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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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캠퍼스로 들어가야 한다 ②
교육이 발전하려면 정책이 있어야 하고, 교육에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려면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설립 초기에 건학 교육은 불광산을 ‘빈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기했습니다. ‘빈곤’은 불광산 제자들이 수행하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빈곤하기에 모두 향상하고자 분발하고, 근면하게 노력하고, 나태하지 않고 정진하며, 높은 목표를 위해 힘쓰고, 발심하여 사찰을 더욱 빛낼 것입니다.

물론 타이완대학에서 강연하겠다는 소망을 줄곧 잊지 않고 있었던 저는 2004년이 되어 타이완대학 정치학과 장아중張亞中 교수의 초청으로 타이완대학 법학원에서 ‘선문의 자각교육’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2010년에는 당시 타이완대학의 총장이신 이사잠李嗣涔 박사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에게 ‘나의 학사學思 과정’에 대해 강연하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제 강의를 들었습니다.
당시 “저의 70여 년 인생에서 타이완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보고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니 마음 깊이 커다란 영광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일생의 학사學思 과정은 사찰에서 이뤄졌던 전통적인 교육이 전부였지만, 마음은 더 넓고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팔십에 가까운 인생을 몇 마디 말로 이야 기하기는 어렵기에 저는 10년을 한 시기로 잡아 다음과 같이 정리 하였습니다.

첫 번째 10년은 1세에서 10세까지로 ‘성장 시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두 번째 10년은 10세에서 20세까지로 ‘학습 시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세 번째 10년은 20세에서 30세까지로 ‘참학 시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네 번째 10년은 30세에서 40세까지로 ‘문학 시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다섯 번째 10년은 40세에서 50세까지로 ‘역사 시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여섯 번째 10년은 50세에서 60세까지로 ‘철학 시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일곱 번째 10년은 60세에서 70세까지로 ‘윤리 시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여덟 번째 10년은 70세에서 80세까 지로 ‘불학 시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이렇게 여덟 단계로 나눴으며 모든 시기가 제게 깨달음을 주고 얻은 바도 많았지만, 저의 학사 과정은 분명히 이런 상태로 천천히 발전했습니다.
타이완대학에서 가진 이 강연을 전후하여 다른 대학에서도 강연을 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문화대학에서도 저를 초빙하여 인도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기도 했고, 타이중의 동해대학에서는 저를 인문학과의 객원교수로 초빙도 하였습니다. 저는 불법이 곧 캠퍼스로 들어갈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의 분위기는 교육계를 향한 ‘불교 관리’의 일정한 계획과 방침이 서 있지 않았으며, 사찰에서의 행사만 중시하고 ‘교육계’라는 카테고리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사찰이 곧 총림이었습니다. 총림은 본래 학교입니다. 고대로부터 사찰에서 공부한 문인학자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유협劉勰·소명태자昭明太子·유우석劉禹錫·범중엄范仲淹·여몽정呂蒙正·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왕양명王陽明 등과 같은 이가 바로 그들입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양수명(梁漱溟, 1893~1988)·조박초(趙樸初, 1907~2000) 등 걸출한 인사들이 사찰의 장경루를 빌려 공부하였지만, 출가승에게 의탁하여 스승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사찰에서 공부하고 공명을 얻은 뒤에 관직에 나가 승승장구하였지만, 불교와 왕래하면서 출가자를 방외지교方外之交로 삼았습니다. 많은 교수들께 저와 방외지교를 맺은 인연으로 저는 다시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건학의 초보적인 관리 형태에 대해서 제 마음에는 이미 계획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정부에 학교를 설립하겠으니 허락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장경국 총통 앞에서도 불교를 위한 대학을 하나 설립하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보인輔仁대학, 동해東海대학, 중원中原대학, 동오東吳대학, 정의靜宜대학 등 기독교나 천주교 모두 대학을 설립하였는데, 불교신앙 인구가 가장 많은 타이완에 불교에서 세운 대학 하나 없다는 것은 전 세계 화인華人의 마음을 하나로 이끄는 데 아픈 손가락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일 불교에서 대학을 설립하면 화인의 자녀가 해외에서 돌아와 수학할 수 있으니, 이것은 국가로 볼 때 커다란 이익이자 플러스 요인이 됩니다.
그러나 장경국 선생은 제 의견을 듣고도 어떠한 회신도 없었으니, 불교에서 교육기관 설립은 여전히 어렵다 생각했습니다. 그때 정부 교육청은 자주 불광산에서 각종 교육 활동을 개최하거나 또는 교장 초청회의 등을 열었지만, 저는 늘 기꺼운 마음으로 불광산의 전각이나 적합한 장소를 그들이 사용하게 내어주었습니다. 또한 조산회관에서 그들이 숙식할 수 있도록 제공해 주니, 그들은 여기를 항상 학술회의 하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이러한 관계 덕분에 저는 진탁민陳倬民 교육청장과 알게 되었고, 불교를 위해 대학을 설립하고 싶다는 우리의 생각을 그에게 꺼냈지만, 그는 듣고 난 뒤 아무 말 없이 돌아갔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그가 또다시 불광산을 방문 했을 때 저는 다시 대학 설립 추진을 꺼냈습니다.

“제가 이미 대학 설립 인가를 내주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저는 대학 설립 허가 동의서를 전혀 받은 적이 없습니다.”
“화범대학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비준했어요!”
“아! 그것은 소운曉雲 스님입니다.”
“아이고! 제가 소운 스님을 스님으로 착각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 역시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습니다.

학교 부지 개간
교육부에서 사립대학 설립을 제한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학 설립의 꿈은 또다시 멈춰야 했습니다. 개산한 뒤 9년 째, 그러니까 1977년에 불광산은 보문고등학교를 세웠지만 저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고, 불교를 위해 반드시 대학을 세우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 뒤에 민간에서 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정부가 다시 규제를 풀자, 저는 이번이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교육부에서도 먼저 학교 이름을 정하는 것에 동의했기에 저는 ‘불광대학’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원래 저는 가오슝에 대학을 설립하려 했습니다. 당시 가오슝현의 전 현장이신 여진월영余陳月瑛 여사께서 우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부지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녀는 설날에도 쉬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와 함께 가오슝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부지를 물색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가오슝현 의회 의장과 의원 모두를 불광산으로 초대해 가오슝에 대학을 설립하는데 동의와 협조를 이끌어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당시 의장이신 오주혜吳珠惠 씨는 제게 말했습니다.

“현재 학교 설립을 위한 부지를 찾는다 해도, 정부의 협조나 보조가 없으면 모두 직접 구입해야 합니다.”
“구입은 문제가 안 되는데 제가 살 수 있는 부지가 어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런우(仁武)에 있습니다. 지금의 노인 인애의 집 부근(현 국립가오슝 제1과학대학 부지 근처)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토지 한 평의 시세가 3만 원이나 간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산비탈의 그 땅이 한 평에 3만 원이라니…. 대학을 설립하자면 적어도 30헥타르의 토지는 필요한데, 그러나 제 계산으로는 전 재산을 쏟아 붓고 불광산까지 팔아도 대학의 절반 토지도 살 수 없었습니다. 대학 설립의 희망이 또다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