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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통도사에서 사미계 1969년 통도사에서 구족계 1971년 통도사 강원 강주 1980년 중앙승가대 강사,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 1985년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 前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現 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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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수 : |
1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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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
종범스님 - 성취와 자족 |
법회일자 : |
2005-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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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成娶)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활동하면서 이루고 싶은 것을 자꾸 이루는 것이다. 자신의 소원을 끊임없이 이루어 가는 것이 성취이다. 자족(自足)이라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성취와 자족은 같은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성취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족이 문제가 된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하는 것 보다도 스스로 만족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행복은 스스로 만족하는데 있고, 인간의 모든 불행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다. 온갖 질병과 온갖 다툼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에서 생겨난다. 행복, 평화, 가치 등 여러 가지 말들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족하느냐 자족하지 못하느냐 이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스스로 만족하면 일체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어떤 것을 이루었느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자족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 하지만 가만히 들여 보면 세상에는 시시각각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났다 사라지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알아간다 한들 그렇게 모르고 지나가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내가 아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심지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자신이 알지 못한다. 자기가 하나 하나를 이루어가면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은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허공계가 다하고 온 시간이 다 없어져도 만족할 수 없다. 만족은 그치는 데에 있다. 자기가 머물러 있는 순간에 그쳐서 만족을 찾으면 그기가 만족이다. 만족은 이루는 데에 있는 것이 아리라 그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는 사람이 얼마를 마셔야 만족할 수 있겠는가. 딱 그치는 순간이 만족이다. 한잔을 체 안마셨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치는 순간이 만족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활화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공부이다. 그쳐서 보아라. 그러면 보인다. 이것을 전통적으로는 지관(止觀)이라 하며, 지간(止看)이라고도 한다. 그쳐서 보면 보이며 만족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치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로 만족하면 만족이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둘을 가지고, 둘로도 만족하지 못하니까 셋을 가지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도 어느 하루도 만족하는 날이 없다.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만족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불교적으로 설명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부처님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인데 쉽게 우리의 몸에 비유를 해보면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것을 변혁(變革)이라고도 하고 변이(變異)라고도 하는데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신(變化身)이라 한다. 그러므로 변하고 바뀌는 것은 천 백억화신의 석가모니불과 같은 것이다. 또 이 몸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는가. 본래는 없는 것이었지만 여러 곳에 의지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의타신(依他身)이라 한다. 첫째로 아버지 어머니에 의지하고, 지수화풍(地水火風)에 의지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집합을 하고 이렇듯 여러 가지에 의지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남이나 여의도에 높은 빌딩들이 저렇게도 많이 들어서는데, 저 빌딩들의 무게가 상당할 것이므로 땅이 가라앉던지 지구가 쪼개질 것 같은데 어째서 아무런 일도 없는지 모를 일이다.”고 하였다. 지구는 가라앉던지 쪼개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빌딩을 구성하고 있는 자갈이나 모래, 철 등 모두 지구상에 원래 있던 것을 모아서 만든 것일 뿐이다. 지구가 볼 때에는 부증불감, 늘어나고 줄어든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손을 의지해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한다. 우리의 몸 자체도 기본적으로 의타신(依他身)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신이기도 하다. 또 그 밑으로는 자성신(自性身)이 있다. 