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사람은 전력공사에 근무하는 진수평陳秀平 선생입니다. 그는 단지 몸에 경찰이 의심 가는 인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명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유로 덩달아 혐의를 받았고, 그 후로 경찰 측에서도 끊임없이 귀찮게 했습니다. 그 뒤에 그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르웨탄(日月潭)에 있다가 이란의 전력공사로 옮겨와 제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저는 다시 주덕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해 경찰의 감시와 심문 및 관리를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훗날 그는 제가 타이베이에 설립한 지광상공智光商工 직업전문학교의 부교장까지 지냈습니다. ‘관리’를 하다 문제점이 생기면 먼저 문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야 합니다. 해결방법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잠긴 문은 반드시 그에 맞는 열쇠가 있어야 자물쇠를 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바로 알아 바른 약 처방을 내리려 한다면 때로는 약간의 인연과, 때로는 약간의 시간과, 때로는 약간의 인사人事가 필요합니다. 저는 문제해결을 관리하는 데 있어, 이제까지 절대 금전을 사용하지 않고 항상 지혜를 활용해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것은 관리학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학문에 해당합니다.
저는 타이베이에서 왔소! 민국 44년(1955), 우리 이란 염불회의 홍법대는 포교를 하러 화롄(花蓮)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과거 중국 본토에서도 밖으로 나가 불교를 선전하고,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등의 선전 활동도 했었습니다. 당시 화롄에 처음 도착한 우리는 현지 사정에 어두웠습니다. 저는 포교할 넓은 장소를 봐두고, 삼륜차 하나를 빌려 확성기를 들고 방송을 했습니다. 방송 멘트도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어르신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의 불교가 왔습니다. 우리들의 불교가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 7시 반에 모 광장에서 모 스님이 노래와 이야기를 곁들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실 것입니다. 많이 오셔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말을 다 하고 나니, 화롄 경찰국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우리 팀을 찾아와 우리 앞에서 대놓고 고함을 쳤습니다.
“누가 화롄에 와서 보고도 하지 않고 집회를 열어 종교 활동을 하는 것입니까?”
모든 단원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바로 접니다!”
상대방은 저를 보자마자 소리쳤습니다.
“저와 함께 경찰국으로 갑시다.”
경찰국에 도착하자 한 경찰이 물었습니다.
“신청도 하지 않고 어떻게 계엄 기간 중에 화롄에 와서 집회를 열고 불교를 홍보할 생각을 다 합니까?” “경찰 양반! 미안합니다. 저는 타이베이에서 왔습니다. 타이에이에서는 이곳저곳 다니며 불법을 홍보해도 보고를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화롄도 타이완의 한 지방이지, 다른 나라도 아니라는 생각에서 신청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당시 타이베이라는 이 단어는 수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화롄처럼 변두리에 치우친 지역에 있어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타이베이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그는 제 뒷배가 어떤지 몰라 약간 망설이는 듯했습니다. 그가 잠시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습니다.
“그럼 교통과 안전에 주의해 주시고, 다음에 올 때는 꼭 신고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날의 포교는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마쳤습니다. 사실 저는 그를 위협하거나 으름장을 놓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무의식중에 “저는 타이베이에서 왔습니다”라는 말을 하긴 했어도, 제가 전에 타이베이에서 여러 차례 포교를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포교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한 데다 실내집회라면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으니 타이베이는 참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시골인 화롄에 오자 사정은 또 달라졌습니다. 그곳은 광장이었고, 당시는 아직 개방되지 않았던 때라 집회를 하고 싶어도 조금 곤란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타이베이가 저의 뒷배가 되어 주자, 경찰 또한 이리저리 고심하며 저와 타협하여 그날의 홍법강연 활동을 잘 마무리하도록 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리를 하려면, 첫째는 타인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갖고, 둘째는 자신의 입장을 성실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가운데 생각지도 못했던 효과가 나타납니다. 특히 문제에 직면했을 때, 병에 맞는 약을 처방하듯이 상대방의 의심과 염려를 없애고 안심할 수 있게 해주면 안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관리의 문제 측면에서 이것도 모두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오신날 가두행진을 '영불迎佛’로 고치다
저는 타이완 이주 초기부터 경찰과의 왕래에 매우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민국 45년(1956) 즈음, 부처님오신날을 경축하고, 불교의 명호가 널리 퍼지길 서원하며 이란에서 부처님오신날 거리행진을 봉행하고자 했습니다. 계엄 기간 중 거리행진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니 먼저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제가 직접 경찰국장을 찾아갔습니다. 가두행진을 신청하겠다는 제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말했습니다.
“이런! 신청하러 오지 않았으면 그래도 거리행진을 할 수도 있었겠는데, 지금 오셔서 정식으로 신청하셔도 계엄 기간 중에 제가 어떻게 거리행진을 허락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대중을 모아서도 안 되고 거리행진도 안 됩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장례행렬도 거리를 행진하는데 그들은 괜찮고요?” “그들은 신청하지 않고, 기리에서 잠깐 걷는 것뿐이잖습니까?” “그럼 저도 지금 잠깐 걷는 것뿐이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안 됩니다. 이미 제게 알려 주셨고, 이미 신청도 하셨잖아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꼼꼼하지 못했음을 느끼고, 부처님오신날 가두행진 계획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다음 해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여전히 부처님오신날 가두행진을 봉행하여, 사회에서 불교의 위상을 넓혀 나갈 생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란은 모두 48개의 리里가 있었는데, 저는 이 ‘리’마다 염불반을 총 48개 설립했습니다. 염불반 안에 다시 광명반·보리반·자비반 등의 학급이 있었는데, 저는 학급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 화차花車를 만들어 거리를 행진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모두들 ‘돈과 몸을 쓰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꽃으로 장엄한 화차로 가두행진을 하다니, 화자가 대체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택시가 아직 없을 때라 저는 삼륜자전거, 작은 손수레, 짐 운반 수레 등을 꽃으로 장엄한 화차로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저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리’와 다른 ‘학급’과 영예를 놓고 경합하다 보니, 나중에는 가족들까지 하나둘씩 참여하면서 온 식구들을 총종원하며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란 시 인구는 겨우 5만이었지만, 그날의 가두행진은 순식간에 3만 명이 넘게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며 이란시 전체를 들썩이게 했습니다. 모든 거리의 골목골목까지도 행인을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큰길인 중산로 중산로中山路만 가두행진을 보기 위해 군중이 집중되었습니다. 경찰도 수많은 인파를 보고, 금지시키기는 못하고 질서유지를 도와줄 뿐이었습니다. 저는 경찰국장의 말대로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두행진이라 하지 않고 부처님을 맞이하는 ‘영불迎佛’이라 했습니다. 제가 영불의 깃발을 높이 들었기에 아무 일 없이 평안하며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사람과 일에 관한 관리에 있어서 대립하지 말고 말투를 부드럽게 하고, 태도를 부드럽게 하고, 일처리를 부드럽게 하는 등 때로는 조금 완화할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대중의 역량을 잘 활용하면 능히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안전 기관과의 왕래에 있어서도 대책에 맞게 응대하고 평화롭게 처리한다면 안전하게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