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가오슝의 신도들이 계속해서 남부 지역 홍법을 요청해 왔습니다. 당초 남부에 건립한 가오슝 불교당은 이미 월기 스님에게 주지 소임을 넘겼기 때문에 제게는 홍법을 펼칠 근거지가 없었습니다. 28명의 신도들은 자발적으로 힘을 모아 신도위원회를 설립, 가오슝 수산공원 입구 앞의 작은 땅을 매입했습니다. 그곳은 원래 호텔을 지을 부지였고 공사도 이미 진행 중이었지만, 신도들은 그들에게 더 이상 공사 진행을 하지 말고, 이곳에 불교사찰을 짓고 불법을 널리 알리는 도량으로 사용하려 하니 팔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가오슝 사람들은 참 신앙심도 깊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여 절반 정도 지은 호텔을 반은 선물하다시피 불교도량을 짓게 넘겨주었습니다. 수산공원과 인접해 있던 관계로 저는 ‘수산사壽山寺’라 이름 지었습니다. 수산사 건물은 5층으로, 최고층은 정자지붕처럼 만들어 종교적인 건축물임을 나타냈습니다. 완공 후 수산공원 위에 있던 본부, 즉 가오슝 요새사령부에서 갑자기 수산사의 4층과 5층 건물을 없애라는 공문을 가오슝시에 전달했습니다. 이유인즉, 건물의 층고가 너무 높아 자신들이 해상의 목표물을 감시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군대의 의견이 최우선이던 시기였습니다. 민간의 어떠한 진정서도 군대 측에서 ‘군사가 우선이다’ 하면 어떠한 이유를 대어도 아랑곳없이 오직 군대의 의견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뒤바뀔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산사 해체의 공문은 우리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고, 신도들도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모두들 시청으로 달려가 정원해 보자고 입을 모았지만, 저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하며 달랬습니다. 저는 직접 시청 민정국을 찾아가 청원해 봐야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국방안전에 입각한 이유였으니 직접 요새사령부에다가 소통하고 호소해야만 비교적 효과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당초 우리가 건설하면서 요새사령부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도 해체하라며 우리와 상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서 신분증을 지참하고 수산공원 입구에서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10분도 안 되어 요새사령부에 도착했습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안전요원에게 신분증을 넘겨주며 “저는 산 아래 수산사의 주지입니다. 들어가 담당자와 협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경비병은 제 이름을 적은 뒤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저는 온 목적을 설명했습니다.
“저는 수산사 주지인데, 수산사 해체를 담당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자신이 담당자라 말한 상교(上校: 대령) 계급을 단 사람이 저를 탁자로 안내한 뒤, 앉자마자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국방에 필요한 경우, 고층의 건물은 우리가 해상의 목표물을 감시하는 데 불리한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부득이 해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교님! 수산사는 시에 등록된 합법적인 건물입니다. 이제 요새사령부에서 수산사 건물의 고층을 해체하고 싶다니, 저는 이것에 대해서 상관없습니다. 저는 출가자이고 사해가 모두 저의 집이니, 이곳에서 머물 수 없다면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사찰을 해체하는 여러분들의 처리 방법에 대해서는 제 의견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사찰을 해체할 때 만일 어떤 기자가 사진이라도 찍어 신문의 국제면에 싣는다면, 타이완이 아직도 종교를 파괴하고 사찰을 부수는 나라라는 식으로 국제사회에 선전된다면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 주 남베트남에서 정변이 일어난 것은 상교님도 아시지요? 남베트남의 응 오딘 지엠 대통령(1901~1963. 남베트남의 정치인. 1963년 11월 즈엉 반 민 장군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정권은 무너지고, 피습 후 병원으로 이송 도중 동생 응 오딘 누와 함께 처형됨)이 불교의 깃발을 내걸기를 불허한다 해서 불교신자들이 시위와 행진을 벌였고, 결국 남베트남 정부를 뒤집어엎었습니다. 응 오딘 지엠 대통령도 화를 당해 살해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수산사는 가오슝의 많은 이들이 출자하여 건축한 것인데, 만일 반드시 절을 부수겠다면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뒷일이 어떻게 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가 찾아온 것은 여러분께 사찰을 부수지 말라고 청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안전 수호와 국방의 평안을 수호한다는 입장에서 여러분들께 약간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온 것입니다.”
제 말을 들은 상교는 도리어 어쩔 줄 몰라 제게 되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수산사의 높이 초과가 사실은 너무 높지 않은데다 별로 심각한 문제도 아니니, 부수지 말라는 공문서를 다시 시당국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즉시 그는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대로요.”라고 하였고, 저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나운 파도와 하늘 가득 끼었던 먹구름은 이렇게 연기처럼 사라지며 쉽게 문제가 해결되었고, 수산사도 온전하게 유지되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수산사에서 건립한 불교대학은 가오슝 최초의 제 홍법도량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 뒤 저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익과 입장에서 상대방 대신 생각해야 비교적 쉽게 문제를 해결하고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체 관리, 일체 사물의 왕래에 항상 타인을 위한 배리가 있다면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저는 이것도 관리학 면에서 매우 중요하고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