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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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용서가 지닌 아름다움을 즐겨라
“지혜의 눈을 떠라.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구하라.” -쫑카파 대사-
다람살라의 몬순은 역동적이다. 탬플로드(남걀사원으로 향하는 길). 쏟아 붇는 비를 피해 잠시 들른 커피숍 ‘커피토크(Coffee Talk)’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는 사이 막대사탕을 손에 쥔 아이마냥 순식간에 맑은 하늘이다. 평소 모습을 보이지 않던 바위산이 멀리 그 위엄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걷다보면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풍경 속에 서서히 휩싸여 이내 눈앞이 시리도록 부시다.
올 해 한국인법회는 예년 보다 조금 이른 8월에 개최되었다.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열린 법회는 쫑카파 대사의 <도차제섭의>와 <밀교도차제>를 주제로 하였다.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8)는 한 달여간 인도 라다크에서의 명상을 끝내고 23일 다람살라에 돌아와 한국인 법회를 맞았다.
달라이라마는 심한 입병에 걸려 있었다. “한 쪽 혀에 복잡한 원인의 뾰루지가 돋아 말을 하기가 어눌해졌다”면서 다음 날로 앞둔 한국인 법회를 미리 걱정했다. “라다크에서 말린 살구를 많이 먹어서 비타민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텐데 원인을 알 수 없다며 스스로 치유할 때까지 이대로 내려놓고 있다”는 말을 이었다.
한국 불자들의 권청으로 열린 이번 다람살라 법회에는 총 61개국에서 동참했다. 인도 보드가야에서의 폭탄테러 영향으로 남걀사원은 핸드폰과 카메라를 가지고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법회 기간에는 개인 라디오는 물론 MP3와 같은 녹음 장비 등의 반입을 불허해 보안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법회에서는 다람살라에 거주하는 티베트 스님을 대상으로 승복을 공양하는 보시 행사가 열려 눈길을 끌었다. 다람살라 반경 2시간 이내 안쪽의 비구사원과 사미니사원 24곳에 주석하는 3천 명의 티베트 승려에게 올려진 승복 보시는 한화로 약 1억 원에 달했다. 티베트 승려 1인당 한화 4만 원 정도면 승복 한 벌을 해 입을 수 있다니, 한국 승복의 적게는 10분의 1에서 20분의 1에 해당하는 소소한 가격에 놀라고 또한 거대한 보시의 원력에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요즘 한국은 어떻습니까?”
종교와 무관하게 이번 법회에 참석한 대중에게 감사를 표하며, 달라이라마는 한국 종교계의 분열과 갈등에 큰 관심을 보였다. 승가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외신에 보도되어 달라이라마는 한국불교의 내부 정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했다. 더욱이 기독교의 해외선교 활동이 빚어내는 충돌에 대해서도 염려했다. 종교의 화합을 앞세우면서도 특정 종교의 해택 몰아주기식의 국가 정책과 삼보의 위상에 해가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자정의 위신력을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달라이라마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과거 한 기독교 목사와의 대화를 예로 들었다. 이를 통해 불교가 어떻게 타 종교와 대화를 모색해야 하는가를 상세히 일렀다. 목사는 불교의 ‘공성空性’을 거론하며 성경과 대론하기를 의도했다. 그러나 달라이라마는 대화의 서두를 열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은 자생이며 영원하고 불멸하기에 불교의 연기 공성과 대화가 불가하다는 이유다. 하나님을 향한 강한 일념과 불교의 공성이 대치하게 되면 상대의 신앙에 해가 된다는 것이 달라이라마의 입장이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것은 원인에 대해 불멸이라는 근거를 두고 있다. 원인이 지닌 변화성을 거부하는 이치인 것이다.
이어서 달라이라마는 물음표를 들었다. “하나님의 존재가 지닌 전지전능함이 왜 우리가 처한 많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가. 또한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린 양들의 고난과 갈등을 지속적으로 방관하는가.”
불교적 입장에서 이를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면 외도가 지닌 교리적 모순을 인정하게 된다. 불교에서의 공성은 의지(의타)에 의해 존재하는 연기이다. 행복과 불행은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결과이다. 원인과 조건을 알면 문제를 해결할 답을 구할뿐더러 문제 자체를 만들지 않을 수 있다.
달라이라마는 “불교에서는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에 대해 세 가지 인을 말한다. 부동인으로서 창조주의 의도로 현상계가 발생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상인으로서 결과가 무상하기에 원인도 무상하다, 결과를 내는 잠재력으로서 상응인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고통의 원인은 ‘무지’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다인종 다문화의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명한 불자들은 인과법을 알아 공성으로서 파악할 것”을 당부했다. 더불어, “이웃종교는 과거 석가모니 붓다께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팔만 사천 가지의 법문을 하신 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양한 신앙의 형태로 환경과 문화에 근거해 생겨난 것임을 인정하고 종교 간에 화합하고 대화로써 공동의 가치를 구현하는데 힘을 모을 것”을 바랐다.
