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통도사에서 사미계
1969년 통도사에서 구족계
1971년 통도사 강원 강주
1980년 중앙승가대 강사,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
1985년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
前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現 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
회수 : 52회      
제목 : 종범스님-깨달음의 행복 법회일자 : 2003-11-24
  요즈음 깨달음이 무엇이며 우리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삶의 근본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가에 대하여 학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또 일상생활 에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깨달음이란 순수한 우리말로 경전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그것이다.
깨달음 하면 깨친다는 뜻인데, ‘한글을 깨친다’ 라든지 ‘선생님의 말씀을 깨달았다’ 등의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것은 알았다는 뜻이 된다. 결국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한 소식 했다’라고도 하는데, 모르던 세계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을 해내었다라는 말이다.
또 깨달음을 ‘지견이 났다’라고도 표현한다. 지견이라고 하면 마하반야바라밀 즉 지혜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이 되면 알고 보는 문제가 달라진다.
부처님이 알고 보고있는 세계가 있고, 아라한이 알고 보는 세계가 있으며, 보살이 알고 보는 세계가 있고, 중생이 알고 보는 세계가 있다. 어떠한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견이다.
중생이 알고 보는 세계인 중생지견에서 살다가 부처님이 알고 보는 세계를 보게 되면 이것을 ‘불지견이 났다’ 또는 ‘깨쳤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중생은 기억이나 감각, 보이는것 등 형상의 세상에서 살고있다. 불교에서는 상이라고 말하는데, 상이란 모든 사물 즉 존재양상을 말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양상 즉 형상과 동작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나서 봐온 것은 모든 것이 항상함이 없는 형상과 동작만을 느껴왔다.
그러다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상과 성을 설명하자면, 얼음으로 조각된 상만 보다가 어느날 물을 보게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얼음은 상이지만 얼음의 실상인 성은 물인것이다.
사물을 볼 때 본성을 보느냐 형상을 보느냐가 중요한 차이점이다. 법화경에서는 취상범부 (取相凡夫)라 하여 상을 취하면 범부라 하였고, 금강경에서는 이일체상 즉명제불(離一切相 卽名諸佛) 이라하여 상을 여의면 부처라 하였다.
상을 여의는 것은 상 속에서 상에 매이지 않는 것이므로 모든 고통은 상에 매이기 때문에 생긴다. 집착함, 혐오함 등 모든 것은 상에 매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매이지 아니하면 해탈이고 자유이지만 매이면 애착과 공포가 생기므로 이것을 고해라고 하는 것이다.
형상과 동작을 따라다니면 매일 수 밖에 없으며, 근본 실상을 볼 때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을 해탈이라 하는 것이다.
사물을 보되 본성을 보느냐 상을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깨달음의 방법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방법은 없다. 깨달음은 형상의 세계가 아니라 지혜의 세계이기 때문에 방법이라는 형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를 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만 지혜를 열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형상의 세계에 살고있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것이 좋은지, 염불을 해야 좋은지 하는 등의 방법만을 찾으려 하는데, 이 역시 형상이므로 형상에 매이어서는 불가능 하다. 구지 방법이라면 형상에 매이는 습관을 줄여가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형상의 본성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임을 줄여가는 것을 업장소멸(業障消滅)이라고도 하는데, 업이란 형상에 매어서 사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형상과 동작에 매어 근심과 고통이 생겨 고해가 되므로 고통의 원인은 형상인 것이다.
형상에서 형상의 본 모습인 진성을 알고 그 실상과 합쳐질 때 형상에 매어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이다. 복을 닦는다든지 선을 행한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형상에 매이는 것이 악이고, 형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선이다.
형상에 매인 사람은 자신 혼자만을 위한 행동을 하게 되지만 상에 매이지 않은 사람은 나와 나 이외의 사람 모두가 좋아지기 위한 선의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권력이나 재산을 물려준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물려주셨다. 권력이나 재산은 모두 형상이므로 무상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을 주게되기 때문이다.
보시, 선정, 지혜, 바라밀 등을 닦는 것이 바로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공덕행이다. 이러한 공덕행을 끊임없이 행한다면 형상에 매이는 행위를 서서히 조복받게 되는 것이다.
조복이라 하면 먼저 몸에 대한 조복(신업,身業)으로 음식에 대한 조복, 수면에 대한 조복 을 들 수 있다. 천천히 알맞게 먹고, 제시간에 알맞게 자는 것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언어의 조복(구업,口業)으로 언어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조절하는 것이다. 할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는 것이다.
또 행동의 조복으로 해야 할 행동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다음으로 생각에 대한 조복(의업,意業)인데, 쓸데없이 미워한다거나, 괴로워 한다거나 하는 번뇌망상, 잡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공덕행을 행하고, 조복을 하게되면 보게 되는데 이것을 견성이라 한다. 견성을 하게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하는 것이 또 중요하다.
견성에 대하여 설명한 말이 많이 있는데, 그중 강원에서 공부하는 책 중 서장(書狀)이라는 책에 어느분이 큰스님을 뵙고 깨달음을 얻은 뒤의 감정변화를 편지로 써서 큰스님께 보낸 편지에 ‘깨닫고 집으로 돌아온 후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아들을 안고 손자를 희롱하고 하나하나가 예전과 꼭 같았다. 그러나 얽히고 매이는 감정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신비롭다던지 별천지 같은 생각은 없다.’라고 씌어있다.
이것이 깨달음의 행복이다. 얽히고 매이지 않기 때문에 상으로부터 자유롭고, 지난 날로부터 자유롭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또 법화경 신해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어느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어릴적에 집을 나가 노숙생활을 하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지나던 중에 집에서 걸식을 하려하였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반가워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지만 아들은 겁이나고 놀라서 기절을 하였다. 아버지는 다시 생각하여 아들을 놓아주게하고, 아들과 행색이 비슷한 사람을 보내어 품삯을 많이 주겠다고 하여 데리고 와서 일을 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과 행색을 비슷하게 하고 찾아가 품삯을 많이 줄 테니 다른곳으로 가지 말고 오래 머물도록 일렀다.
그러던 어느날 사람들을 모아두고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밝히고 가업을 전수하게 된다.
여기에서 수행과 자비, 그리고 깨달음등 많은 부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본래는 부자이었지만 떠돌이 생활로 그것을 망각하고 아버지에게서 고용된 일꾼이 되었지만, 본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근본이 부자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근본을 알고 나서는 그 집의 재산이 일을 하고 품삯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가 관리하고 보호해야할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세계 역시 내가 이익을 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잘 보살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깨닫기 전에 사람의 몸으로 살았는데, 깨닫고 난 후에는 법의 몸으로 살았다. 사람의 몸은 부모가 물려줌으로 생겨나지만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늙고, 죽음이 있다. 그렇지만 법의 몸은 누가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침으로써 받게 되는 것이다.
깨친 생명은 난 생명의 오고 감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이를 해탈이라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모두 함께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생활의 습관을 가지는 것이 공덕을 짓는 것이고 보시하는 것이며 복을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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