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간까지 보리심을 잊지 않도록 하소서.” 일순간 법회장에는 정적이 흘렀고 곳곳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이내 눈물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영문을 모르던 외국인들도 곧 눈물을 훔쳤고 심지어 엉엉 소리를 내어 우는 이들도 있었다.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8)께서도 법의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각국의 통역들이 말을 잇지 못하자 달라이라마는 결국 특유의 웃음으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먹함의 여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법회 중에 달라이라마 스스로 죽음을 상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대의 한 성인을 향해 거론키 어려운 단어일뿐더러, 누구도(아마도 중국 정부를 제외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인 이유다. 티베트의 현실 그리고 53년 난민으로서의 삶에 이어 여전히 불투명한 그들의 미래가 한 노장의 목을 메이게 한 것이다. 난민의 현실은 고독하다. 이방인의 삶, 나라와 자유를 인정받지 못하는 티베트인들이 기대고 있는 달라이라마라고 하는 존재가 너무나 거대해서 그의 죽음에 관해 떠올리는 순간, 지구는 마치 그 자전을 멈추고 더 이상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것 같기만 하다. 달라이라마의 한국인법회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축하 잔치는 열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다람살라까지의 여정은 말 그대로 순례길이다. 순례는 나를 버리고 또한 나를 찾는 길. 달라이라마는 “무아의 체득을 통해 자성의 본질을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달라이라마 법문의 주제는 <중론>의 24품으로, 사성제를 관하였다. <다음은 법문의 요지> 21세기 불교도들에게 당부하는 바 신앙의 유무를 떠나 60억 지구인의 마음 상태를 논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먼저 마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것이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도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아십시오. 일반 학교 교육에 있어서 육체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한계성을 배웠듯이 마음 역시 세부적인 분석과 학습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세속의 삶속에서 마음이 어떠한 상태가 됐을 때 행복이 완성될 수 있는지 의식과 생각 그리고 분별을 통해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지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에서 구현되는 모든 현상을 증명할 수 없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에 대한 학습을 통해 훈련이 병행되도록 하십시오. 내가 살고 있는 이 생을 창조한 분이 있을까요? 창조주를 인정하고 안하고 간에 공통으로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면 자아에 대한 집착심입니다. 이러한 마음들이 다양한 탐심과 진심으로 발생됩니다. 나만이 중심이며 최고라는 집착이 문제를 야기시키는 원인입니다. 창조주에 대한 인식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나는 극대화된 아집을 형성시키는데 제한을 두게 됩니다. 때문에 모든 종교에서는 ‘나’라고 하는 견고한 아견이 모든 문제의 발생점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다만 그 아견을 없애는 방법들이 다양합니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불교의 연기법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확연히 지각할 수 있는 사례들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모든 종교들이 말하는 무폭력의 자비행이 불교와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지닌 교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수행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의 발생원인은 악연과 아집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에서도 이를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다양한 종교들과 화합을 모색할 수 있으며 내면의 평화를 일깨우는 인류애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도적 삶이란 평소 불교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실천적 부분에서는 비폭력을 사상적인 부분에서는 연기사상을 주안점에 둡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비폭력은 단순히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하며 선취에 이르는 결과의 선인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의 근간은 연기 사상입니다. 상호 의존적인 가립에 의한 연기와 인과의 연기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원하는 바들이 어떠한 형국으로 펼쳐질까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전도된 지견에 의해 생겨난 무명 역시도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의존에 의해 생한 것입니다. 무자성을 바로 아는 것은 대상이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무명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번뇌가 완전히 끊어진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번뇌를 끊을 수 있다면 번뇌의 습기 역시도 끊을 수 있습니다. 번뇌의 대상을 확실히 밝히지 못하는 것은 번뇌의 습기를 훤히 알 수 없게 만드는 장애인 소지장에 의한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일체의 앎을 발현하지 못하는 장애를 모두 벗어난 바를 일체 종지라고 합니다. 타인을 이롭게 함이란, 연기사상을 이해함으로써 구현된 지혜와 비폭력의 바른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용수보살의 <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연기사상의 핵심을 다룹니다. 