법성신(法性身)이라고도 하는데, 우리의 몸은 혈액도 있고 골격도 있는데, 따뜻한 것은 불에서 왔고 단단한 골격은 흙에서 왔고, 돌고 도는 피는 물에서 왔으며 숨을 쉬는 것은 바람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만법인 것이다. 우주라고 하면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의 이 몸 속에 우주가 있다. 이 몸 속에 태양도 있고, 물도 있고, 흙도 있고, 공기도 있고, 몇 억만년 전부터 내려오는 역사도 있고 다 있다. 이 몸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고향이 그리워서 자나 깨나 고향을 생각하는데, 자신의 몸 속에 고향이 있다. 틱낫한 스님도 ‘조상이 어디에 있는가? 내 몸에 있다. 고향이 어디에 있는가? 내 몸에 있다.’라고 하였다. 고향에 직접 가 봐야 고향이 보이지는 않는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 고향이 보일 리 없다. 어릴 때 그 생각 만큼만 고향이 있기 때문에 그 고향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듯 이 몸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기는데, 그 다른 것이란 것은 바로 법이다. 법에 의지해서 생긴 것이고 그 의타신 밑으로는 자성신인데, 그러면 그 하나 하나의 법에 본래의 자성이 있는가 하면 그 법 하나 하나도 다 의타기성이기 때문에 본성이 없다 하여 무성(無性)이라 한다. 법성은 무성이기 때문에 무성은 본래 고요하다 하여 본적(本寂)이라 한다. 본적은 또 원적(圓寂)이라 하여 법성의 근본은 끝이 없다고 하고, 고요하다는 것은 다 이루어진 세계라 하여 원성(圓成)이라고 한다. 법성으로 돌아가면 이 몸이 생기는 근본인 고향이다. 그 고향의 세계는 원적이고 본적이며 원성의 세계이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고, 다 갖추어진 세계가 바로 우리가 온 세계이다. 그것이 자성신이고 법성신이다. 우리의 몸을 보면 시시각각 활동하는 몸은 변화신인데, 타수용신(他受用身)이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몸이다. 제자가 선생님으로 친구가 친구로 남자가 여자로 여자가 남자로 느끼는 그 몸이 바로 타수용신이다. 또 자수용신(自受用身)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이 내가 물을 마신 것 만큼 목이 마르지 않고, 먹은 만큼 배가 고프지 않는 그것은 다른 사람이 모르고 오직 스스로 받아서 쓰는 몸이다. 이 몸을 부처님의 명호를 빌리자면 원만보신 로사나불이다. 보신불이다. 그 다음에 자성신이라고 하는 나의 본성은 무엇인가 모든 법성, 법의 본성인데, 이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법성이라는 것은 원성이다. 원래 원만하게 이루어진 세계이고, 끝이 없고 모자라는 것이 없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곳이든 딱 그쳐보면 만족이 되는 것이다. 법성이 원성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래의 자성신은 원적신이고 원성신이다. 산에서는 산 대로 원적의 세계, 원성의 세계이고 물에서는 물 대로 원적의 세계이고 원성의 세계니까 만족할 수 없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이다. 혼자 있어서도 그쳐서 보면 만족할 수 있고, 둘이 있어서도 그쳐서 보면 만족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칠 줄 모르고 달릴 줄만 알기 때문이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마음은 항상 달리려고만 한다. 도라는 것은 쉬는 것이다. 뭔가를 하려고 하면 도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작은 풀잎 하나에도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 일중의 일체(一中一切)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것은 달리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그쳐서 보아야 보이는 것이지 달리면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쳐서 보면 어디나 만족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왼발을 떼면 왼발이 만족할 수 있는 곳이고, 오른 발을 떼면 오른발이 만족할 수 있는 곳이다. 숨을 쉴 때는 숨을 쉴 때가 만족할 수 있는 곳이고, 숨을 거둘 때는 숨을 거둘 때가 만족할 수 있는 곳이다. 지지발발(止止發發)이라 하였다. 그치고 그치는 곳이 바로 출발하고 출발하는 곳이다. 그치는 곳이 출발하는 곳이고 출발하는 곳이 바로 그치는 곳이다. 이것이 법성신의 내용이며 이것이 원적이다. 법성게를 저술하신 의상스님도 그 해설서에 ‘지지가 발처(止止 發處)’라고 하셨다. 그치고 그치는 곳이 바로 출발하는 곳이다. 출발점이 바로 목적지가 되는 것이고, 목적지가 바로 출발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내가 서있는 곳이 바로 만족할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만족하면 만족할 곳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생각이 자꾸 달려가고 달려가니까 영원히 나그네 생활만 할 뿐 고향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이지, 무엇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만족하기 위해서는 그쳐야 한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이 세상의 어느 곳도 만족할 수 없는 곳은 없다. 이것이 해탈이요, 열반이요, 성불이다. 얼마전 신문에서 읽은 글이다. 한국의 한 스님이 티벳의 망명정부가 있는 달람살라에 가서 달라이라마에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한국의 선사는 망상을 부리지 말라 하여 질문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한국의 가풍이다. 질문 자체가 달려가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께서는 “나의 본성(本性)은 철저히 공성(空性)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는 달라이라마 제 14세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 대답을 들은 한국스님은 감복을 하였다 한다. 이것이 한국의 불교와 티벳 불교의 차이점일 것이다. 한국의 선사들은 ‘쓸데 없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고 하는 것은 바로 눈 앞을 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지도 방법이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다 자기만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되지 않는다면 주장자로 후려치는 것이다.한 생각 그치는 것에 만족이 있는 것이지 이렇게 묻고 저렇게 묻는 것은 무한히 달려가는 것이지 그치는 것이 아니다. 티벳의 불교는 인도의 가풍을 가지고 있다. 인도의 가풍은 설명이다. 그래서 달라이라마는 경전에 입각해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나의 본성은 철저히 공성이다.’