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발전하려면 정책이 있어야 하고, 교육에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려면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설립 초기에 건학 교육은 불광산을 ‘빈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기했습니다. ‘빈곤’은 불광산 제자들이 수행하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빈곤하기에 모두 향상하고자 분발하고, 근면하게 노력하고, 나태하지 않고 정진하며, 높은 목표를 위해 힘쓰고, 발심하여 사찰을 더욱 빛낼 것입니다.
들어가는 말 청소년 시절에 저는 난징(南京)의 서하사에 있었는데, 당시 사찰은 너무나 폐쇄적이라 신도나 외부인과의 접촉이 드물었습니다. 20세 전까지의 저는 생활이 불안정했고, 어릴 때부터 사찰 생활을 시작해서 학교를 본 적도 없고, 학교가 어떤 모습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에는 장차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세우겠다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당시 우리는 일상에서 볼 신문도 없었고, 사실상 우리에게 신문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연찮게 길가에서 오래전 신문지 하나를 주웠을 때, 신문의 전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저는 신문사를 하나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외부인과 접촉하기도 힘든 폐쇄적인 총림사원 안에서 대학과 신문사를 설립할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이러한 인연을 보면 인생을 가둬놓은 것은 소용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연은 정신과 마음과 허공 속에서 돌아다니며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건학建學 21세 되던 해에 저는 제 인생의 첫 소임을 맡았습니다. 저의 조정祖庭이 있는 강소의 이싱(宜興) 대각사大覺寺 부근에 ‘백탑白塔’이라는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이싱 교육국에 있던 임任씨 성을 가진 국장께서 난징에서 온 저를 보시고 이 초등학교의 교장을 맡겼습니다. 저는 당연히 학교를 어떻게 꾸려 나가는지도 몰랐지만 기회는 왔을 때 잡으라고, 저는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일단 말기로 했는데, 그러고서 2년 가까이 해왔습니다. 그 뒤 승려구호대를 따라 타이완에 왔습니다. 타이완에서는 교육이 한창 발전해 나가는 시기임을 알고 마음속으로는 이 젊은 학생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까지 완전한 교육체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산중 사찰에서 독경·예불·참선·사유만 하던 우리 젊은 승려들은 전쟁의 불길을 근심하던 시대에 교육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 많은 장로들이 들려주는 이런저런 인물 이야기나 총림의 기담奇譚만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육 성장 배경 하에서 저는 사회의 정규 학교교육에 대해 매우 부러워하며 동경을 했습니다. 18세 때 중일전쟁이 끝나고 국민당 정부는 난징으로 복귀하였고, 많은 교수가 중경에서 정부를 따라 난징으로 왔는데, 대부분 서하산에 머물면서 파견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그 중에 저와 대화를 나누던 교수가 한 분 계셨는데, 제게 “교육대학에 와서 공부해도 된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학력도 없고 졸업장도 없으며 초중고에 다녀본 적도 없고, 학교를 본 적도 접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며, 이 서하산 속에서의 생활이 거의 전부인데 어떻게 교육대학에 가느냐고 솔직하게 교수에게 설명했습니다. 교수님은 교수 몇 분을 모아 공동추천하면 정식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교수님의 의견을 은사 스님이신 지개상인志開上人에게 보고했습니다. 저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은사스님께서는 “무슨, 대학으로 가서 공부할 생각을 하느냐!”며 그 자리에서 호되게 질책하셨습니다. 저도 은사스님의 말씀을 따라 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타이완에 도착한 뒤로는 이란에서 젊은이들·교사들과 왕래하고 공부했습니다. 심지어 사찰에서도 문예반과 문리보습반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제게 다시 건학의 의지가 생겨나게 했습니다. 불법을 널리 알리려면 불교에도 반드시 교육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인생잡지』의 주관과 『각세순간』의 총 편집을 맡는 등 문화 영역에 다소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화에 그럴 역량이 있고 문화가 포교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문화 방면의 교육인재를 배출해야 역량을 발휘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계엄이 존재하던 그 시기에 문화교육 홍법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사회의 학교와 왕래하는 관계가 되길 희망했습니다.
난관 돌파 당시 이란 출신의 젊은 학생 정수웅 군은 타이베이 사범전문대학(현재의 국립타이베이교육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모임을 결성하고 게게 학교로 강연을 요청했습니다. 강연 주제도 정하고, 포스터까지 붙여 공지를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내 평생의 희망인 대학교 안에서 불법을 강연하게 되는구나!’ 하며 매우 기쁜 마음으로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강연 당일 이란에서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에 도착해 강연할 학교로 가려는데, 타이베이 기차역에 마중 나온 정수웅 학생이 “스님! 학교에서 출가자의 교내 강연을 허락하지 않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고 기운이 쭉 빠져버렸습니다. 저는 불쾌한 듯 “출가자는 학교에 들어가서 강연을 하면 왜 안 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당시 이 질문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인사 중 누군가 국민당의 당위원회에 가서 ‘성운 스님이 강연하러 캠퍼스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 달라’고 청했다는 것을 저는 후일에야 알았습니다. 이 사건 후 저는 대학교 내에서의 강연은 매정하게끔 인연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고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방법을 열심히 생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일본 도쿄대학의 저명한 미즈노 고겐(水野弘元) 교수를 타이완으로 초청해 강학을 부탁했습니다. 그는 일본 출가자의 한 사람이자 국제사회에서도 유명한 불교 학자였습니다. 저는 타이완대학에 연락하여 “미즈노 고겐이라는 일본 교수가 계신데, 그쪽 대학에서 초빙해 강연을 해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타이완대학에서는 듣자마자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자를 초빙하겠다니 매우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즈노 고겐 교수를 모시고 타이완대학에서 강연을 한 차례 가졌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스님이지만 복장은 늘 현재 재가자들과 비슷하게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을 데려와 타이완대학에서 연설하게 한 저는 속으로 ‘드디어 내가 어려움을 뚫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중요한 사건 덕분에 제 마음은 환희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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