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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통도사에서 사미계 1969년 통도사에서 구족계 1971년 통도사 강원 강주 1980년 중앙승가대 강사,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 1985년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 前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現 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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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수 : |
19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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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
종범스님 - 배움이란 |
법회일자 : |
2006-0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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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에서의 배움과 세속에서의 배움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세속에서 배우는 것을 흔히 속학(俗學)이라 하고 불가에서는 배우는 것을 불학(佛學)이라 한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온 것은 배움을 통한 것이었다. 논어의 주자주에서는 배움을 본받음이라고 하였다. 선생님으로부터,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본받는 것이 배움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번 본받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서 익혀야 한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학습이라 한다. 익히는 것을 주자주(朱子註)에서는 ‘조삭비왈습(鳥數飛曰習)’이라 하였다. 새가 처음부터 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날으는 연습을 계속하여서 결국 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거의가 학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글자나 음식, 예절 등 학습을 통하지 않고 되는 것은 없다. 일반적인 세속적학습의 목적은 생존이다. 살아 남기 위해서 배우고, 죽은 후에도 나를 이어가기를 바란다. 상속을 통해서 죽은 후에도 살아 남기를 바란다. 자기와 생각이 같은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상속을 하는 것이 바로 살아 남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전통은 현재에 살아남은 과거이다. 상속이라는 것은 현재의 것이 미래에도 계속 살아 남아있게 하기 위함이다. 결국 속학의 기본은 생존이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 재물, 권력, 명성이 그것이다. 속학은 언제나 재물과 권력과 명성을 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욕심이 있기 때문에 탐진치(貪嗔癡)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욕심과 분노는 같은 것이다. 욕심 없는 분노가 없고 분노 없는 욕심은 없다. 탐욕과 분노는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욕심을 낼 때 그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 수가 없다. 어리석음이 탐욕과 분노의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탐진치라는 탐욕과 분노와 무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것이 속학이 가는 길이다. 속학은 생존을 목적으로 하고 생존을 위해서 재물, 권력, 명성이 필요하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탐욕과 분노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 자체를 반성하고 그것 자체를 극복할 지혜는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재권명(財權名) 탐진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불학은 어떨까. 불학은 생존이 아닌 성도에 목적이 있다. 그래서 목숨을 바쳐서 불도를 이룰 수 있다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불학의 전통이다. 그것을 위법망구(爲法忘軀)라 한다. 법을 위해서 몸을 버린다는 뜻이다. 불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교학과 불도학이 있는데, 줄여서 교학(敎學)과 도학(道學)이라 한다.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 ‘위학자(爲學者) 위도자(爲道者)’라는 표현을 쓰셨다. 배움을 위하는 사람, 도를 위하는 사람을 말한다. 배움을 위한다는 것은 불교를 배운다는 것으로 교학을 일컫는 것이고, 도를 위한다는 것은 성도하기 위한 불도학을 일컫는 것이다. 교학이라는 것은 첫째로 변탐삼장지지(辨探三藏)라 하였다. 경율론삼장을 거의 다 섭렵해서 그 뜻을 탐구하는것이라 하였다. 삼장의 뜻을 탐구하지 않고서는 불교학이라 할 수 없다. 도학은 수환일심지원(遂還一心之原)이라 하였다. 일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학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 불학이다. 불학은 불교학을 하든 불도학을 하든 도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므로 도를 어떻게 이루어가는가가 중요하다. 요즘은 불교학에도 많은 변화가 와서 좀 혼란스럽다. 제목은 불교인데 내용은 속학으로 변질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깨달은 지혜를 이야기 하면 불학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주장을 이야기 하면 그것은 속학이다. 일반역사학, 일반문헌학, 일반해석학, 일반논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불교학이 있는데 이러한 것을 본인은 ‘세속불교학’이라 나름대로 이름하고, 원효나 의상, 서산스님 등의 불교학은 ‘승가불교학’이라 이름하였다. 세속불교학으로는 승가불교정신을 키울 수 없다. 승가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승가불교학이 되어야 한다. 서점에 많은 불교서적들이 진열되어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거의가 세속불교학이다. 원효스님의 불교학이 바로 승가불교학이다. 경율론삼장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학이다. 불도학 즉 도학은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심으로 돌아가 도를 이루는 것을 성도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성도과정을 여덟 단계로 도를 이루었다 하여 팔상성도라 하였다. 첫째는 불교를 이해를 하는 교학으로 시작하여 불교 가르침의 정신을 깨달아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재권명을 구하던 탐진치의 의식구조가 자비, 지혜, 원력의 의식구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를 이루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전이나 논서등의 저술을 통해서 이해를 하고, 체험이라는 심적 변화를 겪어야 한다. 