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불자와 함께한 ‘나’에 관한 고찰 “동기를 바르게 세운다면 몸과 말 그리고 마음의 모든 업은 선한 업이 됩니다. 법을 들을 때 그것이 법다운 법이 되기 위해서는 발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법을 설하는 자와 듣는 자는 의지를 굳건히 하여 궁극의 지혜를 구족하겠다는 서원이 바로 서야 합니다. 일체 종지를 위하는 대승에 귀의하십시오.”
믿음을 지닌 수행자들은 기도를 한다. 그곳이 법당이건 교회건 믿음의 대상과 방식은 차별이 되지만 이를 굳이 경계 짓지 말아야 한다고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7)는 말한다. 기도문에서 ‘나’라고 하는 실제를 규명하고자 한다면 무아의 자량으로 관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러시아불교의 역사는 티베트불교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현재 러시아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부랴트, 칼미크, 투와 공화국은 17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티베트불교의 황금기였다. 19세기 러시아에서는 티베트본 <금강경>을 번역하는 연구소가 설립되기도 했다. 13대 달라이라마(걀와 툽텐 갸초)의 종교 자문이 부랴트 공화국 출신의 아그반 도르지에프(Agvan Dorzhiev, 1853~1938)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더욱이 유럽 주도 최초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원이 건립되기도 했다. 1930년대 종교를 아편으로 간주하던 공산정권의 탄압을 겪은 이후 1987년에 이르러서야 14대 달라이라마는 러시아 레닌그라드를 방문할 수 있었다. 달라이라마는 당시 호텔의 조식 서비스가 달라이라마의 식사 시간을 고려하지 않아 상당히 허기졌었다는 추억을 회상하며 대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번 달라이라마의 다람살라 법문은 러시아불자들의 요청으로 작년 12월 19일부터 3일간 진행된 것 가운데 ‘나’에 관한 부분이다. 이 법회에서 달라이라마는 칼미크대학의 명예교수로 임명되었다.
법이란 무엇인가? 티베트어로 법이란, ‘변화를 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산스크리트어의 다르마Dharma는 ‘잡다’, 두려움의 고통에서 ‘구제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도 인류사를 보면 3천년 이전에 종교를 신앙으로서 인간 세에 구현하고자 할 때는 지금과 같은 이성 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눈앞의 현상에만 인지가 머물러 극복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초월적인 자연과 신에 의지하게 되었고 비로소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인도 최초의 종교 가운데 하나인 수론학의 상키아Samkhya 학파와 2600년 전에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와 자이나 학파를 비롯한 수많은 외도와 철학사상 뿐만 아니라 외부의 신앙들이 유입돼 인도는 전 세계의 모든 종교를 집결시켜 놓은 종교와 철학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종교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염려되는 부분은 자신의 종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들입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종교에서 무엇을 핵심으로 하는지 바르게 인지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나’를 묻다 오늘 우리는 일상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나라는 생각’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현존하는 철학과 사상의 근본 질문입니다. 불교를 제외한 종교에서는 ‘나’에 대해 불멸하는 독립적인 것으로 인정합니다. 우리의 몸이 ‘나’일까요? 우리의 마음이 ‘나’일까요? 몸과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나’일까요? ‘나’라는 것은 당연히 태어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청년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는 변화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함이 없는 ‘나’로 고정화시킵니다. 인간이 죽음을 맞이해 장작개비의 불꽃이 모두 사라진 때에야 ‘나’는 없어진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붓다의 말씀 가운데, ‘나’라고 하는 독립적이고 실체적이라는 인식으로 집착을 일으켜 분노와 원한을 불러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만이 귀중하다고 하는 생각은 아집에 기인한 것으로 모든 허물의 근원이 되는 거름입니다. 잘못된 지견의 시작은 바로 ‘나’라고 하는 애착으로부터임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예를 들어 비행기의 엔진을 보면 여러 가지 부품으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여러 다양한 크기의 정반으로 합체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형태의 오온(변화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이며, ‘나’도 이와 같은 오온의 화합으로서 존재합니다.
