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해인사에서 도성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71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78년 조계종 제13교구본사 쌍계사 교무국장
`80년 조계종 총무원 감사과장, 규정과장
`83년 해남 대흥사 총무국장, 강사
`86년 조계종 총무원 재정국장
`92년 조계종 제10대, 11대 중앙종회 의원
현재 제주 청묵예원장
회수 : 119회      
제목 : 원학스님-육체보다 법에 귀의해야 법회일자 : 2005-01-17
  “발카리여 썩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하느니 차라리 법을 보는 사람이 되어라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아야 하느니라.”
이 말씀은 부처님의 초기경전에 나오는 말로, 부처님의 제자인 발카리가 몸이 몹시 쇠약해져 얼마있지 않아 죽게 될 지경이었는데, 다른 이에게 말하기를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부처님을 직접 뵙고, 인사를 드린 후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정신적으로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기를 내 마음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불자로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그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부처의 몸에 예배하기 이전에 자신의 몸을 보라고 하신 것은 법 즉 진리, 자연의 현상에 순응할 줄 아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 사지가 움직이게 된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이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물건을 잃어버리고 오면 그 때 ‘아~ 내 정신 좀 봐라’고 한다. 물건이 없어져서야 자신의 정신을 찾으려 하는데, 정신은 항상 사지의 주체로써 우리의 생활 가운데 나간 적이 없다.
이것이 부처와 보살과 중생의 차이이다. 환경에서는 부처와 중생과 마음이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는 엄연히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내 정신 봐라’는 의식을 확실히 깨달아 보는,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되돌아 보는 불자가 참다운 불자이다.
부처를 말 할 때, 제일 빠른 방법은 형상불(形像佛)을 통해서 자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형상의 부처님을 통해서 사지를 움직이는 주체가 부처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형상불을 통해서 여래장불(如來藏佛)을 만나야 한다. 여래장불이란 사람사람마다 사지를 움직이게 할 줄 아는 그 마음의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디를 가도 ‘내 정심 좀 봐라’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몸 속에 있는 부처를 알기만 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낼 줄도 알아야 한다. 즉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과만족덕불(果滿足德佛)이라 한다.
풍족한 가운데서는 이렇게 자기 몸 속에 있는 부처를 알기 어렵우며, 힘든 가운데서 오히려 알기 쉽다. 보시를 행하는 것도 풍족할 때는 오히려 행하지 못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는 이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하면 덕을 베풀어줄 수 있는 부처가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버려야 할 것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고 계신다. 어려우면 분수를 지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탐심이 줄어든다. 또 어렵기 때문에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자세가 되므로 성내는 마음이 줄어든다. 어려운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겪었던 어려움을 알므로 남의 어려움을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므로 어리석음이 줄어든다. 또 어렵기 때문에 살아감에 있어 교만해지지도 않는다. 또 불필요하게 사람에 대해서 의심하는 불신도 줄어든다. 정말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겪어보고 안다면 믿음이 중요함을 알고 진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결과가 만족해져서 덕을 쌓아서 그 덕을 남들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부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부처라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을 불상이라고 하지 부처라고 하지 않는다.
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凡所有相 皆是虛妄) - 무릇 있는바 상이란 다 허무하다.
약견제상비상 (若見諸相非相) 이면 -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볼 줄 안다면
즉견여래 (卽見如來) - 여래를 볼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을 불상을 보고 불상을 통해서 살아있는 나를 만나야 진짜 부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껏 불상이 나에게 복을 주고 덕을 주고 나의 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다면, 지금부터 불상을 통해서 살아있는, 내 사지를 움직이는 육신 안의 부처님을 만나야 불상의 효험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것이 참다운 불자의 신앙관이다.