연기는 오직 불교만이 지닌 고유사상입니다. 불교의 연기는 근도과로서 설명이 되며 해탈을 위해서는 반드시 공사상을 근저에 둬야 합니다. 교학과 수행을 겸비한 선지식들은 대부분 중관학파입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연기는 인과의 연기입니다. 더욱 세분화 된 것이 바로 12연기입니다. 뒤의 결과물은 앞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되어야 완전히 멸하게 되는 원리입니다. 유식과 중관 철학에서 인정한 연기법입니다. 대상에 상호 의존하여 성립되는 의존연기는 중관학파만의 사상입니다. 이는 자성으로써 존재하지 않음과 자성으로써 존재함이라는 양립된 견해를 낳았습니다. 중관학파에서도 세분화되어 모든 대상은 다른 대상에 의해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한 인간 생명체가 오존에 의지하여 생겨났으나 그 가운데에 나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인아)이 있는가에 대한 규명에 대하여 ‘식識’으로 논하는 자립논증학파가 있습니다. 반면 귀류논증학파는 어떠한 있음에 대하여, 존재성에 대한 인식의 존재성에 대한 유무를 다룹니다.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바가 실제 인식하는 바와 같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에 대해 논할 때 실체를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이름으로만 존재하고 있음을 ‘무자성공無自性空’으로써 밝혔습니다. 반야경에서 이르기를 ‘색즉공色卽空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색 그 자체로써 공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색 그 자체로써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인식한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연기와 공성에 의한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불교의 사상적인 부분은 유부·경량부·유식 그리고 중관의 네 가지로 분류됩니다. 무아사상에 있어서 상일 주제의 ‘아我’는 존재하지 않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대상이 내 마음에 좋아 보이는 이유로 탐하는 것으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들이 일어납니다. 탐진이 일어나는 근본에는 나에 대한 집착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따라서 인무아에 대해 논할 때는 탐착하는 대상이 나에게 있어서 어떠한 관계가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번뇌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이다. 나의 몸과 마음은 나와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아십시오.
나의 실체 보특가라는 오존에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독립된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숙히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확연히 나라고 하는 존재를 인식 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까? 유식에서는 인무아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현상을 법무아로써 논합니다. 내면에 현현하는 의식은 우리의 본질과 다르지 않음, 다시 말해 외경을 부정하게 됩니다. 현상은 마음의 습기들에 의해 일어난 바입니다. 정신과학자들은 경험에 분석을 접목합니다. 한 예로 상대가 미워 보이는 것은 인간의 분별에 의한 인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유식에서도 역시 현상뿐만이 아닌 마음이 만들어낸 외경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적은 상태의 행동과 모습에 의해 실체가 있는 듯 느껴지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것이 유식에서 말하는 법무아입니다. 유식에서는 묻습니다. 내면에 지닌 감정으로 인해 느끼는 행불행에 대한 집착과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점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오직 식만이 진실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유식에서 더 나아가 중관에서는 외경은 실제 존재하지 않으며 식 또한 진실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관의 자립논증학파에서 이르기를, 외경이 현현이기는 하나 대상의 근거가 되는 특정한 상은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용수보살은 만일 그 대상이 집착할 거리가 미세하게라도 남아 있다면 탐진을 완전히 끊을 수 없다고 논하였습니다. 탐진의 현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내 번뇌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욕계의 번뇌는 다시 싹을 틔웁니다. 만일 자상을 이야기 한다면 미세한 탐진이 일어나는 여지를 남겨둔 바와 같습니다. 따라서 귀류논증학파에서는 실체가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거친 번뇌를 끊은 이후 미세한 번뇌조차 끊기 위해서는 일말의 여지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자성自性 용수보살의 <중론>은 전체 27품이며 그 핵심을 24품에 담고 있습니다. 17대 논사들의 저술과 선대로부터 역경된 본들을 참고하여 <중론>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개념의 하나인 언어는 인식에 의한 것이기에 생각만으로 만들어낸 대상이 파생시키는 문제점은 반드시 단견에 빠지게 된다고 실유론자들은 비판하였습니다. 고통에 대한 완전한 앎과 집제를 끊음 그리고 고통을 멸함에 이어 도를 닦음에 있어서 궁극에 무학도의 존재인 승보조차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박을 6번 게송까지 제기 했습니다. 자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학파에서 지닌 잘못된 견해를 봅시다. 붓다의 사성제 가운데 멸제를 보면 궁극적인 성취 즉, 모든 고통을 소멸한 상태입니다. 고통은 무상·고·공·무아의 네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아집이 야기하는 탐진의 번뇌들이 지어내는 악업으로 고통의 결과를 겪기에 무아의 사상은 아집을 없애기 위한 붓다의 설법입니다. 붓다께서는 상일주제의 아트만에 대하여 무아를 설법으로써 보이셨습니다. 