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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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진리
불교의 진리를 두 글자로 표현하면 ‘연기緣起’요, 한 글자로 표현하면 ‘공空’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이 ‘공’이냐고 물으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텔레비전은 원래 아무것도 없지만 스위치를 켜면, 백 여 개의 채널에서 연극과 가무, 세계사, 산과 내, 강물의 흐름이 있어 만물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불광산 도량을 처음 열 당시, 산중의 도처가 가시나무였으며 대나무는 베어도 베어도 다시 무더기로 솟아났습니다. 원래 광활했던 황야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전각들이 들어섰으며, 산중에 경문을 읽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공空 속에 묘유妙有가 생기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일반인들은 ‘공空’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거나 ‘무無’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공空’은 ‘유有’를 이루는 것입니다. 공空이 아니면 아무것도 갖추어 나타나지 못합니다. 찻잔이 비지 않으면 어떻게 차를 담고, 주머니가 비지 않으면 어떻게 돈과 물건을 담겠습니까? 집이 비지 않으면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으며, 땅이 비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공空은 즉 유有이고 유有는 곧 공空’이라고 말합니다.
‘유는 곧 공이다’란, 집은 ‘유’이지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무너지면 ‘공’이 아닌가요?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은 ‘유’이지만 텔레비전을 끄면 ‘공’이 아닌가요? 그러기에 불교에서 ‘공, 유는 둘이 아니다[空有不二]’고 설하는 것입니다.
‘공’의 이치는 우주의 원래 모습이고 ‘공’의 생활이 바로 미묘한 생활입니다. 사람이 만약 ‘공’의 미묘한 생활을 누리고자 하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크게 늘려 ‘허공虛空’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허공은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만물은 허공을 방해해도 전혀 무방합니다. 미륵보살을 묘사한 게송偈頌처럼 말입니다.
큰 배는 능히 받아들여
세간의 얼마나 많은 일을 수용할까?
항상 웃고 있어
인간세상 고금의 시름을 웃을 뿐이네!
우파선나 비구니는 올바른 지혜로 공의 이치[空理]를 증득하여 깨달은 성자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이 스님은 독사에게 물리자 공포스럽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은 기색으로 “나는 공성空性을 깨달은 사람이라서 독사가 나의 몸을 물 수는 있지만 ‘공’을 물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모두에게 말하였습니다.
‘공空’은 우주 만물의 본체이니, 만물에 의해서 망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존은 ‘공의 이치[空理]’에 의존해야 합니다. 콧구멍이 ‘공’해야 호흡할 수 있고 귀가 ‘공’해야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오장육부도 ‘공’해야만 건강할 수 있습니다. ‘공’하지 않으면 생존할 방법이 없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설하길,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 볼 수 있어야, 일체 번뇌의 장애가 없는 것이니, 모든 일을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할 수 있으면 자연히 생각이 끝없이 넓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말을 다하지 못하고, 길을 끝까지 걷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공간을 남겨야만 만회할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비와 지혜만 있으면 ‘모든 것이 실체가 없으면서 건재하는 묘유卯有’가 ‘일체의 색상을 떠난 참으로 공허한 경지인 진공眞空’으로 승화할 수 있고, 마음속에 사회와 대중이 있으면 ‘진공’은 ‘묘유卯有’를 발휘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의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