속인이 도인으로 변하는 것이다. 의식구조가 탐진치에서 지비원(慈悲願)으로 바뀌면 도인이 되는 것이다. 정신을 바꾸는 것이 불학의 목적이다. 자비의 이격이 되고, 지혜의 인격이 되고, 원력의 인격이 되어서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중생계에 자신이 받았던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은이라고도 하고 회향이라고도 하는데, 학습, 발심, 공덕, 회향 이 전체가 불학이다. 서산스님께서는 어려서 서울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시고 과거를 보았는데 과거에서 낙방을 하였었다. 재능으로는 충분하였지만 배경등 학문이외의 것으로 밀려난 것이었다. 그것이 몹시 받아들이기 힘들고 견디기 힘이 들어서 침울하게 지냈었다고 하셨다. 그러던 중 같이 공부했던 학동들이 남방의 명산을 다녀오자고 하여 나서게 되었다. 여러 곳을 다니던 중 지리산의 어느 절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절의 숭인(嵩仁)이라는 노스님께서 서산스님을 보시고는 “그대의 용모를 보니 기골에 도풍이 완연하니 도를 닦으면 큰 도인이 될 수 있겠다. 서생업(書生業)은 백년을 해도 헛된 이름일 뿐이다. 불가에는 오묘한 공부가 있으니 한번 해보아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서산스님은 불교의 공부가 무엇인가를 여쭈었다. 그러자 숭인스님은 “마음을 비워서 합격하는 공부 즉, 심공급제귀(心空及第歸)니라.”고 하였다. 불교의 공부는 여러 경전을 학습해서 많이 기억해도 마음을 비우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불학격인 것이다. 요즘 불교학 하는 사람들이 책만 지어내면 불교학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음을 비우는 관문으로는 전혀 접근하지 못하므로 세속불교학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서산스님은 다시 심공급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숭인스님께서는 한참을 쳐다보다가 눈만 껌벅거리고는 “알겠느냐?”라고 물었다. 서산스님이 “모르겠습니다.”하자 다시 숭인스님은 “말로하기는 어려우니라.” 하였다. 이렇듯 말로는 할 수 없는 오묘한 뜻 ‘현지(玄志)’를 전할 때 불가에서는 그것을 순묵(瞬目)하는 것으로 표현하곤 한다. 형상으로는 표현되지 않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숭인스님께서는 서산스님에게 전등록, 선문염송, 화엄경, 금강경, 능엄경, 법화경, 유마경등 수십권의 경론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경을 영관(靈觀)스님에게서 3년간을 배웠다. 이 영관스님께서는 교학과 도학을 모두 이루어내신 스님이었다. 그러나 서산스님은 확실히 알지 못하겠다는 느낌으로 답답함을 느껴 우울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갑자기 한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후 점점 마음이 열리고 이론으로 배웠던 불교가 지혜로 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큰 도인이 되었고 어마어마한 회향을 하셨다. 공부를 다하고 돌아보면 처음 불교가 무엇인지 모를 때 숭인스님과 마주하여 “서생업(書生業)은 백년을 해도 헛된 이름일 뿐이고 불교에는 마음을 비워서 합격하는 공부가 있으니 해보겠느냐?”하고, 서산스님은 “그것이 무엇입니까?”하니 눈만 껌벅거리고는 “알겠느냐?” 이에 서산스님은 “모르겠습니다.”하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보니까 처음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봄을 찾으러 온 산천을 헤매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집 마당에 풀이 파릇파릇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봄이 여기에 있었구나”하고 깨닫는 것과 같다. 한 풀이 처음으로 날 때 온 대지가 봄이더라. ‘일엽낙시 천하추(一葉落時 天下秋)’ 한 잎이 떨어질 때 천하가 가을이다. 풀잎 하나로 봄을 설명하고, 낙엽하나로 가을을 설명하듯 얼굴을 마주보고 눈을 껌벅거림으로 통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불학이다. 서산스님도 교를 공부하고 교에 머물지 않고 지혜의 세계인 도의 세계에 들어가신 것이다. 사교입선(捨敎入禪) 즉 교를 버리고 선으로 들어갔다, 교를 통해서 지혜를 깨닫는 것이다. 또 유교입선(由敎入禪)이라는 말도 있는데, 교를 말미암아서 선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도의 세계에 들어가면 어느것이 도고 도가 아닌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도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수행이다. 같은 행위라도 생존을 위한 행위이냐 성도를 위한 행위이냐에 따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자신만이 알고 염라대왕만이 안다. 성도를 하는 일반적인 과정에는 첫째 선행성도(善行成道) 즉,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조복수행(調伏修行)이 있는데, 분노를 참는 것이다. 어려움이 닥치고 누가 미워도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이다. 자업자득을 믿고 인과를 믿으면 원망은 하지 않는다. 셋째는 무념수행(無念修行)으로 탐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살피고 하되 탐심을 일으키지 않는 청정심을 가지는 것이다. 넷째는 회향수행(回向修行)이다. 좋은 일은 회향하여야 한다. 누구나 회향을 하게끔 되어있는데 회향을 할 때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욕심을 가지고 있다가 죽게되면 뒷사람들이 싸움을 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하면 불도를 이루는 것이고 불학이다. 살아 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 남는 것 만으로 만족하기에는 허무하다. 그래서 그것에서는 고통이 따르고 윤회가 반복된다. 생존의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것이 불학이다. 생존학을 유위학(有謂學), 불학을 무위학(無謂學) 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유위는 인위적인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생각이다. 무위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없는 자연스럽고 본래적인 것이다. 도의 세계에 들어가면 배고플 때 밥 먹고, 목 마를 때 물 마시고, 졸릴 때 잠자는 것은 똑같다. 이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미워하고, 쓸데없이 복수하려 하는 것들이 인위적인 것이다. 이러한 인위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위법이다. 우리가 받는 고통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거의가 인위적으로 스스로 만들어서 받는 고통들이다. 이러한 고통을 불학을 통해서 정화할 수 있다. 불학을 하려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경전을 많이 읽고,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고 하면 불학을 이루어서 불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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