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산에는 대략 천여 명이 속해 있고,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이 혼재해 있다 보니, 각 부서의 인아 사이에는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 근무하는 부서에서 주무 관리자와 맞지 않고, 관리자가 부리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래서 저는 서기실을 만들었습니다. 누구든 상사와 맞지 않는 사람이 제게 달려와 털어놓고 그 부서에서 일하기를 원치 않으면 먼저 저의 서기실에 와서 일하라 하였습니다. 저의 서기실은 마치 수용소와 같았으며, 상사와 맞지 않는 사람, 원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제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자장 스님 등과 같은 일부 장로사형은 그래도 저를 따른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어떤 제자들이라도 좋건 나쁘건 간에 그들의 부서에 배치하면 능히 받아들이고 능숙하게 그들을 이끕니다. 그러나 일부 젊은 주무 관리자는 인사에 있어 편리를 봐줄 줄 모르고 두루 어울릴 줄 모릅니다. 이러한 인사 문제를 위해 서기실이라 부르는 하나의 완충지대를 만들었습니다. 서기실에는 전체 인원이 몇 명인지도 모릅니다. 적을 때는 두세 명이 있고, 많을 때는 일이십 명이 한 공간에 있을 떼도 있으니 상황을 봐 가면서 결정합니다. 서기실에서 얼마 동안 대기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누구든 1, 2개월 머물다가 특기를 살려 다른 곳에 일을 찾아가고, 누구는 온 지 8년, 10년 지나도 떠나지를 못하고 서기실에서 자료를 찾고, 파일을 관리하고, 서적을 발송하고, 기록하는 등의 일을 도와줍니다. 서기실의 제자는 대부분 아주 즐거워하며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서기실은 저의 관리 아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능력이 어떠하든 크게 따지지 않고, 그들의 업무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따지지 않습니다. 또 지나치게 칭찬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호통 치거나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일체 아무 일 없음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저의 관리는 그저 다들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이해하며 타인을 침해하지 않아 모두가 자아를 단속하는 생활을 준수해 나가는 것입니다. 저의 작디작은 서기실은 묘광妙廣 스님이 주임을 맡고 있습니다. 묘광 스님은 오는 사람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가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보내줍니다. 그는 성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그를 본받아 타인의 시시비비를 말하지 않고, 타인의 좋고 나쁨을 논하지 않으며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서기실은 인사를 중재하는 기능을 발휘해 왔고, 보이지 않게 승단의 안정에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되고, 날카로워도 안 되며, 책망하면 안 되고, 따질 필요가 없으며, 매사 더 많이 이해하고, 매사 상대에게 더 자유를 주며, 매사 능력에 따라 기용하고, 사람끼리 비교하여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저마다의 능력이 따로 있다고 하듯, 적합한 인연과 적당한 인아 관계를 기다렸다가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켜 나가게 해주면 피차 서로 존중과 포용하는 가운데 타인과 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서로 편안하고 아무 일 없게 됩니다. 저는 관리학 측면에서 무사無事를 관리로 삼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 생각합니다.
