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수덕사 부설 무불선원 강좌 중 현재 전북대 철학과 강건기 교수님의 선전개설 강의를 녹화 방송합니다.
회수 :
1회
제목 :
제1강 서론(1) 현대사회의 불교(佛敎)와 선(禪)의 의미
법회일자 :
2003-08-18
제목: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 제 1강 서론 (현대사회의 불교(佛敎)와 선(禪)의 의미)
내용 :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 강의에 앞서 `현대사회에서의 불교와 선의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현대세계는 과학과 기술, 물질의 발달시대이다. 그 혜택으로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은 ‘잘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로마클럽보고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모임. 1968년 로마서 첫모임 이후 ‘과학의 무한정 성장이 가능한가’ 에 대해 연구에 들어감. 미 MIT공대에 위탁 연구. 그 연구 보고서를 말한다. 보고서의 공식명칭은 <성장의 한계>이다. 보고서 발표이후 세상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보고서는 “앞으로 10년간 이같은 추세로 문명이 성장 발달한다면 지구는 백년 안에 파멸할 것이다” 라고 정리함. 보고서 발표이후 미국 사회가 더욱 충격을 받은 이유는 보고서 발표이전에는 누구도 산업의 발달이 지구파멸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이러한 문명을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로마클럽 보고서를 생각하게 하는 동양의 우화가 있다. 장자의 응제왕편 ‘혼돈이야기’ 남쪽의 숙과 북쪽의 홀이 살았다. 숙과 홀은 협의할 일이 많았으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번 회의를 하려면 힘들게 이동해야 하는 등 불편했다. 어느날 이들 숙과 홀은 남과 북 사이의 중앙에서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앙의 임금인 혼돈에게 부탁하니 혼돈이 흔쾌히 응했고 이들은 멀리까지 가지 않고 중앙에서 편히 만날 수 있었다. 숙과 홀은 혼돈에게 은혜를 갚고자, 본래 얼굴에 구멍이 없는 혼돈의 얼굴에 구멍을 뚫어주기로 했다. 한번 만날 때마다 한 개의 구멍을 만들어 줬다. 그러나 정작 7번째의 구멍(우리 얼굴의 구멍은 모두 7개)을 뚫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우리말로 ‘혼돈’이라 함은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되지만, 철학적인 의미로는 좋은 뜻으로 쓰인다.
로마클럽 보고서가 제기한 문제는 아직도 인류의 현안으로 남아 있다. 오늘을 사는 모든 종교, 철학, 사상은 죽어가는 혼돈을 살릴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야 된다. 그렇다면 과연 불교와 선은 이 문제의 해결 실마리를 제시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죽어가는 혼돈을 살릴 처방이 불교와 선에 있다.
혼돈이 죽게 된 원인을 보자. 사상적으로 보면,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이원적 사유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이원적 사유 형태란 서양의 전형적인 사유형태로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신과 인간은 둘로 나눠져 있으며, 그 속성부터가 다르다고 인식한다. 또한 사람과 자연, 사람과 다른 생물과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같은 사상에서의 문명은 자연을 정복하고 함부로 하는 것이 당연시 됐다. 서구의 휴머니즘 역시 이원적 사상을 전승한 표본이다. 휴머니즘에서의 인간이란 개체적인 인간을 뜻한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생물을 모두 둘로 보는 가운데 인간중심주의 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인 관점에서의 인간은 다르다. 불교에서의 인간은 ‘안 이 비 설 신 의’로 표현되는 표층의 나 외에 심층의 깊은 본래의 나를 말한다. 이것이 ‘불성’이요, ‘참나’인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홀로 높은 나 이것은 우주와 둘이 아닌 나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 파괴등의 심각한 현실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환경운동 등의 실질적인 캠페인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불교의 ‘하나인 세계관’인 것이다.
불교란 무엇인가. 쉽게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그리고 불교는 깨침의 길, 깨침의 종교라 할 수 있다. 깨침은 불교의 처음이요 끝이다. 깨침 자체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생각으로도 사량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깨침을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 볼 수 밖에 없다. 깨침을 근본불교에서는 연기라고 하고, 대승불교에선 공, 선에서는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이 모두가 깨침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며, 모두가 불이 (不二)를 말한다. 둘이 아니다, 쉽게 하나인 세계관이다.
(이원적인 사고방식)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탐심이 나고, 욕심을 다 이루지 못함에서 진심이 난다. 이는 모두 본래 하나는 둘로 나눠보는 치심 때문이다. 이같은 삼독의 삶이 중생의 삶이다. 우주와 내가 하나 되는 순간이 바로 깨침의 순간이며, 자비의 삶이다. 이것이 또한 부처님의 삶이다.
선(禪)에서 역시 깨침이란 하나인 (생명)세계에 눈뜨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선의 현대적인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결론으로 말하면 불교와 선(禪) 만이 죽어가는 혼돈을 살릴 수 있는 세계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