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根本佛敎, Fundamental Buddhism)의 이해를 위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인 십이연기설과 중도설 그리고 수행과 열반에 대하여 자세히 알어본다.
회수 : 28회      
제목 : 근본불교(8) 법회일자 : 2003-08-01
내용 : 석가모니뿐만 아니라 비바시불(Vipasyin)을 비롯하여 과거에 출현하셨던 여러 부처님들도 모두가 보리수 아래서 십이연기를 역, 순으로 관찰해서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설해져 있다. (잡아함 권I2)
순관(順觀)은 무명에서 노사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역관(逆觀)은 노사에서 무명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 역 두 관찰에서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는 먼저 역관에 의한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전에도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 (잡아함 권12) 불교의 종교적 사색은 현실(생사의 문제)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화되고 있어 신이나 우주의 원리로부터 설해 내려오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역관은 불교의 이러한 추리적 사색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순관은 깨달음의 내용에 입각해서 생사의 발생과정을 밝혀주는 설명적 교설이다. 십이연기설은 중추적으로 심화되는 불교의 교리 조직 중에서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이 "제가 보기에 연기는 그렇게 심심(甚深)한 뜻이 없는 듯합니다." 라고 말 하였을 때, 부처님은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심심한 것이니 보통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증일아함 권46)
십이연기설은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설해진 여러 가지 법문을 하나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형태임을 보여준다. 우선 그 지분의 조직만 보더라도 오온, 십이처, 생사 등의 여러 가지 법이 그 속에 하나로 짜여져 있으며, 연기라는 발생법에는 인과, 인연, 상의상관 등의 모든 불교적 개념이 포섭되어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중도설
불교는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인도 정통파 사상의 아트만을 부정하는 무아설 이라든가, 형이상학적인 희론(戱論, prapanca)을 부정하는 무기설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초기 경전에 설해진 최상 법문으로서의 십이연기설은 이러한 불교의 종교적 입장에 대해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심오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먼저 무아설에부터 살펴보면,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라는 근거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무상하고 괴로움이 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아설은 완전하고 철저한 무아설에 이른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일체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권10) 무아라고 하지만 현채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혹을 일으켰던 찬타 비구에게 다음과 같은 해답이 베풀어지고 있다. "세간의 집(集, 발생)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고, 세간의 멸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여래는 그 두 끝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 "(잡아함 권10)고 한 다음 곧 십이연기설이 설해지고 있다.
세간(loka)라는 말은 세계나 일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무아설의 `아`도 여기에 포함 된다. 그런데 그러한 세간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연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실재성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에서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세간의 멸을 여실히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 는 말은 이 뜻을 가리키고 있다. 불교 무아설의 최승(最勝)한 뜻(parama-artha)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음으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 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찬타 비구가 제기했던 `알고보고 말하는 그 ‘나’는 바로이러한 나(妄我) 이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교설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곧 십이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형이상학적인 희론(戱論)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계셨는데, 이것 또한 십이연기설에 최상의 이론적 근거를 두고있다. 불교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희론의 조직적인 제시는 십사무기설(十四無記說)로써 다음과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이다. 세계는 상(常)인가, 무상(無常)인가, 상이며 무상인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세계는 유한(有限)인가, 무한(無限)인가, 유한하며 무한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닌가,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유인가, 무인가, 유이며 무인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석가모니께서는 의례 답변을 않고 침묵(無記)을 지키셨다. `무기(無記, a-vyakarana)`는 해답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열네 가지 문제를 십사무기(十四無記)라고 하는데, 석가모니께서 이렇게 답변을 삼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가 본래 현실 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본적인 입장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이유의 하나로 들 수가 있다. 만동자에게는 "열반과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수행상의 이유가 제시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에 대해 무지함으로"(잡아함 권34) 그런 희론과 집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초승한 이유는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발견 된다. 앞서 무아설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연기한 것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입장이다. 그와 같이 단(斷)과 상(常)(잡아함 권12), 일(一)과 이(異)(잡아함 권12), 자작(自作)과 타작(他作)(잡아함 권13),등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인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음은 그러한 문제에 올바른 답변을 한다면,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십이연기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행과 열반
해(解)와 행(行)
우주의 근본 원리 또는 생사와 같은 문제를 해명해주는 것을 종교사상이라고 부르고, 그에 입각한 실천행동을 종교행동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각각 해(解: 이론)와 행(行: 실천)이라고 한다. 종교행동은 종교사상에 의해서 행해지므로 전자의 목표와 방법은 후자의 가치 내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 된다. 불교에서 종교사상에 해당되는 것은 앞장에서 살펴본 연기론(緣起論)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연기론은 인간에게 생사의 괴로움이 있게 된 근본 원인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종교사상이 이렇게 연기론 이라면, 그의 실천적 교설이 어떤 목표를 향해 어떤 방법을 채택할 것인가는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불교의 연기론에 의하면 인간의 생사 괴로움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자기 마음속의 무명에서 발생한 것임으로 무지의 타파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의 실천행동의 목표는 무명을 타파한 세계 즉 열반에 있고, 그 방법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명 번뇌를 멸하는 자력적(自力的)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연기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이러한 실천행동은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 실천행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유신론적 종교의 실천행동에서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기도, 제사 등이 주축이 되고 신의 구제를 통해서 만이 비로소 종교적 목적이 달성 된다. 그러나 불교의 자력적 수행에는 염불, 발원, 선정 등이 중심이 되고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러 그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해(解)에 못지않게 행(行)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 된다.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와는 달리, 자신의 노력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를 구제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행이 없는 해는 한낱 희론에 불과하다고 경계 됨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이론(解)에 해당되는 교설을 베푸실 때마다 그에 상응한 실천(行)을 반드시 함께 설해주고 계신다. 그리하여 불교의 초기경전에는 사념처(四念處), 사정란(四正斷),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이상 三十七助道品) 등을 포함한 실천적 교설이 무수하게 설해져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십업설(十業說)과 사제설(四諦說)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십업설은 세속적인 사회윤리에 관한 대표적인 교설이며, 사제설은 생사괴로움의 근본적 멸진에 향하는 대표적 수행의 길이기 때문이다.

십업설
업설의 내용
앞서 불교의 연기사상을 소개하는 곳에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작용, 반응이라는 인과관계가 성립함을 보았듯이 불교의 십업설은 바로 이러한 인과율에 입각한 실천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업(業, karma)이라는 술어는 `작위(作爲)`나 `일`을 나타내고, 보(報, vipaka)는 `이숙(異熟)`이라고도 번역되고 있듯이 `성숙함`을 나타낸다. 이 두 낱말은 불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 계파에서도 중요한 교리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그 두 술어를 특히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그에 대한 객체의 필연적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 채택하셨다. 업과 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 또한 동일성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즉 업인이 선(善)이면 과보도 선(善), 악(惡)이면 과보도 악(惡)의 성질을 띠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선업(善業)에는 즐거운 보(善報)가 따르고, 악업(惡業)에는 괴로운 보(惡報)가 따른다."고 설 한다. 어떤 경우에는 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흑업(黑業)에는 흑보(黑報)가, 백업(白業)에는 백보(白報)가, 흑백업(黑白業)에는 흑백보(黑白報)가 따르고, 불흑불백업(不黑不白業)에는 보(報)가 없다. "(중아함 권27 達梵行經) 불흑불백의 업이란 작용된 것이 아니므로 보가 없다고 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만을 업으로보고 있으므로 "의지가 작용되지 않는 업은 보를 받지 않는 것이다. "(중아함 권3 思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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