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관조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
범어사 고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수지
해인사 승가대 졸업
동국대학교 복지행정대학원 선학과 졸업
봉은사, 동화사등에서 선원수행
현재 가평 백련사 주지
회수 : 163회      
제목 : 승원스님-네가지 나(我) 법회일자 : 2005-10-30
  가을도 다 지나가고 있는데, 이때만 되면 늘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게되고 좀 더 잘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무상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은 나(我)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한다. 인류역사상 모든 전쟁이나 분쟁은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욕망은 모두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모든 잘못된 결과는 나에서 비롯되고 나로부터 이루어 진다. 또 그 가운데에서도 나를 고집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크고 무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늘 한해를 시작하면서도 한해를 마치면서도 나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한다. 결국은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나라고 하는 병이야 말로 모든 중생이 소유하고 있는 병 가운데서도 가장 큰 병이다. 질병은 고치면 되겠지만 나라는 병은 고쳐도 고쳐도 끝이 없이 반복되며 또 그러한 나에게 속고 살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나를 미혹하는 것에 대해서 다음의 네 가지로 말하고 있다.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가 그것이다.
아치(我癡)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평생을 살아도 나를 모르며 쓸데없는 나를 나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하여 나라고 하는 생각에 어두운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다. 아견(我見)이란 잘못된 견해이다. 잘못 본 그 견해에 집착해서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아만(我慢)의 만(慢)자는 우쭐대고 교만함을 말하는데, 잘못된 나를 믿고 우쭐대는 것을 말한다. 교만한 것이다. 아애(我愛)란 나만 생각하고 나에만 집착하고 탐착하는 것이다. 이것을 네 가지의 근본 번뇌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를 잘 다스려야 한다. 이것으로 인해서 모든 고통과 번민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너무 강하면 세상을 사는데 방해가 된다. 또 그 정도가 심하면 극단적인 생각이나 행동이 나오게 된다.
원래 고정된 관념이나 고정된 견해는 없는 것이다.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 하였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이것만이 제일이라는 것은 없다. 금강경에서는 “여벌유자(如筏喩者)라 法尙應捨(법상응사)인데 何況非法(하항비법)이리요”라 하였다. 강을 건넌 후에는 뗏목을 버리고 가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법도 그러한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라는 뜻이다.
이 네 가지가 어느 하나라도 강하게 되면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이 지나치게 강하게 되면 상대를 이해하거나 양보하는 여유가 없고, 무조건 자신을 내세우게 되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특정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는 것이다. 연기의 이치를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많이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고 불행하다고 느끼면 불행한 것이고, 적게 가진 사람이라도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상대적이듯이 내가 옳다고 한 것은 반드시 상대방을 전재로 한 것이고, 또 자연히 상대방과 비교를 하게 된다. 나라고 하는 말은 너라고 하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분별과 비교에 의해서 나가 생겨난 것이다. 분별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면 내가 불행하거나 못산다거나 하는 생각은 일어날 수 없다. 비교하고 시샘하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생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더욱 더 비참한 생각에 빠지거나 교만해 질 수 있고 끝없는 괴로움과 편치 못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를 낮춘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거나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다. 섞였으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섞였지만 같지 않은 뚜렷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불절아(不折我)면 무위학(無謂學) 무위성(無謂成)이라 하였다. 나를 꺽지않으면 배울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다고 하였다.
