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생권生權은 평등의 주장 불교에서 말하는 ‘무연대자無緣大慈, 동체대비同體大悲’는 불교가 중생을 존중하고 생권을 중시한다는 가장 아름다운 해석이다. 동체는 곧 평등이다. 평등해야 화목하고 평안하다. 불교의 경전 가운데 평등과 관련된 교의나 사상의 예는 무척 많다. 『화엄경』에서는 “일체 중생은 평등하다”고 하였으며, 『대지도론』에서는 “범부와 부처는 평등하며,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말하였다. 또한 『대반야경』에서는 “위로는 모든 부처와 아래로는 축생에 이르기 까지 평등하며 차별이 없다”고 하였으며, 『금강경』에는 “불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라는 법문이 있다. 현대인들이 저마다 화평和平을 부르짖어도 평등이란 개념이 없어 진정한 화평이 도래하기 쉽지 않다. 평등은 화평을 선도하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이다. 평등이 있어야 화평이 있을 수 있으므로 평등과 화평은 한 몸이자 양면을 가진 진리이다. 중생은 평등하다고 했다. 위로는 모든 부처와 보살에서부터 아래로는 정情이 있고 식識이 있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존엄성을 갖고 있고, 생존의 권리를 갖고 있다. 우주간의 생명체가 한 몸처럼 공생하도록 생권을 제창했기 때문에 진정한 평등이 있는 것이다. 평등이 있기에 민주가 있는 것이며, 민주가 있기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평등이 없다면 민주와 자유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불법에서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라고 한 것은 ‘민주, 자유, 평등, 이 셋 역시 차별이 없다’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앞에서 열거한 민주, 자유, 평등은 불학佛學, 철학과도 관련 있는 이론이지만 세계, 정치, 국가, 국민, 종족과도 연관된 내용이다. 민주, 자유, 평등은 수많은 것과 관계 지어 말할 수 있다. 정치에 빗대어 그것을 불교의 논점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정치는 국민에게 봉사하고 관리하며, 사회의 안전을 수호한다. 불교는 중생을 교화하고 이끌며, 사회의 역량을 결집한다. ② 정치는 악을 물리치려고 전쟁을 벌이며, 국가를 보위한다. 불교는 중생을 고통에서 보호하고 국가를 수호한다.
보통 오계를 다섯 가지로 나눠서 설명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오직 한 가지일 뿐이다. 즉 유정한 중생들을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니, 오계를 범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금하는 것을 어기는 동시에 국가 법률에서 금하는 것을 어기는 것도 된다. 사람이 저마다 오계를 엄격히 지킨다면 화평하고 즐거우며, 부강하고 편안한 국가와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불교는 항상 평등을 제창해 왔다. 평등이 있어야 비로소 화평하고, 평등이 있어야, 비로소 민주가 있다. 민주적 소양을 배양하려면 평등이라는 관념이 먼저 수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 각국과 종족 간에 화평하려면 평등을 먼저 제창해야 한다고 본다. 심지어 양안해협의 문제도 서로 평등의 참뜻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화평에 이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주, 자유, 평등을 이루려면 우리의 차별, 집착, 침범, 해악 등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모두가 ‘동체공생同體共生’이라는 생각을 갖고, 서로 존중하고 포용한다면 화평은 자연히 찾아올 것이다. 요컨대 민주는 시대적 추세이고, 자유는 모든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권리이며, 평등은 인류가 마땅히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장차 세계 인류가 이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다 같이 합심 협력하여 민주, 자유, 평등한 인간의 불광세계를 만들어 나가길 희망한다.
* 위의 문장은, 『보문학보』 편집장인 만과滿果 스님에게 원고가 전해질 때 내가 마침 요양 차 호주에 있었던 관계로 참고 자료에 한계가 있었으며, 불교의 수많은 민주, 자유, 평등에 관한 사상, 의미 등을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기억에 의존해 간략하게 소견을 피력한 것이 무척 아쉽다. 그러나 이 논점을 제출함으로써 불교의 민주, 자유, 평등의 참뜻을 더욱 널리 선양하고, 특히 불교 학자들이 불교의 민주, 자유, 평등의 사상에 대해 계속해서 더 폭넓게 넓혀주기를 바란다. 이 글이 세계 화평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사성제에서 사홍서원까지 부처님께서 깨달은 우주의 진리는 ‘고苦·집集·멸滅·도道’이며, 고·집·멸·도에서 광대무변한 불법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의 본질을 가지고 설정한 이치의 단계였으며, 세간의 실천을 거치면서 발전된 것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다.
고제苦諦: 중생이 괴로움이 많은 까닭에 발원하오니, “가엾은 중생을 다 건지겠습니다.” 집제集諦: 업이 쌓여 괴로움이 된 까닭에 발원하오니, “끝없는 번뇌를 다 끊겠습니다.” 도제道諦: 중생을 도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발원하오니,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겠습니다.” 멸제滅諦: 중생이 불과를 얻게 하기 위하여 발원하오니,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재세 당시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우주의 인생, 세간과 출세간 진리의 순서인 고·집·멸·도를 깨달아 세간에 널리 알리셨다. 최초의 ‘삼전법륜三轉法輪’ 가운데 첫 번째를 ‘시상전示相轉’이라 하는데, 이는 사성제의 내용과 정의에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이것은 고苦이다. 모두가 고苦이다. 이것은 집集이다. 고苦의 원인이다. 이것은 멸滅이다. 고苦의 소멸이다. 이것은 도道이다. 고苦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두 번째는 ‘권수전勸修轉’이라 하는데, 제자들에게 사성제의 법문을 지니고 수행하여 번뇌를 끊고, 해탈에 이르도록 권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苦이다. 너희들은 응당 알아야 한다. 이것은 집集이다. 너희들은 응당 끊어야 한다. 이것은 멸滅이다. 너희들은 응당 증득해야 한다. 이것은 도道이다. 너희들은 응당 닦아야 한다.
세 번째는 ‘작증전作證轉’이라 하는데,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은 이미 사성제를 깨달았으니 제자들 또한 용맹정진하면 자신처럼 사성제를 깨닫게 되리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苦이다. 나는 이미 알았다 이것은 집集이다. 나는 이미 끊었다. 이것은 멸滅이다. 나는 이미 증득했다. 이것은 도道이다. 나는 이미 닦았다.
고苦와 집集은 미망의 세계인 세간에서 짓는 인과로 집은 원인이고, 고는 결과이다. 멸과 도는 진리를 깨달은 세계인 출세간에서 짓는 인과로 도道는 원인이고, 멸滅은 결과이다.
고집멸도 ‘사성제’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불제자 누구나 청산유수처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불법의 진리를 실천하려면 반드시 ‘사홍서원’이라는 원문願文을 실천해야 하며, 그래야 넓고 큰 보살도의 육도만행인 ‘행문行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사홍서원은 과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성제의 의미와 이치를 부처님을 대신해 실천과 수행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불교가 시공간에 널리 퍼지고 점차 가득 차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성제의 불교 의리義理로부터, 더 나아가 실천적이고 실증實證적인 ‘사홍서원’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설법은 시대성과 연관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는 발전성마저 있어, 어떤 흐름 안에서 일관되게 흘러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법은 역사와 시공을 초월한다. 현대의 불교도는 대승과 소승의 불법을 함께 연구하고 기획하면서 서로 연결되고 있으니 대승과 소승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