사의 법성게에 ‘생사열반이 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라는 말이 있었다.
생사가 있고 생사를 받지 않는 열반이 있는데, 생사는 윤회하는 생멸법이고, 열반은 해탈적멸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생사를 받으면 열반은 다른 세계에 있어야 할 듯 한데 상공화(常共和)라 즉, 함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를 받기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을 때에 열반은 어디에 있었고, 열반을 하게되면 생사는 어디로 갔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데, 의상스님께서는 생사와 열반은 항상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큰스님께 여쭈기를 “열반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네 몸에 있느니라.”하셨다. 다시 여쭙기를 “그렇다면 생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네 몸에 있느니라.”하셨다. 열반도 몸에 있고 생사도 몸에 있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생사가 몸에 있다는 것은 이해할 듯 한데, 열반이 몸에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이 들것이다. 이것은 지혜로 말씀하신 것을 생각으로 이해하려니 힘든 것인데, 경전을 의지해서 보면 몸도 열반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몸이라는 것은 실생(實生)이 아니라 연생(緣生)이다. 실생 즉, 진실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연생 즉, 인연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수상행식(受想行識)과 선악업보의 인연이 모여서 태어난 것이고, 인연이 없으면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생은 바로 태어난 것이 없는 무생(無生)이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시니까 일체중생이 무생이라는 것이다. 인연에 의해서 난것이므로 실제로 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 것은 태어나지 않은 무생이고, 인연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은 사라짐이 없는 무멸(無滅)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 그것이다.
이 몸이 그대로 생사이고, 또 이 몸이 났어도 난 것이 아니니 열반이며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므로 열반이다. 그래서 생사열반이 상공화라 하셨던 것이다.
나무를 자르고 맞추어서 의자를 만들었다고 하자, 만들어 졌으므로 생인데 이것은 연생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생이다. 이것은 나무이지 의자가 아닌 것이다. 나무로 볼 때에는 그냥 나무인 것이다. 의자를 다시 해체하게 되면 인연에 의해서 없어진 것이므로 연멸이다. 그러므로 연멸은 무멸이다.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은 생긴 것이 없고, 인연에 의해서 없어진 것은 없어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생사가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다’ 라는 오묘한 이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 없는 열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죽음이 없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미혹하다고 한다. 미혹한 어리석음으로 두려움이 생긴다. 공포가 생기면 죽음으로부터 잘 보호하고 싶어 보호막을 만들게 되는데, 보호막이란 지식이나 재산이나 세력 등인데, 이것은 죽음이 없는 것을 모르는 데서 오는 탐욕과 집착이다.
우리는 늘 늙어가고 있지만 그것이 다 열반이고, 늘 죽어가고 있지만 극락세계에 그냥 있는 것이며, 열반세계에 그냥 있는 것이다.
연못에 달이 잠겨있는데, 어느날은 연못에 달이 보이지 않았다. 연못에 달이 잠긴 것이 생긴 것이나 이는 곧 무생이다. 달이 실제로 연못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실생일 것이나, 달과 맑은 날씨와 맑은 물의 인연에 의해서 보일 뿐인 것이므로 연생인 것이다. 또 어느날 달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실멸 즉, 실제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서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태어나도 열반해탈로 볼 때에는 계속 열반해탈이고, 늙어도 계속 열반해탈이며, 죽어도 계속 열반해탈인 것이다. 그것이 생사열반상공화인 것이다.
그런데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바로 앞구절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란 말이 있는데, 처음 발심할 때에 바로 바르게 깨달아 성불한다는 말인데, 우리는 정각을 이룬다는 것은 오랜 시간동안을 닦고 또 닦아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하고 있는데, 처음 마음을 일으킬 때에 바로 정각을 이룬다고 하였다. 시작하는 그 순간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심성불이다.
발심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금강경에 나오는 ‘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는 것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 하여 최고로 높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발심이고, 깨달은 마음이 보리심인데 화엄경에서는 이를 종종심이라 하여 일체 마음을 다 표현하여 ‘염념발심(念念發心)에 염념성불(念念成佛)’이라 하였다. 순간 순간마다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발심이며, 시시각각 발심하고 생각생각 성불하는 것이다.
종종심에 대해서 다양하게 설명하였지만 간략히 줄이자면 지혜심, 자비심, 원력심이 된다. 지혜란 형상에 매이지 않는 마음이다. 형상은 무상한 것이라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상에 탐욕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혜를 가리는 것이 탐욕인데, 탐욕이 일어나면 어리석어지고 맹목적이 된다. 일상생활에서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면 지혜이다.
자비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원력이란 지혜와 자비를 오늘 하루만 하는 것, 내일까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리심이고 이런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발심인데, 그 발심이 바로 성불인 것이다.
허망한것에 욕심 안내는 것이 성불이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이 성불이고, 하다 말다 하지 말고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이 성불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발심성불인 것이다.
화엄에서는 ‘법성원융 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이라 하여, 법성은 둥글어서 시작하는 곳이 바로 끝나는 곳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증지소지(證智所知)’ 즉, 증득한 지혜로 아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시작하는 곳이 끝나는 곳이기 때문에 늦었다는 것은 없다.
