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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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을 군대로 가져가다 ②
저는 그 노비구니 스님이 하는 민남어(閩南語: 중국어 방언 중 하나로, 타이완에서 널리 사용되는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뜻이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그렇습니다”라고 답했고, 노비구니 스님은 다시 자리를 떴습니다.
이렇게 다시 30분 정도 기다렸습니다. 이미 시계가 12시 반이 되었을 무렵에야 노비구니 스님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노비구니 스님은 깨지고 오래된 잔에 따뜻한 물을 담아 제게 건네주었고, 저도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다시 1시가 다 되어갈 때까지 기다리니, 노비구니 스님이 제게 점심공양을 하라고 불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국
자는 양철로 만들었는데, 재질이 너무 가벼워 바람이라도 휙 불면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고, 탁자는 두 개의 목판을 붙여놓은 것으로 중간에 3cm 정도의 틈새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란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고, 불교에는 인재가 없었으며, 사찰은 설비가 부족했으니 아마 이와 같은 일들이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공양을 마치고 나니, 절 안에는 세면장도 없거니와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말도 통하지 않아 물어볼 수도 없어 20여 분 거리에 있는 기차역까지 걸어가 볼일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밤이 되자, 노비구니 스님이 법당 왼쪽의 작은 방 한 칸에 방부를 들이게 해주었습니다. 안에는 온통 모기와 벌레가 춤을 추었고, 대나무 침대 하나와 재봉틀 한 대가 전부였습니다. 실내에는 전등조차 없었습니다. 저녁 8~9시가 되어서야 몇몇 신도가 법당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그들이 스님이 오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신도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곧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자신들에게 이야기를 들려 달라 했지만 당시 뇌음사에는 탁자나 의자도 없었기에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아, 한학을 조금 연구하신 이결화 거사가 가운데서 다시 만남어로 신도들에게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들어보니 통역이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뇌음사에서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총 20일에 걸쳐 강연했습니다.
당시 생활여건이 너무 열악해 저는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세면장과 화장실조차도 없고, 군대의 권속·아이·남녀 등이 함께 사는데다 비릿한 식물 등 각종 냄새가 섞여 있어, 불당 같지가 않고 군영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독실한 신도들은 타이베이로 돌아온 저를 다시 되돌아오게 만들었고, 이곳 신도들의 성의를 생각해 저는 뇌음사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남기로 하고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란 현지에는 문화라고 할 것은 없었습니다. 학교 몇 곳은 있었지만, 선생님은 수업 외에는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란고등학교와 란양여중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모두 염불회에 참가하겠다며 찾아왔으며, 통신병 학교의 그 많은 장교들까지도 하나둘씩 염불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교육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고, 각종 특기를 가진 인사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문리보습반 개설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정말 여건이 어려웠습니다. 책걸상조차 없이 길에서 수업을 할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란 젊은이의 열정을 보았고, 실제로 자주 그들과 마당의 섬돌에 주저앉아 불법에 대해 토론하거나 모임을 가졌으며, 또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각종 프로그램과 방법 등의 제반사를 상의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대소사를 뇌음사의 복도 또는 마당에서 교류하였습니다. 이 많은 교사와 청년들 중 누구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체적인 경제여건은 사회 전반이 똑같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정식으로 교육부에 입안을 신청해 ‘광화문리보습반光華文理補習班’을 세웠습니다. 전 교육부 훈위회訓委會 상임위원이셨던 정석암鄭石岩 교수가 바로 우리 보습반의 학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제가 이란에 도착한 초기에 많은 교사와 젊은이들과의 관계가 무척 좋았습니다. 제가 불법을 조금 안다는 것이 이러한 인연 짓는 것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불교의 예법, 불교의 역사, 그리고 인간사회에 대한 불교의 공헌, 관념 등을 이야기해 주었고, 그들은 이를 통해 불교에 대한 신심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런 관계 덕분에 이란여중과 란양여중에서는 제게 강연을 요청했습니다.
특히 통신병 학교에 있는 많은 청년들은 모두 외성外省의 호적을 가진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통신 출신으로 물리·교통·광전기·전기·전신 등의 학과에 모두 능통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글쓰기, 회화 등에 재능 있는 젊은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벽에 그림 그리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제가 강설한 ‘문학개론’을 듣고 난 후, 문예반 등에 참가하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란에서의 저의 홍법포교는 점차 발전되어갔습니다.
당시 물질적인 여건은 구비되지 않았지만, 저는 타인과의 소통이 급선무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정성스럽게 대접했고, 친근하게 소통했고,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화하였습니다. 다양한 방면으로 그들을 예우했고 존경했습니다. 저는 주관하는 입장에서 권위·금전·권세 등을 이용해 관계를 얻으려는 것은 적합지 않으며, 보시와 자비·배려·예경·칭찬 등으로 그들에게 자상한 마음을 보여준다면 환난을 함께하는 지음知音과 도반道伴 역시 증가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란에 머물던 시기, 저의 위인 됨을 보고 문단에서 편집을 맡았던 주가준 선생은 후일에 저에 대한 공경과 신뢰가 생겨 『각세覺世』·『금일불교今日佛敎』 등의 잡지 편집까지 도와주었습니다. 그가 우리 잡지 편집에 있어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덕분에 타이완 전체의 출판물 편집 역시 함께 변모하였으니, 예술적 가치가 더 높은 방향으로 발전한 것은 그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구국단의 『유사幼獅』에서도 그에게 편집장을 맡겨왔습니다. 그의 성실, 작가를 아끼는 마음, 예문藝文에 대한 열정이 그를 당시 타이완 문단의 중요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또 양용박楊勇薄 거사는 제게 좋은 불교 노래를 몇 곡 지어주었습니다. 이외에도 구덕감裘德鑑대령, 곽언상郭言上 대령 등은 모두 군대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인데도 저를 도와 이런저런 건설적인 의견들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저는 모두 받아들이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동료와 장교들이 마치 저에 대한 단결심이 더욱 배가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리 측면에서 타인을 중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란에 있을 당시 수많은 교사·군인·청년·아동 심지어 나중에 설립한 유치원까지 저는 사회봉사와 단체관리에 대한 기본 강령들을 이미 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으로써 그들을 섭수하고 ‘불법’으로써 그들에게 발심이 뭔지를 인지시키고, 존중받게 하고, 관심을 가지고 대하고, 예외로써 사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되 너무 유치하면 안 되고, 말은 저들이 탄복하게 만들어야 하고, 당신이 그들의 스승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게 해줘야 저들이 당신의 ‘관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