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도 생활을 영위하고 돼지, 소 등 가축도 생활을 영위하며 곤충이나 동물 등도 나름의 생활을 영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 ‘생활의 멋’은 서로 다릅니다. 먹고 마시며 노는 것이 ‘생활의 멋’인 사람이 있으며,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나와 남, 시비(是非) 사이에서 맴도는 것이 남들과 다른 ‘생활의 멋’인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양한 생활의 멋이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취해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인간의 생활에 있어 예술적 생활의 멋과 인류에 봉사하는 멋, 그리고 여가활동을 즐기는 ‘생활의 멋’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산으로 강으로 놀러 다니거나 화초를 재배하는 것으로 인생의 멋을 삼고, 어떤 사람은 독서나 글을 짓고 영재를 길러내는 것을 ‘생활의 멋’이라 여깁니다. 전국시대 4군자라 일컬어지던 맹상군(孟嘗君), 신릉군(信陵君) 같은 사람은 현자[賢者]나 뛰어난 인재[賢才]를 널리 불러 모으는 것을 ‘생활의 멋’으로 삼았습니다. 송나라 시대 임포(賃鋪)는 서호의 고산(西湖孤山)에 은거하면서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지식 삼아 풍류를 즐겼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 불렀습니다. 당나라 때 대매산(大梅山)의 법상선사(法商禪師)는 풀잎으로 옷을 짓고 나무껍질을 먹으며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그들은 모두 기품이 고아한 은둔자적 ‘생활의 멋’을 이룩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작가는 자신이 쓴 저서 『구주풍광 歐洲風光)』에서 ‘룩셈부르크에서 일하는 것이 제일 좋고(임금이 가장 높음), 독일산 자동차를 운전하고, 영국에 집을 사놓고(시설설비가 가장 완벽함), 포르투갈에 살며(기후가 제일 좋음), 프랑스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는 것이야말로(평균수명이 가장 길다) 인생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향락과 부유함만을 추구하는 삶은 필요가 없습니다. 금전의 노예가 되는 삶이어서는 아니 되며, 생활의 정취를 더하고, 생활의 멋을 향상시키는 삶이어야 합니다. 시간이 되어 매일 30분 정도씩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 고요 속에서 ‘생활의 멋’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끔 친구와 바둑이나 카드놀이를 한다거나, 적수방(摘水坊)에서 차를 즐기며 한담을 하는 것 역시 ‘생활의 멋’을 한껏 높일 수 있습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관람하거나 독서회나 법회에 참가하여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기도문[祈禱文]을 읽거나 고찰(古刹)의 종소리를 듣거나 하는 것도 ‘생활의 멋’을 높일 수 있습니다. 사원을 참배하거나 봉사를 하고, 거리를 쓴다거나 병원에서 도우미로써 봉사하며 사랑하는 마음의 대열에 참가하는 것 모두 ‘생활의 멋’을 증장시키는 행동입니다. 친구 서넛과 교외로 나들이를 가는 것도 ‘생활의 멋’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꽃처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며, 산과 물처럼 사람들과 함께 즐기며, 다리처럼 사람들을 연결해 주며, 나무그늘처럼 사람들을 서늘하게 해주며, 맛좋은 샘처럼 사람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듯, 특히 나 자신을 일 또는 대자연 속에 녹아들게 할 수 있다면 나부터 생명의 가치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생활의 멋’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