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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의 ‘고향의 나그네’와 ‘고향나그네의 고향 찾기’에 이어 오늘 이 시간에는 고향나그네가 고향을 찾았을 때 어떤 삶을 사는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고향이라 함은 해탈, 열반 또는 극락이라고 했었다. 고향을 찾았을 때의 느낌이나 삶에 대하여 경에서는 설명을 하고 있지만 비유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으므로 주로 비유로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나그네생활을 하는데, 나그네는 항상 설움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나그네의 시름은 불교의 표현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인간문제 즉 사회 문제이다. 천상과 인간, 지옥, 아귀, 축생으로 나눌 때의 인간인데,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을 일컫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인생 문제이다. 인간문제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살다 보면 빈부와 상하가 생기기 마련인데, 맹자에 ‘조정(朝廷)엔 막여작(莫如爵)이요, 향당(鄕黨)엔 막여치(莫如齒)요, 보세장민(輔世長民)엔 막여덕(莫如德)이니라’ :조정에서는 작위가 최고이며, 고향에서는 나이가 최고이며, 세상을 돕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덕이 최고다. 라는 말도 있듯 상하관계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빈부상하는 사람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환경이다. 사람이 한평생 태어나서 죽는 인생문제는 생로병사라 할 수 있다. 태어나고 늙고 아프고 죽는 것은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 문제와 인생 문제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이것에서 기쁨을 얻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하셨던 깨달음이다.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인간문제와 인생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법화경에서는 ‘화택(火宅)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유를 하였는데,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다.’라고 하였다. 삼계란 중생이 사는 세상인데 이 세상은 무상(無常)의 불, 덧없음의 불이 계속 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겼다 사라지고 변하고 바뀌는 생멸법(生滅法) 변역법(變易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괴로움이 따르는 것이다. 불타는 집 속에서는 아무리 이리로 저리로 피해봐야 그 불길을 면할 수 없다. 그 불타는 집에서 불길을 면하는 방법은 그 집에서 나오는 것 뿐이다. 또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도 하는데, 그 바다가 일시적으로 잔잔하다 하더라도 그 바다에 있는 한 파도를 면하기 어렵고, 가라앉지 않을 도리는 없다. 바다 속에서 안전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하고자 한다면 바다에서 나아가 언덕(피안彼岸)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다란 생로병사를 겪고있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바다에서 나아간다는 것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불타는 집이 곧 인간의 모습이며 불타는 집에서 나오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이 몸 그대로 영원히 건강 하십시오. 만수무강 하십시오.”라고 들 말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쓰고 들으며 순간의 즐거움에 빠져서 살고있는 것이다. 또 무명(無明)과 대명(大明)이라는 말이 있다. 무명이란 어두운 공간이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는 아무리 촛불을 키고 등불을 켜봐야 어두움이라는 공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대명이라는 큰 해가 뜨면 등불이나 촛불이 필요치 않고 그냥 밝은 것이다. 어두움이란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어두움이 바로 인간 문제, 인생 문제이고 큰 해가 뜨는 것이 깨달음이다. ‘빈두로존자의 우타연왕설법경’에는 빈두로존자라는 인도의 스님과 우타연왕이라는 왕의 인생대화를 나누는 글이 있는데, 왕이 스님에게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 할일 도 많고, 구할 것도 많고, 얻을 것도 많은데, 스님은 왜 도를 닦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였다. 빈두로존자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우물의 비유를 하였다. “어느 사람이 넓은 벌판을 걸어가고 있는데 사나운 코끼리가 쫓아왔습니다. 도망을 가다 보니 우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큰 등나무 줄기가 그 우물 속으로 뻗어있어 그 등나무 줄기를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다 보니 우물 바닥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고 우물 위에서는 코끼리가 내려다 보고 있어 오로지 매달려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흰쥐와 검은 쥐가 등나무 줄기를 번갈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또 네 마리의 뱀이 번갈아가며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꿀벌들이 꿀을 한 방울 두 방울 떨구어서 그 꿀을 핥아 먹었는데,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그 꿀을 먹는 동안에는 즐거웠습니다. 넓은 벌판이란 이 세상이며, 나를 쫓아오는 무서운 코끼리는 세월이며, 등나무 줄기는 생명이며, 바닥의 독사는 죽음이며, 네 마리의 뱀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몸에 찾아오는 병을 뜻하며, 꿀은 세상의 쾌락이며,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깨닫지 못한 기쁨이란 위급한 상황에서 잠시 잊으며 받아먹는 꿀과 같은 것인데 세간의 쾌락에 큰 의미를 둘 수 없어 구도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한가지밖에 없다. 그러한 꿈을 꾸다가 깨어났을 때에는 코끼리도 뱀도 아무것도 없다. 깨달음이란 그와 같은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 꿈속의 모든 것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빈부상하의 고통, 생로병사의 고통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이 사라진다. 무상함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것은 순간적으로는 위안이 될 수 있으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깨달음 이란 바다에 있는 나그네가 바다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고, 불타는 집에 있는 사람이 불타는 집에서 나오는 것과 같고, 어두움에 있는 사람이 태양을 만나는 것과 같고, 악몽을 꾸던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 베트남 스님으로서 유명한 스님이 계신데 그 스님은 “깨달음은 궁극적 실제와 만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궁극적 실제와 만나는 것이란 다른 말로 하자면 원초적 진실상과 만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원초적 진실상은 진여(眞如) 또는 여여(如如)라는 말과 같다. 