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스님 1982년 서울 성심사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1989년 운문사 승가대학 졸업 1995년 동국대학교 선학과 졸업 1998년 동국대학교 선학과 석사수여 2000년 동국대학교 선학과 박사과정수료 2003년 동국대학교 선학과 강사
회수 :
24회
제목 :
제24강-제32장 근심은 사랑으로부터 생긴다. 제33장 열심히 정진하라.
법회일자 :
2004-03-18
< 24강 > 근심은 사랑으로부터 생긴다
32장. 근심은 사랑으로부터 생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ꡔ사람은 愛欲으로부터 근심이 생기고, 근심으로부터 두려움이 생긴다. 만일 애욕을 멀리하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인가.ꡕ 佛言. 人從愛欲. 生憂. 從憂生怖. 若離於愛. 何憂何怖.
* 좋아하는 것에서 근심이 생기고, 좋아하는 것에 의해서 두려움이 생긴다 좋아하는 데서 벗어난 이는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법구경』212 * 애착에서 슬픔이 오고, 애착에서 공포가 온다. 애착에서 벗어난 이에게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법구경』213 * 황금이 가득한 산이나 은이 가득한 은산이 있다고 한들, 아니 설령 그것이 두 배로 있다고 한들 인간은 절대 그것으로 만족해하지 않는다. 그런 이치를 잘 알아서 고요한 마음을 가지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 괴로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본 사람이 어떻게 욕망에 이끌리겠는가? 세간의 제약이 속박인 줄 알아서 그것을 제어하는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修學해야 한다. 『잡아함경』 *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 때문에 근심하고 소를 가진 자는 소로 인해서 근심이 생긴다. 인간의 근심은 뭔가 집착할 만한 것에 의해서 일어나는 법. 실로 집착할만한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일도 없다. 『잡아함경』
** 32장 에필로그 : 애욕만이 아니다. 곧 4성제를 염두에 두면 된다. 4성제처럼 고통은 곧 나의 집착에서 비롯된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생겨나게 된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이 근본을 파헤쳐 들어가면 그것은 나의 집착이고, 욕망 · 욕심이다. 그래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바로 이 욕심을 제하는 무집착을 가지라고 한다. 무집착은 바로 無所有․空인데, 원시불교의 無我․無常이다. 결국 너와 내가 없는 不二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생의 두려움과 근심의 뿌리는 결국 욕망이고, 그 욕망가운데 애욕이 제일 강하다는 것이다. 나무가 마르고 죽어가면 뿌리의 썩은 것부터 도려내야지 가지나 이파리를 친들 소용이 없는 것처럼 근심이 생기면 근심을 없앨 것이 아니라 근심이 생기게 된 뿌리를 살펴야 한다.
33장. 열심히 정진하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ꡔ대저 道를 닦는다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이 만 사람과 싸우는 것과 같느니라. 혹 갑옷을 입고 문을 나서는 순간 마음이 약해져 겁을 먹기도 하며, 혹 반쯤 나아가다 물러나기도 하며, 혹은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기도 하며, 혹은 승리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사문이 道를 배울 때는 마땅히 그 마음을 굳게 먹고 용감하게 정진하라. 앞에 어떤 경계가 닥칠지라도 두려움이 없어야 모든 악마를 멸하고 道果를 얻을 수 있다.ꡕ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신 뒤 피나는 정진력으로 일관하셨다. 출가 뒤 찾아간 수행자가 바가바(Bhagavā)라는 고행주의자였다. 온갖 고행을 닦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바가바는 하늘에 태어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는데, 싯달타는 ‘이 육신의 고행을 통해 몸이 죽은 뒤 生天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하고 그 곁을 떠났다. 다음으로 또 불을 섬기는 배화拜火주의자를 찾아갔으나 이 또한 당신의 스승이 아님을 알고 그곳을 떠났다. 또 당시 뛰어난 선인仙人이었던 알라라 칼라마(Alāra Kālā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āmaputta)를 찾아갔다. 이 두 선인은 모두 선정법에 의해 수행하는 수정修定주의자들이다. 수정修定 즉 정신통일에 의하여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들은 고요한 선정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 싯달타는 이들의 지도를 받아 그 고요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정신통일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 상태가 끝나면 다시 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가는 수정을 끊임없이 되풀이 했다. 싯달타는 두 선인의 수행법도 자신이 갈망하던 해탈의 경지가 아님을 알고 두 선인 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곳이 가야(Gayā)의 네란자라(Nerañjarā 니련선하)강가근처 고행림苦行林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다시 고행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고행은 生天을 목적으로 하는 고행도 아닌 삶의 고통을 벗어난 해탈을 얻기 위한 고행이었다. 싯달타는 당시 뼈가 앙상하고 눈이 움푹 패였으며, 배가 등뼈에 닿을 정도로 심한 고행을 하였다. 위의 가장 앞에 서술했던 문장처럼 부처님은 뱃가죽과 등뼈가 만났을 정도로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부처님은 6년간의 고행을 하신 뒤, 결국 해탈하는데 있어 ‘육신을 고통스럽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중도中道에 입각한 수행을 하기위해 니련선하에서 목욕을 하신다. 부처님은 결국 수정주의자와 고행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육체와 정신을 둘로 보는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적 수행을 배제하고 심신일여心身一如***를 통한 물심일원론物心一元論적 견해에 입각해 깨달음을 추구하시어 부처가 되신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는 서양속담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수행은 자신이 완성하는 것이지 남이 완성해 주는 것이 아니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도를 하더라도 귀착점은 같은 것이다. 방법만 다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