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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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관념
일부 이교도가 불교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늘 비난해 왔습니다. 정말 맞습니다. 불교는 우상 숭배를 배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에게 성현에 대한 우상 관념을 가지기를 장려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만약 우상이 없다면 어떻게 ‘어진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와 같이 하려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상, 많은 성현과 훌륭한 임금님은 우리의 우상입니다. 충신과 의사義士 역시 우리의 우상이며, 부모님과 스승, 웃어른, 덕과 학식이 있는 친구조차 모두 우리의 우상입니다. 만약 이런 많은 우상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를 본받으며 우리의 목표는 어디입니까?
불상佛像을 뵙게 되면 엎드려 절하고, 예수의 십자가를 보아도 우리는 찬미합니다. 우상은 아름다운 것이며 우상이 신앙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청소년은 사회 지도자에 대한 숭배가 부족하고, 성현에 대한 우상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멋대로 나쁜 짓을 서슴없이 하면서 스스로를 방임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로 자신의 미래를 성취할 수 있을까요?
우상관념은 사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천 한 조각으로 만든 국기를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천 한 조각이 아니라 나의 나라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땔감으로 쓸 나무 한 조각도 선조의 위패를 만들었다면 나는 또 그것을 모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국기를 만든 천 한 조각이 몹시 낡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밀 것입니다. 능라주단 조각이라도 옷을 만들 수 없다면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옷감이지만 모자를 만들면 머리 위에 쓰게 되고 신발을 만들면 발에 신습니다. 모자를 만드느냐 신발을 만드느냐에 따라 내 마음속 귀천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불교는 세간 법에 따라 내 마음속 귀천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불교는 세간 법에 따르며 인간은 우상 숭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일의제第一義諦의 교의敎義에는 우상관념이 없습니다. 강을 건너기 전에는 배나 뗏목이 필요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면 배를 짊어지고 길을 갈 필요가 없으므로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 단하선사丹霞禪師가 낙양洛陽 혜림사惠林寺에 행각승으로 머물 때, 날씨가 너무 추워서 목불을 가져다 군불을 땠습니다.
이에 주지 스님이 이를 보고 매우 화를 내며 왜 불상을 태우느냐고 꾸짖었는데, 단하선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불태워 사리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헛소리! 목불木佛에 사리가 어디 있겠는가?”
“사리가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더 가져다 방이나 따뜻하게 데웁시다!”
불상佛像을 보호하는 주지승은 불성佛性을 알지 못하였고, 불상을 태워 사리를 얻으려던 단하선사는 오히려 부처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우상은 바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깥의 우상은 계몽이나 우리 마음속에 우상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이라는 것은 어진 사람의 행동을 보고 닮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우상을 숭배도 하고 우상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우상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