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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경(禮敬)이라 함은 불자가 부처님의 교법을 신행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예경은 예배와 공경이라는 뜻인데 이는 신행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예경을 통해서 확실하게 불교를 알게되고, 받아들이게 된다. 또 불교를 통해서 자신이 변화하게 된다. 예경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교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기 어렵다. 또 점점 불교세계에 들어가다 보면 자기 스스로 볼 수 있고, 스스로 알 수 있는데, 스스로 보는 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예경은 기본 입문이라면, 정견은 입문에서 더 깊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정견까지 들어가야 자기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정견을 얻지 못하면 자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과정이다. 이 경지를 깨달음 이라고도 하고, 해탈이라고도 하고, 성불이라고도 한다. 내용은 정견이다. 바르게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정견의 경지에 들어가면 진리, 생명, 마음을 바로 보는 것이다. 보고 난 후에도 바르게 보지 못했을 때에 가졌던 생각들 즉 번뇌망상이 완전히 없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린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고 나서 삼칠일간 사유를 하시고 교화를 시작하셨다고 하는데, 이 사유의 과정이 그러한 망상심이 완전히 소멸시키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 시간은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경우는 25세에 정견을 얻었는데, 완전히 근심 걱정이 사라진 것은 40세였으므로 15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화가 나는 것이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화가 완전히 끊어진 것이 망상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교화를 하려면 또 화를 내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도 교화과정에서 화를 내셨다. 이것은 중생을 위해서 내는 화이다. 화의 성격이 자기를 위해서 내는 것은 아집이고 번뇌망상이다. 자기불만과 자기의 욕구를 위해서 내었느냐, 중생을 위해서 내었느냐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화를 내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자기불만으로 나타난 것과 중생을 위해서 나타난 것의 기운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괴로워 하고 걱정하는 근심걱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단계가 있는데, 그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쓸데없는 걱정을 멀리 여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경열반(究竟涅槃)’ 자기의 문제를 해결한 극치인데 그 이전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을 해야 한다. 오온(五蘊)이 다 공한 것을 봐야 ‘원리전도몽상’이 된다. 불생불멸을 보았을 때 고통이 사라지게 된다. 무서움도 불만도 근심걱정도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첫번째로 조견오온개공을 해야 한다. 우리의 몸이 생사가 없음을 깊이 보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원리전도몽상이 되어야 한다. 모든 망상을 여의어야 하는 것이다. 금강경에도 ‘일체상을 여의는 것을 부처라 한다’고 하였다. 일체상을 여의는 것은 모든 망상을 여의는 것인데, 망상은 모두 아집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 아집은 내가 불생불멸인 것을 못 봄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조견오온개공과 원리전도몽상까지 했을 때 정견인 것이다. 이것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가피(加被)를 입어야 한다. 작은 힘을 크게 보태어 주는 가피를 입었을 때 정견을 얻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가피는 예경을 통해서 얻게 된다. 예경은 예배드리는 것, 독경 하는 것, 기도, 참회, 참선 등 의례를 통해서 부처님을 향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예경을 통해서 내가 더 향상할 수 있다. 예경이라는 것은 자신을 더 크게 여는 일이며, 크게 북돋는 일이며,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학술적으로만 불교를 하면 독서하고, 토론하고, 발표하는 것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주관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가피를 입을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다. 자신을 향상시킬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예경은 기본적으로 만남이다. 다른 모든 존재와 더 크게 만나고, 깊이 만나려면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 공경심이 없는 만남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들은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엄청나게 변화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힘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가피이다. 이처럼 가피라는 것은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린아이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라도 어른의 손에 이끌려서는 갈 수 있다. 이것이 가피인 것이다. 혼자서는 갈 수 없지만 힘이 있고,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이끌어 준다면 갈 수 있는 것이다. 관세음보살님을 부를 수 있는 것도 가피이며, 사찰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가피이다. 제도적인것, 언어적인것 등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가피인 것이다. 체험적인 가피도 있는데, 꿈으로 인해서 평소의 생각을 바꿀 수 있게 되는 경우, 꿈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을 보았을 때 라던지, 등 이러한 것을 ‘현몽가피(現夢加被)’라 한다. 또 언제 가피를 입었는지도 모르게 자기가 크게 달라지는 경우는 ‘명훈가피(冥熏加被)’라고 한다. 그만큼 가피가 중요하다. 불교를 잘 만나서 그대로 잘 따라하면 되는데 하다가 딴생각을 하고 요동을 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파리가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비행기를 탔다고 하자, 파리가 스스로 날아서 가려면 며칠이 걸려도 가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불과 40분 정도면 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 얼마나 다행한 것인가. 그러나 파리는 자신이 비행기를 타고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괸세음보살님을 부를 수 있고, 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는 것, 부처님께 예경할 수 있는 것 이 모두가 엄청난 인연인데 그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파리는 자신이 좋은 인연을 만났음을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하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이다. 얌전히 있으면 곧 도착하게 될 텐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를 만났으면 얌전히 예배하고, 독경하고, 기도하면 되는데, 자꾸 자기가 뭘 하려고 하면 안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의 힘을 입는 가피를 입어야 하는데, 자꾸 스스로 견해를 내려고 한다. 