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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보는 범속(凡俗)한 인간상은 욕구형(欲求形)이라 할 수 있다. 사생육도가 모두 범속한 세상이며, 욕구형 인간상이란 삶의 목적이 욕구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 목적이 없다. ‘살고 싶다.’ ‘가지고 싶다.’ ‘먹고 싶다.’등 이러한 것이 모두 욕구이며, 인간세상은 대부분 욕구형 인간상으로 살고있다. 욕구형 인간상으로 살다가도 어떠한 중요한 기회가 와서 채워질 수 없는 욕구형의 한계를 느끼게 되면, 다른 형으로의 바뀜이 오게 되는데, 이 때에는 욕구를 충족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절제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이를 조복형(調伏形), 또는 구도형(求道形)이라 한다. 이러한 형은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고, 다스려 나가는 것이다. 경을 읽는 다던지, 참선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욕구를 통제하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불행 이라던지 고통 또한 타인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구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를 잘 다스릴 수 있게되면 도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를 닦는 다는 것은 자신의 욕구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욕구를 잘 조복을 하면, 지혜가 생기며 그 지혜로 다른 이들을 위해서 자비(慈悲)로 살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을 비원형(悲願形)이라 한다. 자비와 서원으로 살아가시는 불보살님들이 비원형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이다. 욕구의 조복을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라 하는데, 나무 아래에서 마구니를 항복시켰다는 말로, 마구니란 나에게 고통을 주는 세력 즉 나 자신의 욕구를 항복시켰다는 말로 곧 성불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수하항마상 다음은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이라 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설법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편안함을 주기 위하여 녹야원으로 가셔서 설법을 하신 것을 말하는데, 이를 자비 원력의 행동이라 하여 비원형이라 하는 것이다. 자비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욕구를 조복한 부처님께서 그렇지 못한 중생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를 응화형(應化形)이라 한다. 같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동화(同化)라 하고, 응화(應化)란 한쪽을 변화시켜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같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인간상을 이상적인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욕구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욕구형이지만, 한단계 더 나아가 욕구를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게 되면 조복형이 되고, 그 도에서 스스로에 머물지 않고 중생을 만나서 변화시켜 같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응화형으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다. 이러한 뜻을 전하는 설화가 많이 있는데, 그 중 달달박박과 노힐부득의 설화에서 보면, 달달박박과 노힐부득은 신라의 사람으로 세속(욕구형인간)에서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마음을 일으켜 같이 도를 닦기로 마음을 먹었다. 둘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도를 닦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밤 젊고 어여쁜 여인이 달달박박스님을 찾아와 밤이 깊고, 산길이 험하니 하루밤 재워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달달박박스님은 청정성을 지키기 위하여 허락을 하지 않고 내보내었다. 그 여인은 다시 노힐부득스님을 찾아가 같이 청하였다. 노힐부득스님은 여인을 받아들여 방으로 모시고, 자신은 부엌에서 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 여인은 산통을 느끼니 물을 데워줄 것을 청하였다. 스님은 물을 데워주었고, 여인은 목욕을 하였다. 목욕을 마친 여인이 스님에게 그 물에 목욕을 하라고 하여, 스님은 여인이 목욕을 했던 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그런데 그 물에 목욕을 하자 몸이 모두 황금색으로 변하였고, 여인은 자신이 보현보살이며, 스님의 성불을 돕기 위해서 왔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다음날 달달박박스님이 찾아와 간밤의 일을 듣고 자신도 성불을 위해 남은 물에 목욕을 하였지만, 물이 모자라 알록달록하게 황금색이 되었다한다. 노힐부득스님은 자기 청정성과 다른 이에게 도움도 준 응화형 인간으로 완전한 부처님이 되었지만, 달달박박은 자기 청정성에 머물러 구도형 인간으로 반부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보현보살님은 스님들에게 성불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비원형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자기에게도 기쁨을 주고, 이익을 주면서도 자신도 이로우며, 다른이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었을 때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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