(다음은 <도차제섭의> 법문 가운데서)
올 해 한국인 불자들의 권청으로 열린 법회는 깨달음으로 향하는 게송과 밀교의 차제를 주제로 합니다. 외도와 불교도의 차이, 대승과 소승의 차이 그리고 현교와 밀교의 차이를 아우르는 주제를 요약해 그 핵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실천하여 그 수승한 가르침의 참의를 알아 수행한다는 목적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도차제섭의>는, 쫑카빠 대사 본인의 수행의 기록이자, <해심밀경>의 요의입니다. 붓다의 경전과 선지식의 논서를 배워 내 수행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에 종교가 과연 어떤 도움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눈부신 문명의 발달이 진행 중인 이 시간에도 법회가 열리고 있는 다람살라의 전기 사정은 열악합니다. 각자 삶이 지닌 상황에 따른 문명의 척도이겠으나, 실제 주된 삶에서 얼마나 불법을 만나고 사유하는가와 비교해 보면 매우 상대적인 경험일 것입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 종교를 통해 자연의 절대로부터 위안과 희망을 찾고자 했다면, 현대는 기계문명의 발달로 과학이 종교의 역할을 일부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에 의해 인류는 그들이 원하는 물질적 행복을 제공받고 있습니다.
물질의 발달과 더불어 마음의 불행 역시도 다층화 되었습니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의 행복을 구현하기란 매우 어렵고 지속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색), 음악(성), 향기(향기), 맛난 음식(미), 육체적 관계(촉) 들의 정점인 오늘의 ‘나’가 마음의 평안과 대비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 이면에는 끊임없는 탐욕과 지속적인 불안 그리고 경쟁심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명예와 권력으로는 해결책을 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때문에, 과학과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몸과 마음의 상관성이 연구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행복에는 일시적인 행복과 궁극의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바람직한 원인을 제공하면서 가능해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지’로 인해 행복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합니다. 용수보살은, “연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인과연기와 가립연기가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 60억 인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덕적 삶’에 관심이 있을까요?
내가 살아가는 삶의 상황에 만족하는 바에 의해 판단해 보십시오. 엄밀히 말해, 마음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색, 성, 향, 미, 촉의 한 대상을 대하는 바 만족 혹은 불만족 아니면 무관심 등의 다양함으로 세분화하여 인간이 느끼는 행복과 사고에 따라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종교를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모든 인류는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세밀하게 마음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뇌 과학과 의학 분야에서 마음과의 상관성을 연구하는 것도 이러한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이 증상생인 것은 동물보다 사고와 지성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탄생이 단순하게 육체적 행복의 구현에만 있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속적 윤리의 핵심은 ‘양심’입니다. 선한 마음,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양심에 비추어 사는 삶 그리고 행복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과 더불어 이웃과 진정한 벗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지닌 도덕이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심축이 됩니다. 근저에는 이성에 기반을 둔 지성적인 윤리와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권유합니다.
저는 윤리와 이타가 인간의 삶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 왔습니다. 종교를 지닌 이라면 더욱더 종교적인 실천과 수행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사랑, 자비, 인욕, 만족의 공통된 교리를 지닌 종교가 강조하는 바가 바로 용서와 계율입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고 나누는 것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들을 직시하십시오.
선한 마음을 삶에서 실천으로 구현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회봉사 활동이나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삶이 그 예입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아집’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붓다께서 ‘무상’과 ‘무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지닌 교리는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는 상통합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는 나 자신 스스로가 ‘보호존’입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가 짖고 받은 것입니다. 행위, 다시 말해 ‘업’을 통해서, 선과 불선은 지어집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됨을 본질로 한 것이 바로 선업입니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됩니다. 모두가 ‘나’에 의한 인과입니다. ‘나’는 오온에 의지하여 존재하며, 오온에 의지함이 없이 따로 존재하는 ‘나’란 없습니다.
2500년 전에 출연한 불교,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자이나교를 비롯하여 다양한 외도들 역시 계, 정, 혜 삼학을 근본으로 삼아 대상을 분별하였습니다. 특별히 불교에서는 ‘일체법이 인과’라고 하였습니다. 외부의 현상과 기세간 그리고 유정세간이 모두 원인과 조건에 의해 존재한다는 견해입니다. 인과와 근거하어 ‘무아’로서 행복의 주체는 오온에 의지하며 ‘나’는 항상 변화합니다. 이 변화성을 외도에서는 영원불멸하는 실체라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궁극의 실체를 발견해야 한다는 오류에 빠졌습니다.
나의 실체가 있다면 아집이 생겨납니다. 탐, 진, 번뇌의 원인이 바로 아집입니다. 나에 집착하는 아집은 악마와 같은 것이며 고통을 끌어오는 근원입니다. 붓다는 상일주제의 실체가 있다는 전도된 견해를 반박해 ‘무아’를 설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