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 조사국장 역임
1988년 조계종 9,10,11,12대 중앙종회 의원 역임
1994년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조계종 개혁회의 상임의원, 11대 중앙종회 총무분과위원장
1998년 불교텔레비젼 대표 사장 및 불교방송 이사 역임
일산 포교당 여래사 주지 역임
통도사 서울포교당 구룡사 주지 역음
현재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회수 : 263회      
제목 : 정우스님-밝음과 어두움 법회일자 : 2007-06-10
  이달의 법문

수행·정진·기도로써 본래 성품을 찾자

정우스님 / 본지 발행인·구룡사 회주


이번 시간에는 「밝음과 어둠」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밝음은 지혜(智慧)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덕목입니다. 반대로 어둠은 무명(無明)이요, 무명은 곧 번뇌(煩惱)이며, 번뇌는 중생심(衆生心)입니다. 밝음과 어둠의 그 현격한 차이는 어떻게 생기는 것이고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겠습니까?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불자들아, 마치 밝은 등불을 어떤 사람이 가리었을 적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등불이 꺼졌다고 생각하거니와 등불은 실로 꺼진 것이 아니며 알지 못하여서 꺼졌다고 생각 하듯이 성문(聲聞)제자들도 그와 같아서 비록 혜안(慧眼)이 있으면서도 번뇌가 덮이어서 마음이 뒤바뀌었음으로 참 몸을 보지 못하고 멸도(滅道)하였다는 생각을 내거니와 나는 끝까지 멸도한 것이 아니니라. 불자들아, 배냇소경은 해와 달을 보지 못하였으며 해와 달을 보지 못하므로 낮과 밤이 밝고 어두운 줄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하여 해와 달이 없다고 말하나니, 해와 달은 진실로 있건만 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며 보지 못하는 탓으로 잘못된 생각을 내어 해와 달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불자들아, 성문 제자들도 그와 같아서 소경과 같이 여래를 보지 못하므로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거니와 부처님은 실로 열반에 들지 아니하였으며 잘못된 생각으로 이런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열반경의 이 말씀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지금처럼 보안등이나 가로등이 없던 시절의 먼 옛날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미로처럼 생긴 길을 나서면서 가족들에게 등불을 하나 밝혀 달라고 했습니다. 그 장님은 등불을 볼 수는 없지만 그 등불을 들고 감으로써 상대방이 그 불빛을 보고 부딪치지 말라는 뜻에서 그렇게 했는데 그것도 헛수고가 되어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하고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장님이 부딪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보지를 못해서 상대방을 위해 이렇게 등불을 들고 가는데도 부딪친 걸 보니 당신도 장님인가 봅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대답했습니다.
“불이 꺼져 있습니다.”
…….
일반론적으로 사람들은 대낮에 길을 걸어 다닐 때 눈이 먼 장애인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우월주의에 사로잡혀있게 마련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경은 대낮이나 칠흑 같은 밤이나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야밤에 길을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소경은 밤이든 낮이든 똑같이 어두움에 적응이 되어있기 때문에 평상시대로 갈 수가 있지만 우리들은 불빛이 없다면 거기에 적응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더 해매이게 마련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한 가지가 낫다고 해서 영원히, 그리고 모든 면에서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앞에서 들려드린 열반경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우리들의 마음자리는 본래가 부처님의 마음자리처럼 청정무구한데, 그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본래 청정무구한 마음자리를 갖추는 공부의 수행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자리는 어떻게 찾아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조각가가 큰 돌을 가지고 조각을 하는 모습을 보고 무엇을 만드는지 궁금해져서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 알 수가 없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조각가가 하는 말이 “예, 이 큰 돌덩어리에는 이미 내가 마음먹은 석상이 갖춰져 있는데 다만 불필요한 것들이 거기 붙어 있어서 그것을 털어내고 있을 뿐입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조각가의 이 대답이 바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본질입니다.
우리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면 다 갖춰져 있는데 무명이라고 하는 번뇌에 덮여있어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상지상(無相之相)이 실상(實相)이요, 무심지심(無心之心)이 진심(眞心)이며, 무념지념(無念之念)이 정념(正念)이요, 무각지각(無覺之覺)이 정각(正覺)입니다. 즉 모양 없는 모양이 실다운 모양이요, 마음 없는 마음이 참다운 마음이며, 생각 없는 생각이 올바른 생각이요, 깨달음 없는 깨달음이 참 깨달음인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 없는 마음이 참 마음이라는 것은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시비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반증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나, 항상 된 나, 즐거운 나, 참 나, 깨끗한 나는 번뇌라고 하는 전도된 무명에 의해 덮여있어서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지 항상 내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 서양사람 중에서 좋아하는 이가 몇 분 있는데, 그 중 《부러진 날개》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이라는 철학자이자 시인이 있습니다. 그 분의 글을 읽다보면, 기독교신자인 그가 어쩌면 그렇게도 법구경이나 아함경 등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을 쉽고 가슴에 와 닿게 표현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곤 합니다. 그 분의 글 중에 「영혼이 알고 있는 것을 우리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영성체요, 혼백이요, 넋이라고 표현하는 영혼은 곧 자아요, 마음이라는 불교 용어를 차용하여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생각 많이 해봤을 것입니다. 육감이라고도 표현하고 초심이라고 쓰기도 하는 “처음 생각 했던 게 옳았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욕심과 어리석음이라는 조미료를 첨가함으로써 본래의 맛을 잃어버렸다는 비유입니다. 