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의 생활에서 재물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생각해 보면 생활 속에서 입고, 먹고, 살고,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어느 것도 없다. 재물이 생활에 없으면 안 될 존재가 되어 인류는 기꺼이 재물의 노예가 되었다. 인생에서 추구할 것이 어찌 향락과 부귀뿐일까!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생활 속 정취와 생활의 질을 높여야 한다. 집을 청결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생활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매일 열심히 마당을 쓸고, 정리 정돈으로 깨끗하고 안락하게 집안을 꾸미며, 화초와 나무를 가꾼다면 생활의 정취 또한 배가 될 것이다. 가끔 친한 친구 서너 명과 야외로 가벼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타인에게 꽃처럼 기쁨을 주고, 산과 물처럼 즐거움을 주며, 다리처럼 소통의 역할을 하고, 나무그늘처럼 시원하게 해주며, 생물처럼 갈증을 해소시키는 등 자신과 자연이 하나 되어 생명의 가치를 제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생활의 품위이다. 사람도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하고, 소·말·돼지 등의 가축도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곤충이나 동물들도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다. 그러나 생활의 질은 서로 다르다. 현대인들은 유행하는 고급 브랜드의 옷이나 화장품, 심지어 다이어트와 미용 등 자신을 ‘변모’시켜 줄 수 있는 기술자들을 추구한다.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몸가짐, 위엄, 차분한 마음가짐, 자유로움 등이야말로 참다운 아름다움이다.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에서는 “지혜로워 성내는 마음이 없으면, 이를 일러 단정하다 이른다”고 하였다. 자신의 개성, 습관, 관념, 인간 관계를 나쁜 것은 좋게, 착하지 않은 것은 착하게, 바르지 않은 것은 바르게,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게 힘써 바꾸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불법화佛法化된 생활이 인간불교의 생활관이다. 즉 금전이나 애정 말고도 생활에서 자비와 인연, 복을 아끼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관념이 배가되어야 한다. 생활 속에 불법이 녹아들면 금전이나 애정을 가진 것보다 더욱 든든할 것이다.
4. 감정관感情觀 : 정애지도情愛之道 생명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불교의 ‘십이인연十二因緣’에 따르면 생명은 ‘사랑’에서 왔다. 사랑은 생명의 근원이다. “사랑이 깊지 않으면 사바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다(愛不重 不生裟婆)”고 하였으니, 부모가 서로 사랑하고, 내가 부모를 사랑하면 나의 정식情識, 감정과 지식에는 수많은 사랑과 그렇지 않은 씨앗이 남은 채 인간세계에 태어난다. 또한 사랑이 쌓여 삶과 죽음 속에 깊이 가라앉는다. 그러므로 『출요경出曜經』에서는 “사람들은 은혜와 애정에 미혹되어 그 애욕을 끊지 못한다. 이처럼 근심과 욕망이 많아지니, 연못에 물이 흘러 차는 것과 같다”고 일렀다. 사람은 애정에 얽매여 생사를 윤회하게 된다.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기에 ‘유정중생有情衆生’이라 말한다. 올바르지 못한 애정은 밧줄처럼 우리를 속박하며 신심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족쇄처럼 우리를 가두어 잠시도 편안치 못하게 한다. 애정은 맹인처럼 우리를 어둠에 빠뜨리고도 전혀 알지 못하게 하고, 고통의 바다와 같아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다 자멸하게 만든다. 그러나 애정을 정화하면 자비가 되고, 애정을 승화시키면 지혜가 된다. 애정을 자비로 승화시킨다면 “자慈로 성냄을 잠재우고, 비悲로 미움을 멈추게 한다(『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커다란 자비를 이루시어 그 큰 자비의 힘으로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 하였다. 자비는 모든 불보살이 중생을 쉼 없이 제도하는 원동력이다. 이처럼 자비로 사람을 대한다면 추운 겨울 한 줄기 따사로운 햇빛과 같은 사랑으로 꽁꽁 얼어붙은 눈을 녹일 수도 있고, 인성에 감춰진 진선미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누군가를 더욱 분발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애정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비로 감정을 조절하고, 지혜와 이성으로 감정을 정화하며, 예법으로 감정을 규제하고, 반야般若로써 감정을 이끌 것을 권한다. 불교에서는 또 부부 간에 서로 사랑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는 서로 존경하고 이해하며, 친구 간에는 서로의 인연을 아끼라고 권고한다. 더 나아가 ‘무연대자無緣大慈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였듯이, 자신의 사사로운 사랑을 일체 대중에 대한 더 큰 자비로 확대하길 바란다. 부처님께서는 뙤약볕 내리쬐는 길 한가운데 앉아 계시며 조국 카필라 국을 침략하러 가는 비유리 왕毘琉璃王을 저지시켰으며, “일가 친척의 그늘이 그 어떤 그늘보다 좋다”라는 말씀으로 비유리 왕을 감화시켜 군대를 물러서게 하셨다(『증일아함경』 권26). 또한 부처님은 실명한 제자를 보살피고 병이 난 비구를 돌보았으며(『비나야毗奈耶』), 아나율을 위해 옷을 꿰매주셨다(『증일아함경』 권31). 부처님의 『본생담本生譚』에서는 ‘살을 베어 매에게 주어 비둘기 목숨과 바꾸었고, 굶주린 호랑이를 살리기 위해 호랑이 먹이가 됐다’는 일화도 있다.