본래 근원에서부터 있던 진실상과 만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비유하자면 물은 때로는 구름도 되고, 때로는 얼음도 되고, 때로는 비도 되고, 때로는 이슬도 된다. 이것이 변역성 즉 변하고 바뀌는 성질이다. 그러나 그렇게 변하고 바뀐다 하더라도 물이라고 하는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불변성이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변역성에서 불변성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도 원초적진실상이 있는데, 그것을 본성이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한다. 물을 말할 때 물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구름을 보되 구름의 형상만 보는 것은 인간을 보되 인간의 빈부상하만 보는 것과 같다. 원초적 진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원초적 진실상이 바로 불변성인데, 불변성으로 돌아가서 변역성을 해결하여야지 변역성에서 변역성을 해결하려고 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사람에게 만수무강하라고 하는 것은 얼음을 붙들고 영원히 녹지 마라고 하는 것이나 구름을 보고 영원히 흩어지지 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얼음이 영원히 녹지않고 구름이 영원히 흩어지지 않겠는가? 구름이 흩어지든 얼음이 녹든 물이라고 하는 불변성이 있음을 알아서 때로는 구름으로 때로는 얼음으로 때로는 비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 속에서의 죽음이 없는 진실상. 늙음 속에서의 늙음이 없는 진실상 이것이 원초적 진실상이고, 그것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부처님께서 여유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 없는 진실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은 죽음 자체만 볼 뿐 죽음이 없는 진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생사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정말 편안함을 얻고 싶다면 죽음이 없는 진실상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고향을 찾는 것이다. 죽음이 없는 진실상을 보게 되면 첫째 만족이 온다. 그러므로 이세상의 만족이란 깨달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원초적 진실상 궁극적 실제상을 체험했을 때 그것에서 한없는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평화가 온다. 이 세상에서 참된 기쁨이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먼저 평화로울 때 생기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평화가 되면 만족도 얻을 수 있다. 마음이 평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환경이 오더라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돈이 많아서 만족하는 것, 아는 것이 많아 만족하는 것 등은 모두 일시적인 만족일 뿐 조금 지나면 다시 허무와 갈등과 고통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자신의 마음이 평화가 되면 절대적인 만족이 오는 것이다. 몸은 불변성의 변역성이기 때문에 변역성의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 만족이 절대적인 만족이다. 그렇게 되면 늙음과 죽음이 전혀 나의 만족을 해칠 수 없다. 지혜가 고도로 높아지면 이 세상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깨달음의 만족이다. 이러한 만족과 평화를 얻은 분이 하는 일은 무념(無念)과 여락(與樂)이다. 무념이란 이 세상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집착이 없는 것이다. 집착은 미워함이다. 미워함이란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미움이 생기는 것이다. 여락이란 모든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이 무념과 여락이 고향 찾은 나그네의 고향 찾은 삶이다. 모든 사람에게 의존심을 끊어야 마음이 편안하다. 의존하다 보면 의존한 바 대로 되지 않고, 그러다 보면 미워지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평화가 오는 것이다. 또 미워한다는 것은 의지한다는 말과 같다. 미워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무념은 여락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고향나그네가 고향을 찾은 다음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항상 살펴야 한다. 금강경에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 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라’ 하였고 또 반야심경에는 조견오온개공도(照見五蘊皆空度)라 하여 ‘비추어 보라’는 말이 있는데 모두 보고 살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천지 만물이 항상 무상하게 변화하는데 이것이 변역성이고, 원초적 진실상으로서의 불변상은 그 변역상 속에 그대로 있다. 큰스님들이 법문을 하시며 무엇인가를 들어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형상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알라는 것도 아니다. 형상이나 이름은 모두 변역성이므로 그 불변성을 보라는 것이다. 진실상을 볼 때 나그네의 시름은 모두 사라진다. 바로 지금 여기에 모든 원초적 진실상이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 지나간 것을 생각하고 다가올 것을 생각하다가 지금 여기에 있는 진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순간 순간 살피는 것이 명상이며, 그것이 원초적 진실상과 만나는 것이다. 모든 진실을 살펴보면 변화하는 속에서 불변성이 보인다. 그것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벽암록에 구지선사의 법문이 있는데, 스님은 손가락 하나로 깨달음을 얻었으며, 손가락 하나로 여러 사람을 깨닫게 하셨다. 평생 법문이 손가락 하나였다고 한다. 그 손가락은 생각으로 정의 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원초적 진실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실상을 보는 순간 빈부상하라던지 생로병사의 고통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떤 스님은 법을 물으면 땅바닥을 치기도 하셨고, 어떤 스님은 입을 크게 벌려 보이기도 하셨다 한다. 이러한 것을 시로 표현하기를 ‘눈먼 거북이를 바다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나무판자 하나를 띄워주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불교를 만나서 기도를 잘 하면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경을 잘 보면 바로 깨달을 수 있다. 현상을 이름으로만, 형태로만 기억하지 말고 깊이 보면 바로 그 원초적 진실상을 만나게 된다. 그기에 참다운 평화가 있고 참다운 기쁨이 있다. 이것이 깨달음의 행복인데, 깨달음의 행복이란 것이 바로 나그네가 고향을 찾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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