‘나’를 찾다 몸과 마음의 미세함에서 더욱 미세한 영역에 이르고자 하는 정진이 수행입니다. 거친 의식은 우리의 일상에 노출된 표면적인 흐름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는 이러한 미세함으로 다가가 ‘나’의 본래 모습을 찾도록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창조주와 아트만(자아)을 인정하는 타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과 믿음 안에서 아집의 허물을 줄여갈 수 있는 해답을 구한다면 말입니다. 거친 이생의 몸은 시작을 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과 같이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그 시작을 규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닌 다양한 마음의 변화, 그 역시도 원인과 조건에 의지합니다. 외부의 대상들 중에 쉬운 예로 산과 나무 그리고 돌과 같은 것만 보아도 변화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상응인’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뇌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신경 조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걱정이 있으면 몸 역시도 좋지 않아집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있다 하더라도 질투와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휴식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휴식이 몸의 평안함으로 이어집니다. 좋은 사람들과 있으면 시간이 참 빠르다고 느껴지지요. 그것은 마음이 편안한 대상에 의지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휴식이란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몸이 불행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평온하다면 몸의 불행을 조복할 수 있습니다.
물이 흐르듯 꽃이 피듯 의식은 지속적으로 흐릅니다. 이와 달리 근식은 자주 끊기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의식의 근치인은 그 이전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식의 태초는 규명할 수 없는 것이며, ‘나’라는 것은 몸과 마음에 의지해서 성립된 것이 됩니다. ‘의지한 나’의 태초를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불교에서의 ‘나’는 시작과 마지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작이란 ‘무명’이며 이로 인해 고통의 연기가 일어납니다. 사실 바른 인식이 지닌 명료한 자성은 바름과 바르지 않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 전도된 정견과 반대된 바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특정을 지닌 원인과 조건을 지닌 인식들에 의해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허물은 객진과 같습니다. 무여열반 이후에도 의식의 흐름은 끊기지 않습니다. 삼보에 대한 귀의를 통해 불자는 동기를 바르게 합니다. 따라서 허물과 악업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법을 설하고 들음이 법다운 법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발심의 동기를 일으킴으로부터입니다. 발심이란 일체 중생을 위해 불지를 이루겠다는 서원입니다. 불지는 결코 우연히 생겨나지 않습니다. 순차적으로 깨달음이 증대된 수행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지닌 현재의 마음이 긍정적으로 완전한 힘이 된 바를 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경하는 삼보는 수승한 보리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이루고저 수행하는 이들은 ‘바로 내가 붓다를 성취하겠다’고 하는 서원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의 몸이 나의 마음이라는 사유의 꼬투리를 잡아 들여다보십시오. 붓다의 말씀인 ‘무아’를 화두에 두었다면 영원한 안락과 행복에 이르기 위한 중생을 위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복덕 자량과 지혜 자량을 동시에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리를 이룰 때까지 귀의해야 합니다.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보시를 비롯한 여섯 바라밀의 자량으로 궁극에는 성불하기를 서원합니다.
불교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품자 붓다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생각과 근기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삼승三乘과 사종四種이 있었습니다. 수행은 각자의 기질에 맞춰 이뤄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지구상의 다양한 종교 역시도 인정되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불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불교가 옳아서 불교만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철학과 색색의 종교를 통해 근본적인 사랑과 자비의 본질을 봅니다. 불교에는 고유한 연기 사상이 있습니다. 여전히 외도는 상일 주제의 아트만을 인정하며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과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험하는 주체인 ‘나’에 대해 ‘무아’로 정의하는 불교와는 구별됩니다.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연기’는 붓다의 말씀 가운데 핵심입니다.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불교의 사상입니다. <중관학>에서는 ‘일체법이 진실된 실체가 없다’는 견해를 보입니다. 가립된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것으로 논합니다. 인과에 입각한 연기 사상을 이해하고 그에 근간을 둔다면 상위의 연기 사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앎으로써 선취에 날 수 있는 원인과 조건을 구족할 수 있습니다. 의지해서 존재하는 연기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십시오. 이로써 법집을 멸하고 해탈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원인과 조건으로써 선취에 날 때에 궁극의 해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비의 대상은 모든 생명체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나’를 바로 알기에 모두 가능합니다. 사람만으로 그 대상을 국한시키지 마십시오. 행복을 원하는 모두에게 사랑의 마음을 내십시오. 이타의 수승한 마음은 고통을 지우는 지혜로운 지우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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