그런데 발심에 대해서 기신론에서 말사는 것과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이 조금 다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보살행을 많이 닦으면 십지보살(十地菩薩)이 되는데, 십지를 다 닦은 분이 발심하여야 성불한다 고 하였다. 오래 오래 닦아야 십지에 오르게 되며, 십지의 마지막까지 올라가야 발심해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정발심이 아니라 신발심을 말하고 있다. 믿고 믿음이 찼을 때 바로 발심하게 된다는 신만발심을 말하는 것이다. 생사열반이 상공화라는 것을 믿으면 바로 발심하게 되고 발심은 곧 성불인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저절로 발심하고 발심하면 저절로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믿는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다. 믿는 마음이 성불하는 것이고, 믿는 마음이 공덕을 짓고, 믿는 마음이 두려움을 다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화엄경의 발심성불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인과를 믿는 것인데,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는 ‘여래의 공덕과 지혜가 중생속에 그대로 다 있다’ 하여,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이라 하였다. 중생 하나 하나에 중생의 지혜와 모든 것이 그대로 다 있다는 것이다. 중생이 바로 부처이다 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이 신심이다.
중생에는 중생심도 있고, 불심도 있다는 것이다. 중생심이라는 것은 미혹에 빠져 탐심을 일으키는 것이고, 불심이라는 것은 지혜심, 자비심, 원력심, 보리심인데, 이 모두가 다 있다는 것이다. 중생이라도 부처님과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이 심만(心滿)이다. 그런데 중생이라는 것은 믿지만 부처님과 같다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원히 중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믿지 않으니까 발심이 되지 않는 것이다. 신심이 곧 발심이고 발심이 곧 성불인 것이다. 자심에는 중생심이 있어 탐심과 진심, 치심이 있지만, 지혜, 보리, 원력이 다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보다 못할 것이 없는데, 스스로 어두움을 만들고, 고통을 만들어서 그런 것이다. 아무리 해가 밝아도 햇빛을 가리면 어둡다. 햇빛을 가리지만 않으면 밝은 것이다. 그와 같이 탐심이라는 것도 스스로 일으켜서 생긴 것이므로 끊을 것도 없고 일으키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노도 일으키지만 않으면 되고, 어리석은 마음도 일으키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지혜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원력심을 일으키면 성불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나에게 그러한 불심이 부처님의 마음과 조금도 다름없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발심하면 저절로 보살행을 닦게 되는 것이다. 발심이 되면 보살행은 저절로 닦게 되고, 보살행을 닦게되면 보살도가 익게되고, 보살도가 익어지면 저절로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융법계(圓融法界)에서는 시작이 곧 결과이고 시작이 곧 전부인 것이다.
불심을 일으켜서 믿음이 꽉 찬 보살행을 하는 사람은 ‘이다라니 무진보 장엄법계 실보전(以陀羅尼 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이라. 다라니는 끝이 없는 세계를 말하는데, 이러한 끝없는 세계의 끝없는 보배를 가지고 법계의 진실한 보배궁전을 꾸미는 것이다.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라. 성불하고 보니 실제 중도상에 궁극적으로 않았는데 옛날부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더라. 그것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이것이 원융(圓融)이다. 법으로 시작해서 불로 끝나는 것이 법성게인데, 법이 곧 불이라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기를 꿈을 꾸는 사람이 꿈에 온갖 세상을 다니는데, 꿈에서 깨어나 보니 집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래부동(舊來不動)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불한 자리 열반 해탈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연히 두려운 생각을 내고 욕심을 내서 편안한 자신의 집 안방에서 악몽을 꾸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불심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히 믿으면,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고, 잘못될까 두려울 것이 없으므로 오로지 원력으로 공덕만 쌓아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보살행인 것이다.
우리 마음에 지혜, 자비, 원력이 있으므로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면 그것이 성불이다. 가는 곳 마다 중도상이고, 해탈이며 가는 곳마다 부처님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보살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자비행을 하고 지혜행을 하고 원력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불심이라는 것인 실천하면 성불이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일을 하면 바로 복을 받는 것이다. 신심이 곧 성불인 것이다.
중생에게는 좋은 자비심이 있는데, 그 자비심을 자꾸 실천하면 바로 성불하는 것이다. 생각 생각에 불심을 일으키고 닦으면 생각 생각이 성불하는 것이다. 닦아도 공이 있을까 없을까 의심하는 것은 마구니다. 그러므로 절대 의심하지 말고 바로 우리 자신이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끊임없이 실천만하면 부처가 부처노릇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화엄신앙에는 생사를 초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사에 자제하는 것이다. 태어나면 태어나는 데로 죽으면 죽는 데로 보살행을 하는 것이지 생사를 벗어나서 따로 보살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늙으면 늙는 데로, 젊으면 젊은 데로 보살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열반경에 부처님께서 공양을 올린 순타에게 “수수인신(雖受人身)이나 심여불심(心如佛心)이라”하며 칭찬하셨다. 비록 사람의 몸을 받았으나 마음은 불심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을 부처님과 같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부처님과 같이 하는 것이 발심인 것이다. 조그만 마음이라도 실천하면 그것이 성불이다. 시시각각 실천하면 시시각각 성불 하는 것이다. 보살행 닦는 것이 바로 부처 되는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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