근본을 보지 못하고 일으키는 생각들은 망상일 뿐이다. 경전을 보아도 그렇다. 경전에 나와 있는 그러한 말씀을 스스로 해 낼 수는 없다. 경전을 깊이 보면 경전이 내면 속에 내면화 되고 심화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세계는 전혀 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가피이기 때문에 경전을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 어른의 손에 이끌려 가는 것이지 스스로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초기경전에서는 여실지(如實知) 즉, ‘실답게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여실견(如實見)이라고도 하였다. 잘못 알고있는 것 미혹한 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면 새끼줄이 있는데 그것을 새끼줄 그대로 보면 깨달음이고, 잘못 보아 뱀으로 보면 미혹한 것이다. 잘못 보아 뱀으로 보는 순간 망상이 생기고, 망상이 생기면 걱정이 되어 온갖 일을 벌이게 되다. 이를 혹업고(惑業苦)라 한다. 미혹하고 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중생의 윤회세계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잘못 본 것에서부터 생기기 때문에 잘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보조스님도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고 하였다. ‘땅에서 넘어진 자’ 라는 것은 잘못 본 것을 말하는 것이고,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것은 잘 보는 것에서 고통이 아닌 해탈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도를 닦았는데, 깨달음을 통해서 고통을 없앤 것이다. 실답게 보는 정견을 하여야 한다. 부처님은 무엇을 실답게 본 것인가.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이것은 불교이고 저것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삼법인(三法印)이다. 부처님께서 인증을 하신 것이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다. 즉 무상을 깨달으신 것이고, 제법(諸法)이 무아(無我)인 무아를 바로 보신 것이다. 그리고 근본은 적정(寂靜)임을 깨달으신 것이다. 우주의 생명이 적정이다. 적정이라는 것은 유무가 아니고 보이고 안 보이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생명의 근본 우주의 근본이 적정임을 깨우치신 것이다. 생각은 적정이 아니다. 적정과 반대되는 것이 사견이다. 한순간 일어나는 생각은 적정이 아닌 것이다. 적정은 그대로 보고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무상하게 보지 않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무아로 보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을 일으켜 무아를 보지 못하고 무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상한 것을 바로 보는 것이 정견이다. 모든 것은 모여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집(五集)이라고 말을 한다. 모여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없다. 그런데 항상 ‘나’라는 것에 집착해서 무아를 유아로 보고, 무상을 유상으로 보는 전도몽상을 일으킨다. 또 생각도 개념화 하고 상대화 하려 하기 때문에 적정과 거리가 멀다. 적정이란 개념화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아와 무상 그리고 적정이라는 삼법인을 통해야 불교이고 그것이 아니면 아닌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고 정견이다. 그리고 반야바라밀 설법에서는 ‘조견오온개공’이라 하여 공을 제대로 보면 그것이 정견이라 하였다. 연생연멸(緣生緣滅)이기 때문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인 것이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고 인연에 의해서 멸하기 때문에 생겨도 그 자체란 없다는 것이다. 파도를 예로 들자면 파도는 바람이라는 인연에 의해서 생겨났고, 바람이 잔잔해지면 잦아들게 된다. 물 자체에는 파도라는 것이 없다. 아집과 근심걱정이 모두 소멸되는 것이 원리전도몽상, 정견의 세계이다. 처음에는 예경을 잘 해서 가피를 입어야 하고, 다음에는 조견오온개공을 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근신걱정이 다 사라지는 단계이다. 이것이 신행의 마지막 단계이고, 그 다음 단계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나아가는 대자대비의 단계이다. 불교를 믿는다면 첫번째 단계인 예불부터 착실히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경 하나라도 깊이 보고, 기도 한번이라도 깊이 한다면 그러한 예경으로부터 업장이 소멸되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이것이 가피이다. 가만히 스스로를 무상을 보는지 못 보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무상을 보지 못하면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망상을 가지고 어느 때 생각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러나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은 인연에 의해서 사라진다. 어떠한 환경에 의해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났다면 그 환경이 사라지면 그 생각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경에서는 이것을 ‘도둑’이라고도 하고 ‘손님’, ‘객진’이라 부른다. 스스로 즐거운 것은 지혜이지만 누가 칭찬을 해줬다던지 날씨가 좋아서 라던지 외부의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은 외부의 인연이 바뀌면 사라지게 된다. 손님은 떠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손님을 주인으로 착각을 해서 나중에 고통을 받게 되므로 도둑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체를 깊이 보아서 무아로 보고, 무상으로 보고, 적정으로 보고, 불생불멸을 보게 되면 근심이 사라지게 되어 원리전도몽상이 되는 것이다. 정견을 하기 위해서는 적정과 공성(空性)을 확실히 봐야 한다. 들어서 말하는 것은 본 것이 아니다. 확실히 본 견해가 항상 유지 될 때 그것이 정견이다. 가피와 정견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어 근심걱정이 없어지고 나면 중생들이 근심걱정 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게 되는데 그것이 자비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하면 될 텐데 하지 않으면 분노를 내게 된다. 부처님도 화를 내시는데 그것은 자비의 분노이다. 중생들이 성불하기 전에 화를 내는 것은 거의 욕구의 분노이다. 아이 에게 화를 낼 때 진실로 아이만을 위해서 화를 내는 것인지, 부모의 욕심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는가가 문제이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욕심이 들어있다면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없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욕심으로 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불상에도 자비상이 있고 분노상이 있다. 신장상이 분노상이다. 화가 나면 눈, 코, 입이 크지고 손을 들고있는 특징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신장상이다. 분노존과 자비존을 같이 출현시기는 것은 중생교화의 방편이며 자비의 실천인 것이다. 우리가 화를 낼 때 정말로 사심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화를 낸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조금이라도 자기 욕심이 섞여 있었다면 참회하고 반성하여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화를 내더라도 그 화는 사랑하는 만큼이어야 한다. 먼저 기도, 독경, 참회 등을 통해서 가피를 입어야 하고, 바른 지견을 가지고 근심걱정 없이 잘 살 수 있도록 부지런히 닦는 것이 신행을 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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