라는 것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공성, 이것이 원성신이다. 아무데고 그치면 만족이 되는 그런 세계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는 달라이라마 제 14세라고 한다.’라는 것은 변화신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어느 곳에 있던지 항상 나의 고향에 있는 것이고 늘 만족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데, 변화되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변화에 늘 속는 것이다. 변화라고 하는 것은 바다의 파도와 같다. 파도 자체가 바다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닌데 이 파도에서 저 파도로 계속 밀려가고 밀려오는 것만 알 뿐 바다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가 바다인가. 멈추는 곳이 바로 바다이다. 멈추는 곳이 고향이다. 고향을 찾아간다는 것은 생각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지 진리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고향은 내 몸에 있는 것이다. 파도가 있는 곳이 전부 바다이다. 이 파도에 바다가 없고 저 파도에 바다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 생각에만 사로잡혀 달려가기만 하지 멈추지 못하고 만족할 줄 모른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멈추지 못하는 것이 부족한 것이고 만족할 줄 못하는 것이 부족한 것이다. 언제쯤 찾고 달려가는 마음을 멈출 수 있을까.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얼마전에 책을 하나 읽었다. 아주 젊은 사람이 썼다는 책인데 책을 읽고 ‘나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이가 젊어도 그 책의 내용을 보니 굉장히 생각이 넓고 밝았다. 훈련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훈련하지 않으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소용없고 훈련을 하면 나이가 적어도 훌륭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제목은 ‘달려라 아비’인데, 요즘의 아버지들은 늘 달려가기만 한다. 예전의 아버지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피땀을 흘리면서 앞만 보고 달렸다면 요즘의 아버지들은 책임을 지지않으려고 도망을 가기 위해 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의 아버지들은 유목민이 되었고 떠돌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서 동거를 했는데 아이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달려나간 것이다. 그곳에서 또 일이 생기면 또 달려나가고, 또 일이 생기면 또 달려나간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요즘에는 현실에서 일어나기도 하는 일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갔는데도 그 어머니와 딸은 찾지도 않고 불편 없이 사는 것이다. 오늘날 남자의 역할 아버지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같은 작가의 다른 단편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떠돌이 아버지가 혼자 자취를 하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딸에게 찾아 온 것이다. 그 아버지는 딸에게 온갖 아양을 떨고 온갖 좋은 소리를 하면서 딸을 칭찬하였다. 그러자 딸은 도대체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그 본색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나 여기서 며칠 머무르면 안되겠니?”라고 하는 것이다. 딸은 속으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TV만 보는 것이었다. TV가 자기의 인생이고 그 외에는 마음을 둘 곳이 없는 것이다. 밤이 되어 딸은 잠을 자야겠는데 아버지는 계속 TV만 보고 있으니 잠을 이룰 수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며칠 후 아버지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TV의 선을 가위로 잘라버렸다. TV가 없으면 조용할 것 같았는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 아버지가 TV를 보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아도 되었는데 TV가 없어지고 나니까 아버지의 얼굴을 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큰 고통이었다. 딸은 TV의 선을 끊어놓은 것이 미안하고 죄책감이 생겨서 사과의 뜻으로 용돈 10만원을 TV위에 올려놓고 출근을 하였는데, 마치고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떠나고 없었다. 딸은 TV를 못 보게 한 것이 미안해서 돈을 놓고 갔던 것인데, 아버지는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 돈을 가지고 떠난 것이다. 말로만 부녀지간일 뿐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현실속에서 살기 때문에 더 공부를 많이 하고, 더 수행을 많이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월이다. 옛날에는 서로 아껴주고 서로 감싸주면서 대가족제도 속에서 문화가 유지되었지만, 지금은 가족이 없어져 버리고 있다. 심지어 무가족시대(無家族時代)라고도 한다. 혈육으로만의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위에서 보았듯 아버지와 딸이 남남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마음을 잘 닦아서 내 스스로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성취가 아니라 자족인 것이다. 스스로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교양을 키우고, 능력을 키우고, 생활을 그렇게 자꾸 만들어 가야 한다. 기도 열심히 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인정하고, 인정하면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순서이다. 자신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누구를 원망할 줄도 알고, 욕할 줄도 알고, 보고싶으면 보고 싶어할 줄도 알고, 싫으면 싫어할 줄도 알고 솔직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나의 안정과 기쁨을 찾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항상 만족을 배워가는 불자가 되면 그것이 오늘날 가장 잘 살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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