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번지

신라 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이름을 죽림사(竹林寺)라 하였다.
그 후 흥덕왕 4년(829) 인도스님 황면선사(黃面禪師)가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지니고 동방의 수려한 강산을 찾던 중 이곳 재약산의 오색서운(五色瑞雲)을 보고 삼층석탑을 세워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당시 흥덕왕의 세째 왕자가 풍병으로 고생하며 영산약수(靈山藥水)를 두루 찾아 다니던 중에 이곳 죽림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약수를 마시어 병이 완쾌되니, 흥덕왕이 크게 감격 하여 사세(事勢)를 확장하고 절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라 하였다.

그후 고려시대에는 일연선사(一然禪師)가 한때 이곳에 머물면서 저 유명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여기서 탈고하였다고 한다. 그 때 충렬왕이 이곳에 찾아와서 보시고, 과연 천하명산이라 감탄하고 이곳을 일 국지 명산이요, 동방제일의 선찰이라 불렸다한다.

그간 신라와 고려에 걸쳐 보우국사, 일연선사, 천희국사 등 많은 고승들이 머물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년의 고찰이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여 절은 없어지고 스님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당시 이 절에 기거하던 주지 쌍운(雙運)은 태백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영정 사사적(靈井寺事蹟)이란 책을 보관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오늘날 표충사(옛 영정사)에 대한 창건과 연혁을 살필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표충사는 임진왜란 당시에 승려로서 구국일선에 앞장 서서 바람 앞의 등잔(燈盞)불 같은 조국을 구하신 사명대사의 유적지로서,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임진왜란때의 의승 대장인 서산, 사명, 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을 사찰안에 둠으로써 사명(寺名)이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수 : 10회      
제목 : 표충사 법회일자 : 2006-11-22
  표충사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번지

신라 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이름을 죽림사(竹林寺)라 하였다.
그 후 흥덕왕 4년(829) 인도스님 황면선사(黃面禪師)가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지니고 동방의 수려한 강산을 찾던 중 이곳 재약산의 오색서운(五色瑞雲)을 보고 삼층석탑을 세워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당시 흥덕왕의 세째 왕자가 풍병으로 고생하며 영산약수(靈山藥水)를 두루 찾아 다니던 중에 이곳 죽림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약수를 마시어 병이 완쾌되니, 흥덕왕이 크게 감격 하여 사세(事勢)를 확장하고 절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라 하였다.

그후 고려시대에는 일연선사(一然禪師)가 한때 이곳에 머물면서 저 유명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여기서 탈고하였다고 한다. 그 때 충렬왕이 이곳에 찾아와서 보시고, 과연 천하명산이라 감탄하고 이곳을 일 국지 명산이요, 동방제일의 선찰이라 불렸다한다.

그간 신라와 고려에 걸쳐 보우국사, 일연선사, 천희국사 등 많은 고승들이 머물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년의 고찰이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여 절은 없어지고 스님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당시 이 절에 기거하던 주지 쌍운(雙運)은 태백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영정 사사적(靈井寺事蹟)이란 책을 보관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오늘날 표충사(옛 영정사)에 대한 창건과 연혁을 살필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표충사는 임진왜란 당시에 승려로서 구국일선에 앞장 서서 바람 앞의 등잔(燈盞)불 같은 조국을 구하신 사명대사의 유적지로서,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임진왜란때의 의승 대장인 서산, 사명, 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을 사찰안에 둠으로써 사명(寺名)이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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