중생들의 마음에 자발적인 무아의 믿음이 생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전체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붓다의 설법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가능할 때 실천적인 마음의 변화가 가능합니다. 공성 그리고 무아의 가르침이 지닌 목적은 중생의 마음이 지닌 부정적인 부분, 다시 말해 번뇌의 근원이 되는 아집을 완전히 멸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닙니다. 자상을 인정하는 배경에서 무아 사상이 있습니다. 용수보살께서는 <중론>에서, 보편적인 자성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무아 사상은 도움이 되지만, 아집에 대한 미세한 집착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성의 목적과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번뇌의 근간이 되는 아집을 없애고 나를 대상으로 하는 것에 대한 진실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탐진이 발생할 때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의 분별로 인하여 상대의 허물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진실한 대상이 있다고 집착하여 일어나는 분별심입니다. 내가 인식한 바대로 대상이 지닌 허물이 실제 한다고 믿는 것은 번뇌의 근간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번뇌는 두 가지입니다. 견해를 지닌 번뇌와 견해를 지니지 않은 번뇌입니다. 대상에 대하여 면면히 살피지만 이미 잘못된 인식을 바탕으로 분별하기에 다양한 번뇌가 일어납니다. 어떠한 번뇌이건 법집이 항시 동시에 상응하거나 원인이 되어 일어납니다. 자비심과 신심 역시도 법집에 의해 일어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원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선한 마음의 상태들은 법집을 원인으로 하지 않지만 허물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마음 상태는 반드시 법집과 상응합니다. 따라서 공성의 지혜로써 법집을 원인으로 한 번뇌나 이와 동반한 번뇌들을 대치할 수 있습니다. 공성의 지혜는 해탈과 멸제를 추구하는 마음 그리고 보리심에 대한 희구심의 자양이 됩니다. 번뇌는 공성으로서 대치됩니다. 인명학에서 해탈의 가능 여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에서 이치적으로 밝힘에 있어 공사상은 반드시 이해돼야 합니다. <보성론>에서 우리의 마음이 청정한 광명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해탈이라는 것이 공사상으로써 증득되는 성현인 것입니다. <사백송>에서 이르기를, 붓다의 말씀을 듣고 의심이 되었으나 붓다께서 바로 공사상으로서 실상을 보이셨고 이로써 해탈과 멸제를 믿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해탈은 마음이 변화하여 이루는 것이기에 우리의 마음은 공사상에 입각한 무자성입니다. 공성으로써 마침내 번뇌의 습기까지도 끊을 수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자상을 인식하면 본질에 위배됩니다. 자상에 집착하면 번뇌의 미세한 습기들이 남아 있기에 공성의 본질을 확실히 체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멸하는 대상들을 이치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는 실제 생멸은 없습니다. 그 성품 그 자체로 성립되는가를 본다면 희론은 적멸할 수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이것과 저것이 고유한 형태로 남아 있다면 아직 희론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공성의 본질을 캐다 공성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이 아닙니다. 대상들이 서로 의지하여 성립하기에 공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얻을 바가 없음 역시도 공성의 정의가 아닙니다. 공성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논증으로서 공성에 접근합니다. 대상 그 자체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쉽지 않은 이해의 요구로만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한 대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 위해 논리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과 저것은 모두 이름으로 존재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용수보살께서는 붓다의 궁극적인 견해를 밝혔습니다. <중론>에서는 중관으로써 대상으로써 실상을 규명했을 때 얻을 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하는 존재들의 확인을 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성의 본질은 모든 희론이 적멸하여 집착의 대상이 완전히 멸한 상태입니다. 실체를 규명하여 아무것도 얻을 바가 없음을 알고 상호 의존으로 존재한다는 속제와 승의를 알아야 합니다. 외부의 대상이 자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또 다른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자립론 중에서는 실제 고유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실체가 없는 전체가 있고 뭔가 특별한 본체가 있다고 하는 것 즉, 자상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용수보살은 <중론>으로 논박하셨습니다. 붓다께서 법을 설하여 보이신 이제에 의지하여 대상의 공을 발견해 봅시다. 인식하는 존재방식에 대하여 실상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이 진제와 속제입니다. 존재를 파악해 봤을 때 드러나는 것이 진제입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받음은 두 가지가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모든 대상은 오직 상호 의지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상호 의존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뿐이라는 것을 결론 낼 수 있습니다. 사유를 통해서 가능한 논리적 귀류를 얻어낸 것입니다. 속제란 현현한 대상에 대하여 분석하거나 면면히 따지지 않고 보편적으로 얻는 세간의 진리입니다. 다음의 게송을 거듭 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의존하며 연관되어 일어나는 어떤 것, 그것은 공성을 말하네. 그것은 의존하여 붙인 것이니 그 자체가 중도라네.
인도 다람살라 / 가연숙 omflower@gagyo.org / www.gagyo.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