음식 잘 하는 분은 음식으로 음식 맛을 내지, 절대 양념을 많이 넣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이 알고 있는 것을 번뇌로 인해, 망상으로 인해, 무명으로 인해, 의심으로 인해, 분별심으로 인해, 시비심으로 인해 그것들을 하나로 범벅하여 본래의 모습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전도몽상이 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각가가 불필요한 것들이 거기 붙어 있어서 그것을 털어내고 있다고 했듯이, 이미 거기에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는 실상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실상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요, 존재입니다. 그 것을 알 때 스스로가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 하나하나가 다 귀한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문득,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큰집에 살든 작은 집에 살든, 큰 곳에 살든 작은 곳에 살든, 큰 도시에 살든 작은 도시에 살든 그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다시 생각을 했습니다.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한 삶이 늘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한 삶을 사람이요, 진정으로 삶의 현장에서 어울림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것을 다시 열반경(涅槃經)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빌려 설명하자면, 『불자들아, 안개와 구름이 해와 달을 가리었을 적에 어리석은 사람은 해와 달이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해와 달은 실로 있는 것을 구름이 가리었으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니라. 성문 제자도 그와 같아서 번뇌가 지혜를 덮었으므로 여래를 보지 못하고,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니, 불자들아, 이는 부처님이 젖먹이 아기의 행을 나타내는 것일지언정, 멸도한 것이 아니니라.』 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중국의 법화사상(法華思想)의 대가였고 천태종을 창종한 천태지의선사(天台智?禪師)가 친견하고 싶어서 천일기도를 했는데도 결국 접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귀중한 경전인 능엄경(楞嚴經)을 빌려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지금이 여름입니까? 겨울입니까? 덥고 땀나는 여름입니다. 덥고 땀이 나기 때문에 우리들은 시원한 곳을 찾게 되고 냉풍기를 틀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법당에 있는 냉풍기를 틀어 놓으면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매우 시끄럽습니다. 그다지 덥지 않을 때 냉풍기를 틀어 놓으면 냉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소음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시원함보다는 소음에 더 신경이 쓰여서 끄게 됩니다. 그러나 등에서 땀이 날 정도로 날씨가 덥다면 어떻겠습니까? 냉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냉풍기에서 바람이 나와야 우리 몸이 시원해지기 때문입니다. 더운 것 보다는 시끄러운 소리를 감당하는 게 더 낫다고 내면의 인식기관에서 조율을 하기 때문입니다. 심산유곡에서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는 자연의 소리라며 좋게 듣는데, 봉천동 고갯길이나 미아리 고갯길에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는 공해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능엄경의 부처님 말씀을 하나 더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의 몸은 색신(色身)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몸은 법신(法身)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법신은 본질(本質)이고 색신은 형상(形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무엇이 다릅니까?
…….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능엄경에서는 법신의 그림자가 육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도자기그릇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그릇을 토기로 보지 말고 백금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백금으로 그릇을 만들었다면 그 자체는 금이고 그릇은 모양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떠나서 그림자가 있을 수 없듯이 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해보십시오. 그림자가 나타나려면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 빛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드리워졌을 때 영원하지 않은 것도 볼 수가 있고, 시간이라고 하는 그 속에도 공유되어지는 타이트한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육신은 법신의 모양이요, 법신은 육신의 본질이며, 무명과 번뇌와 지혜와 수행의 덕목이 서로 떠나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흙과 금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 수 있지만 흙을 떠나서 모양이 나올 수 없고 금을 떠나서 모양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내 본질은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무명업식에 따라 육도를 윤회하는 과정 속에서 수 없는 몸을 나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인데도 복 있는 이도 있고 복 없는 이도 있고 세상살이가 순탄한 이도 있고 장애가 많은 이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사람들의 삶을 유추해서 장애가 많은 이를 들여다보면 그는 복이 없습니다. 또 복이 없는 사람을 들여다보면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을 들여다보면 욕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꼭 장애가 생길 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함수 관계를 가지고 서로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복이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복을 짓습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무명이라는 어두움과 밝음이라는 지혜의 관계 속에 번뇌라는 장애가 가리어져 있어서 그것을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고 들어내지 못할 뿐이며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수행과 정진과 기도를 통해서 본래 부처님의 성품을 찾아내도록 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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