가오슝 불교당高雄佛敎堂 가오슝 불교당은 제가 발의하여 건설한 것이지만 저는 사찰이 저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것이고, 대중의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을 완성한 뒤에 월기月基 스님에게 주지를 맡아줄 것을 청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작은 집이 하나 있었는데 유치원을 차려도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이란에서 저는 이미 자애慈愛유치원을 만들었기에, 가오슝 불교당도 젊은이에게 자육慈育유치원을 개설해 맡겨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일부 젊은이들이 저의 의견을 받아들여 타이중에 있는 성정부省政府에서 개설한 유치원교사양성반에 참가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으면 가오슝으로 돌아올 참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자육유치원 등록을 하고, 서둘러 원생 모집원 등록을 하고, 서둘러 원생모집도 해두어야 젊은이들이 돌아와 바로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대략 4~50명을 모아 회의를 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급할 것 없습니다. 올해는 시간이 촉박하니 우리 내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다들 시기를 앞당겨 처리하지 않고 늦추려고만 하는지 그들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먼저 이사를 선출하지 않았고, 그들은 누가 선출될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모두들 밀어주지 않으려 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저는 이런저런 말로 설득해 보았으나, 그들은 연기하는 쪽으로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결국 저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저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하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옆에 앉으신 주지이자 저의 스승이신 월기 스님에게도 “스승님, 이해해 주십시오. 앞으로 불교당의 일에 소임을 살아 달라고 저를 찾아오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홧김에 제가 머무는 방으로 돌아온 저는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면목이 없어진 그들도 나중에 제가 있는 곳을 찾아와 말도 걸어보았지만, 저는 눈조차 뜨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진호미眞好味 호텔의 이사장인 왕준웅(王俊雄, 법명은 자서慈書)과 경방서점慶芳書店 창설자인 이경운李慶雲 등 삼십여 명이 문 앞에서 저에게 “스님 뜻대로 저희들은 따르겠습니다” 하며 간청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관용을 베풀 때는 너그럽게 관용을 베풀고, 그만둘 때는 곧바로 그만 두어야지 덮어놓고 자기 고집만 부려서는 안 된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교육 창설이 미래 불교의 발전에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후에 그들의 합심 단결로 자육유치원은 가오슝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훌륭한 성적을 내게 되었습니다. 주자화周慈華와 자용 스님의 발심 아래 유치원 사업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불교를 위한 수많은 우수한 인재와 신도를 길러냈습니다. 관리학을 응용함에 있어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무턱대고 고집을 부리지 말고, ‘나는 관여 안 한다. 물러난다. 필요 없다’는 것처럼 일보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러나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은 모두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다시 저와 이야기하려 해도 눈조차 뜨지 않고 이 일에 관여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상하게도 당신이 관여 안 한다고 하면 할수록 상대는 당신이 관여해 주기를 더욱 바랍니다. 그러므로 단체 안에서, 군중 안에서, 단체의 군중을 잘 관리하려면 사람 마음의 미묘한 관계 또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오슝 불교당은 원래 먼저 ‘링야구(.雅區) 포교소’라 불렸으며 신앙을 가진 링야구의 일부 신도가 조직한 것입니다. 제가 가서 ‘가오슝 불교당’이라 고치자 신씽구(新興區), 옌청구(鹽.區), 산민구(三民區) 등 전체 가오슝의 신도들이 연이어 찾아왔습니다. 링야구 주민들의 지역 관념은 매우 강했습니다. 우리 링야구의 불교당은 이제 산민구의 사람도 오고, 신씽구의 사람도 오니 항상 타인이 들어와 그들의 마당을 차지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겉으로는 그럭저럭 화목한 듯 보였지만 모두의 마음에는 분별이 있고 개인적 지역 관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에는 타이난(台南)파, 펑후(澎湖)파, 가오슝 지역주민파까지 있어 모두 지역을 가지고 기 싸움을 했으며, 이 사람은 어디 구역이고 저 사람은 어느 구역이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한 단체 안에서 이러한 분별과 대립이 있고 너와 나의 관계를 따지고 비교하는데, 앞날에 더 이상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후에 저는 절묘한 방편 하나를 생각해 냈습니다. 법당에 불상을 모셔야 한다고 하자, 저는 필요 없다며 신도들을 모아놓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 사람이니까 인도로 돌아가시게 합시다. 우리 여기에 인도의 부처와 조사는 필요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듣고는 모두 망연자실하거나 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제가 “여러분은 여기가 여러분의 땅이라 생각하시니 석가모니불은 인도로 돌아가시게 하고, 저 역시 가오슝에 있길 원치 않으니 이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서 잘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깨닫고는 “아이고! 스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우리가 이 구역 저 구역 분별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가오슝 불교당은 합심 단결하여 서로 돕고, 부처님과 스님의 지도 아래 다함께 불교를 널리 알리고 우리의 믿음을 정화시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찬탄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해야 불교를 이해한다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위 가오슝의 불교일 뿐만 아니라 타이완의 것이고, 중국의 것이고, 세계의 것이고, 온 허공, 우주 인류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내 집만의 불교, 내 구역만의 불교로 불교를 확 축소시켜버리니 그래서야 어떻게 불교와 호응할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가오슝 불교당이 모두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이 한 차례의 설명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중관리 측면에서 반드시 중요한 순간, 중요한 자리에서 일침을 가해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것이 일을 쉽게 성사시킬 수 있는 방도라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