부처라는 것은 어느 특정인이 소유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를 가지고 있는 평등한 이치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내가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 먼저 보살이 되는 것이다. 보살은 중생과 부처의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다양한 실천덕목으로 보살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잠시 뿐이고 일상생활 속으로 돌아가면 잊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절에서 불상앞의 부처님에게 열심히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집안의 모든 식구들이 부처로 보이더라고 한다. 어제만 해도 밉던 마음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오로지 내가 부처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돌아보고 참회한다는 것이다. 차별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그 속에서 공통된 살아있는 부처라는 인식을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에게는 그 차별성의 문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윤리적 도덕관이므로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지키면서도 그 내면의 세계에서 똑 같은 부처로 보게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는데 잘못된 것을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부처님께서 여덟 가지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 첫째가 한(허깨비)으로 없는데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생로병사의 단계를 거쳐서 반드시 소멸되는데 살아있는 이 삶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있다. 두 번째는 내가 일으키는 증오의 불길은 그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끄지 못하고 산다. 그래서 자신의 비위에 조금만 거슬리면 원망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원인을 찾아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물속의 달과 같은 것이다. 물속에 달이 있지만 건져보려 해도 건져지지 않는 것이다. 또 허공화라 하여 이른봄의 아지랑이가 보이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욕망이라는 환락은 잠시일 뿐 오래 가지 못한다. 그리고 메아리는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소리를 그치면 이내 사라진다. 영원히 소리를 지르면 살수는 없는 것이다. 또 저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이상적인 꿈을 그리면서 살지만 결국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도 부족해서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꾼다. 그 꿈속에서 본 사람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를 가든 그림자를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그 그림자에 얼마나 놀라고 착각을 하면서 살아왔는가? 그 그림자는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체가 있는 듯 착각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옛날에 여우가 포도밭을 지나다 포도가 먹고싶은데 울타리가 쳐져있어 들어갈 구멍을 찾다보니 머리가 겨우 들어갈만한 구멍을 발견하게 되었다. 살이 있는 몸뚱이가 들어가질 않자 3일을 굶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실컷 배부르게 포도를 따서 먹고는 나오려 하자 또 몸뚱이가 걸려 나올 수 없었다. 다시 3일을 굶어서 겨우 나온 후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속은 똑같구나” 하였다. 중생의 삶도 그와 같다. 그 원인이 무엇이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추구하는 욕망이 채워지면 만족한다. 그러나 그런 만족은 위의 여덟가지의 실체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죽을 때 즈음에야 자기가 살아온 모습을 되돌아 보지만 이미 늦은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는 부모의 몸을 통해 잠시 빌려온 것이다. 육체가 수명을 다했을 때에는 육체속에 있는 부처님은 진리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단 한 분이다. 진리를 상징하는 모습은 한 분이지만 그 외에는 수많은 부처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수많은 생명체가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처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다 소유할 수 있다.
스님들이 화장을 하고 나면 반드시 뼈를 강이나 산에 뿌렸다. 부처가 떠나고 난 빈집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에 뿌리면 물고기에게 보시하는 것이요, 산에 뿌리면 짐승들과 나무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왔다가는 진리를 확실히 믿어야 한다. 그러면 죽음에 대해 여유가 생기고 이미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의 뜻도 이 세상에 모든 형상화 되어있는 것은 그 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형상으로 있다가 결국은 없어지는 것이므로 그 형상에 치우치지 말고 그 형상을 주도해 나가는 진정한 부처가 무엇인가를 찾아라는 뜻을 담고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일수록 불자들은 오히려 용기를 가지고 불자로서 삶의 가치를 하루라도 더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고 다짐하고 생각한다면 내 몸 속에 있는 부처가 광명을 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나의 행동이 즐거워지고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즐거워질 것이다.

춘유백화 추유월(春有百花 秋有月)하니 하유양풍 동유설(夏有凉風 冬有雪)이로다
양무한사에 괘심두(若無閑事 掛心頭)하니 변시인간을 호시절(便是人間 好時節)이로다

봄이되면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하지 말라고 해도 어디서든 꽃을 볼 수 있고,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또 가을이 되면 달은 더 밝에 보인다. 또 여름에 부는 바람은 또 그 시원함이 다르다.또 매서운 추위속에서 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았을 때의 기쁨은 또 어떠한가.
아무리 어렵고 괴롭게 산다 하더라도 사계절은 언제나 찾아오고 그 계절 속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습들은 분명히 있다. 그 모습 속에서 내 자신은 결코 부족함이 없이 그것을 누리고 갈 수 있는 부처가 있다는 확신을 갖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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