특히 한 단체에서 자신을 너무 내세우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나를 비우고 나를 낮추는 것이다.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네 가지의 나 중에서 자신은 무엇이 강한지를 살펴보라.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제각기 다르게 다타나게 된다. 그래서 근욕성(根慾性)이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 보면 과연 나라고 내세울 만 한 것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아무것도 없는 그저 빈 껍데기 뿐인 무상한 것이 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서산대사는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60년 전에는 거시아(渠是我)요, 60년후에는 아시거(我是渠)라”고 하였다. 그림자는 허상이다. 그런데 없는 것을 있다고 고집해서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다. 육신은 없는 것으로부터 와서 없는 것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만 있는 동안은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나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수행이란 무상하고 무아한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다. 자신에 속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낮추거나 비우지 않으면 참으로 내가 존재할 땅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순간 순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늘 생각하여야 한다.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꺽을줄 아는 사람은 결코 작은 일에 작은 이익에 작은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을 낮추는 데에는 참는 것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천수경에서도 ‘참다운 참음은 참는다는 생각이 없이 참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아놓고서도 원망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이나 참았다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참음의 실체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참음이라고 하였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 참는 것은 두려워서 참는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참는 것은 싸우기 싫어서 소위 더러워서 참는 것이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참는 것이 최상의 참음이다. 그래야 자비도 화합도 인욕도 나오는 것이다.
참으로 참을 줄 아는 사람은 화가 나기 전에 참아버린다. 그래서 참는다는 것은 옳고 그름의 일체허물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만 참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나가 있다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범부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나에 집착하게 된다. 또한 나라고 하는 생각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교만스럽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스스로 높은 양 하게 된다.
안자라는 이는 “부관익고자는 의익하(附官益高者 義益下)하고 관익대자는 심익소(官益大者 心益小)하며 녹익후자는 시익박하(祿益厚者 施益박下)하라” - 벼슬이 점점 높아질수록 그 뜻은 낮게 가지고, 관직이 더욱 커진 사람은 마음을 더욱 조촐하게 가지며, 녹봉이 더욱 두터워질수록 베푸는 것을 더욱 많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하라는 이는 “경이무실(敬而無失)하고 공이유례(恭而有禮)하면 사해지내가 개형제야(四海之內皆兄弟也)라” 하였다. 이는 공경함에 실수가 없고 공손함에 예가 있으면 사방 모두가 형제가 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내가 없다고 하면 너무 허망해서 살 의욕마저 없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허망한 나는 버려야 한다. 허망한 나를 버리고 진정한 나를 찾았을 때에 행복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필요 없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기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내가 있다는 고집을 버리고 참다운 나를 채득한다면 ‘내가 옳다’ ‘내가 최고다’고 주장하며 사는 것 보다 훨씬 더 자유스럽고 당당할 수 있다. 또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한층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를 비우고 나를 낮추면 비교의 대상이 사라지게 된다. 비교하지 않으니까 우쭐대지도 또는 소침해 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비우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가만히 살펴보는 것이 수행이다. 참선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다. 나를 보고, 살피고, 나를 관리하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주위에 삼천 배를 했다느니, 일만 배를 했다느니, 천만 배를 했다느니 하는데 수행을 위해서가 아닌 구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기도라면 아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이 한 방편이므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은 버려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수행은 지금 나의 마음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순간 순간 변화하는 나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고, 참선은 하나의 생각을 골똘히 해서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괴롭고 힘들 때 그 괴롭고 힘든 그 나는 어떤 나인가를 가만히 살펴보는 것이 최상의 수행인 것이다. 그러면 괴로운 마음도 사라지고 힘든 마음도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았다면 다시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를 특별하게 고집해서 내세울 만 한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없고 나를 낮출 때 진정한 내가 형성되는 것이다.
종교인이라면 비교하고 차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대승과 소승이라는 구별도 없는 것이다. 분수대로 능력대로 할 수 있는 만큼, 있는 바 대로 이해하고 느끼면 된다. 그래서 나가 강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를 낮추고 나를 꺽으면 주변이 편안해진다.
나 자신, 나 자신의 삶을 절을 하면서 들여다 보고 또 절을 하면서 내려다 놓아보라. 그리고 부처님과 대화를 나누어보라. 기도라는 것은 부처님과 나의 대화인 것이다. 그러한 정법 속에서 참다운 나에 눈을 뜨고 그 속에서 편안하고 안정된 하루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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