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불광산사 제1대 개산조사인 성운星雲 대사께서 2월 5일 오후 5시 불광산 전등루에서 법납 82세, 세납 97세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대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세계적 고승인 성운 대사는 1949년 장제스 국민당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건너와 1967년 불광사를 창건하고 평생 교육과 포교 활동에 힘썼습니다. 대만 불광대학과 남화대학, 미국 LA서래대학 등 5개 대학을 설립하고 전 세계에 16곳의 불학원과 200여 개의 사찰을 세웠습니다. 영결식은 2월 13일 오전 9시 대만 불광산사에서 봉행됐습니다. 서울 불광산사(주지 의은 스님)는 보도자료를 통해 “임제종 제48대 불광산사 창건 성운 대사 입적 찬송식(영결식)에 이날 새벽 6시부터 국내외에서 온 사람들이 불광산사로 몰려들었고, 영결식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어 5개 대륙의 신자들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도록 했으며, 특히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현장에 직접 찾아와 큰스님의 공로를 가상하여 표창했다.”고 전했습니다. 성운 대사의 왕생극락을 발원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교육이 발전하려면 정책이 있어야 하고, 교육에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려면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설립 초기에 건학 교육은 불광산을 ‘빈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기했습니다. ‘빈곤’은 불광산 제자들이 수행하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빈곤하기에 모두 향상하고자 분발하고, 근면하게 노력하고, 나태하지 않고 정진하며, 높은 목표를 위해 힘쓰고, 발심하여 사찰을 더욱 빛낼 것입니다.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란 자오시향(礁溪鄕)의 향장 진덕치陳德治 선생이 “자오시향에 부지가 있는데 대학 설립을 하시겠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60헥타르 정도 되는데 2억 원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으니, 스님께서 부지를 매입하면 학교를 설립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북쪽에 불광대학이 있고, 남쪽에 불광산이 있으니 이것도 괜찮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정대로 진 향장이 이야기했던 그 부지를 살펴보러 갔습니다. 그곳은 숲이 우거지고 잡초가 무성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구분할 수가 없는 산비탈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좋고 나쁘고 상관하지 않고 일단은 매입하고, 나중에 다시 어떻게 해보자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억을 들여 60헥타르의 산림을 받았으니 지금의 불광대학 소재지입니다. 당시 타이완은 산비탈 지역의 관리, 수토水土 보존 등의 조례가 매우 많고 엄격했습니다. 저는 자그마치 10년의 시간과 10억 원 넘게 지출하며 수토 보존 및 대지 공사를 진행하고, 배수로와 교량 건설 등을 했습니다. 정부는 줄곧 지상건물을 세우는 심사에서 통과시켜 주지 않아 지상에는 기와 하나 벽돌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대학을 세운다는 소리가 전해지자 사람들은 끊임없이 “대학이 어디 있어요? 대학은요?” 하고 질문했습니다. 대꾸할 힘도 없고, 대답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과거 르웨광(日月光) 그룹의 설립자인 장요굉영張姚宏影 여사가 5천만 원을 대학 설립에 쓰라고 내준 적이 있었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안 됩니다. 제가 대학을 설립하면 그때 받겠습니다.” “안 될 말씀입니다. 그때 가서 제가 돈이 없으면 어떻게 드립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돈은 기부해 주셨는데, 제가 대학을 여전히 설립하지 못하고, 그때 가서 대학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제가 뭐라 말씀드리겠습니까? 그러니 당신의 성의는 제가 학교를 설립할 때 받을까 합니다.”
물러나지 않다
1996년 마침 황중천黃中天 선생이 자이(嘉義)에 남화공학 단과대학을 세우겠다고 교육부에 신청서를 제출했고, 이미 건설허가 등기증명까지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제가 가서 학교만 건설하면 바로 수업을 할 수 있다며 제게 양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북부의 불광대학은 환경보호를 위한 행정신청을 천천히 진행하고, 50헥타르 정도 되는데다 이미 허가증이 있는 남화의 이 부지를 인수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부지 옆에 일부 있었던 농지도 불광산 명의로 우선 매입했고, 장차 대학에서 필요하다면 다시 대학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화대학을 인수하는 데 서명했습니다. 인수한 시점이 마침 설 전후라, 우리는 곧바로 다시 교육부에 대학생 모집을 신청하였으며, 같은 해 가을에 개학(타이완의 새 학년은 9월에 시작된다)하여 수업을 시작할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한꺼번에 대학 두 곳을 설립했습니다. 그때에는 정말 준비하는 데 매우 힘들었습니다. 당시 교육부에 가을 학기 학생모집 신청을 하자 곧바로 차장이 시찰을 나왔습니다.
“여기에 교실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데 9월에 학기를 시작 한다니, 꿈도 참 야무지십니다.” “차장님! 우리 신청을 비준해 주시기만 하면, 학교건물의 건축 및 9월 학기 학생모집까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학교부지가 있고 학교건물도 건축을 시작했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적합한 총장 인선이 시급했습니다. 공붕정龔鵬程 당시 중국위원회 문교처 처장을 소개받았는데 우수한 인재라고 했습니다. 저는 듣기는 했어도 그를 모르는지라,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남화대학의 총장직을 맡아주시겠냐고 청했습니다. 이런 저의 청에 그도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화로 총장인선을 결정지었습니다. 한편으로 제 마음에는 자격을 갖춘 교수를 구하기 어렵지만, 수많은 교수가 오더라도 학교설립에 관한 저의 이념을 모두가 다 이해하고 찬성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붕정 교수에게 먼저 소규모 대학원부터 설립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해 9월 남화대학의 교사동·교실·도서관 등 대학에서 필요한 기초적인 규모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저는 당시 부총통 연전連戰 선생의 부인이신 연방우連方瑀 여사께 개교 테이프 커팅을 부탁드렸습니다. 드디어 남화대학이 먼저 개학함으로써 오매불망 기다리며 대학 설립에 도움을 주신 신도와 공덕주, ‘백만인홍학위원회百萬人興學委員會’에게 제가 약간이나마 보답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특히 한 마음으로 불교를 위해 대학을 설립하고 싶었지만, 불광대학의 건설이 요원하기만 하고 줄곧 수토 보존 문제로 행정상에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던지라, 이런 기회가 생겼으니 먼저 남화대학을 설립한다면 사회와 신도, 교육에 뜻을 지니고 학교설립을 도와주신 여러 공덕주들께 약속드렸던 바를 조금이라도 돌려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평생 신용을 강조하고 물러나지 않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에서 함께 일하고 노력한 사람에게는 신뢰를 주고, 관리에 있어서는 ‘신용’이 중요하다 생각해 왔습니다. 대학 설립 후 운영을 시작하자 학생 모집·재무·관리 등 이른바 ‘7가지 대사大事’가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자이현 다린진(大林鎭)에 자리한 남화대학은 멀고 외지고, 구불구불한 도로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오려면 교통이 불편했습니다. 당시 학생이 모집되기만을 바라며, 저는 남화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4년간 학비와 기타 잡비를 받지 않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저의 학교가 문을 열고, 성장해 나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훌륭한 벗인 고희균 교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학은 구호 단체가 아니니, 학교의 질을 높이는 데 더 신경 쓰고, 학비와 잡비는 그대로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말을 뱉은 상태니, 저는 신용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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