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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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사견
유식唯識에서는 우주 자연은 ‘오직 식識이 나타난 것이요, 마음이 변하여 나타나는 것이다(有識所現, 唯心所變)’고 하였습니다. ‘동일한 사물도 보는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一水四見)’의 논점은 하나의 증거로 삼을 만합니다.
물은 모든 중생이 함께 봅니다. 바다와 강, 계곡에 관계없이 인류가 보기에 그것은 물일뿐입니다. 그러나 천인天人이 보면 물은 유리가 되고, 아귀가 보면 바로 진한 피가 되며, 어류에게는 집이 있는 낙원과 같습니다.
왜 인류가 보는 물을 천인天人이 볼 땐 유리가 되고, 아귀餓鬼가 볼 땐 농혈이 되고, 어류魚類에겐 또 삶의 낙원이 될까요? 이것은 바로 중생 각자의 업감業感이 달라, 인과응보에 수많은 차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에 대해 각자 기호가 다릅니다. 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신맛이 더할 나위 없이 향기롭고 달다 느끼지만, 신 것을 못 먹는 사람에게는 입에 넣기가 힘듭니다. 또 냄새가 아주 특이한 발효두부(臭豆腐)나, 두리안 등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먹고 삼키기도 버겁습니다. 양고기의 노린내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딱 좋은 요리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코를 막고 구토를 합니다. 사람의 대변은 당사자에게는 냄새가 나서 코를 들 수 없을 정도지만, 개에게는 진수성찬으로 보입니다. 중생은 업력이 다르기 때문에 보고 좋아하는 것마다 다르게 느낍니다.
세상의 모든 중생은 모두 다른 성性, 행동, 색色, 사랑과 마음 등을 갖고 있습니다.
학문에서 보자면 어떤 사람은 문학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철학을 특히 좋아하며, 어떤 사람은 예술에 빠져 있고, 어떤 사람은 과학에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주거환경을 선택할 때도 어떤 사람은 산속에 은거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물가에 살기를 좋아하며, 어떤 사람은 전원에 애착을 갖고 어떤 사람은 도시를 동경합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에 분발하고, 어떤 이는 돈을 버는데 필사적이고, 어떤 사람은 정치에 열중하고
어떤 이는 종교에 마음을 쏟습니다. 갖가지 다른 것 중에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일수사견’은 서로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녀에게 요구합니다. 이것은 곧 매운 것을 못 먹는 사람에게 억지로 매운 것을 먹으라 하고, 단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단 것을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도시에서 살기 좋아하는 사람을 억지로 자연과 더불어 살게 한다거나 산림이나 물가에서 살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시에서 생활하라고 하는 것은, 모두 개성과 반대로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억지로 하는 것은, 모두 개성과 반대로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므로 좋은 결과는 자연 얻기 힘듭니다.
어떤 사람은 옷을 중히 여기고 음식을 중시하지 않지만, 어떤 이는 맛있는 음식을 특히 좋아하고 주거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택의 환경에 마음을 쓰지만 음식과 옷의 화려함은 중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문에서는 사람에게 연을 따라 대범하고 호탕하며, 타고난 성질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것을 격려합니다.
각자 자기가 있을 자리를 알고, 개인 성격에 따라 선택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것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