『대승보요의론大乘寶要義論』에서는 “많은 유정한 중생은 신명(몸과 목숨)에 애착을 낸다. 이 애착으로 인해 널리 죄업을 짓고 악도 가운데에 떨어진다. 만약 다시 유정한 중생이 큰 자비를 일으켜 신명 등에 애착을 내지 않으면, 집착하지 않으므로 선취善趣에 나게 된다. 다시 능히 저 일체 유정중생의 마음을 움직여 널리 보시 등을 행하면 일체 선법善法이 서로 응하여 지어지고, 큰 자비심으로 보살도를 수행하면 그 몸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으며,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여래가 곧 자비희사慈悲喜捨이고, 자비희사가 곧 해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애정을 승화시킨 것이 자비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고, 중생에게 보여주고 가르치며 기쁨을 얻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관세음보살이 커다란 자비와 고난에서 구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당신을 위해 주는 것이다. 사랑하니 원하는 대로 해주고, 존중해주며, 자유와 편리함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착하며, 진실되고, 깨끗하다. 불교의 본질이 바로 이 자비와 정애淨愛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대자비大慈悲 그것이니, 무연자비無緣慈悲로써 모든 중생을 거두시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는 것 같이, 대소변으로 제 몸이 더러워도 깊이 사랑하는 연유로 화내지 않고 또한 그 무지無知를 가엾이 여긴다. 중생에 대한 보살의 마음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 보살은 가까운 사이인지 아닌지를 구분 없이 중생을 가엾이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불보살님에게 배워서, 좁은 의미의 사랑을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와 대중, 그리고 국가와 세계로 확대해야 한다. 자비로 사랑을 더욱 확대하고, 지혜로 사랑을 더욱 깨끗이 하며, 존중으로 사랑하는 것을 대하고, 희생으로 사랑을 이룩해 나가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주 세간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옛날 불법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수행자가 재가신도들을 모아놓고 ‘부부는 서로 원수지간이다’, ‘전생의 원수가 지금의 부부로 만난 것이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주입시켰다. 사실 세간에서 남녀의 결혼은 사랑이 승화된 것이고, 사랑이 원만해진 것이며, 둘의 사랑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사랑이다. 더 나아가 어느 한 개인에 대한 시랑을 중생 전체에게로 확대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유교에서는 “부나비를 가엾게 여겨 등불을 켜지 않고, 쥐를 위해 늘 밥 한 덩이를 남겨둔다”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도 “마땅히 자비로운 마음으로 어리고 약한 이를 양육하라. 짐승들과 곤충 등 미천한 것이 살기를 원하면, 이를 항상 가엾이 여겨 먹을 것을 주고 되살아나게 하라. 칼이나 몽둥이로 그 생명을 상하게 하거나 끊지 말라(『불설아난사사경佛說阿難四事經』”고 하였다.
사랑은 쌍방향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고 축복해주는 것이다. 소유가 아니라 내어주는 것 또한 사랑이다. 자기와 연관 있는 것만 사랑하는 것은 작은 사랑이고, 타인과 관련된 것까지 끌어안는 것은 큰 사랑이다. 진리와 이치, 국가와 세계, 인간세계의 평화까지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사랑이다. 생명이 진실로 귀하나, 사랑은 그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 사실 정감어린 큰 사랑이야말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바탕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이든 다 잃어도 자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이 사랑을 남용하고 추하게 변모시키고 있다. 미색을 탐해 악랄한 수단으로 꽃을 꺾고, 금전을 탐해 도둑질과 횡령을 하며,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비합법적으로 차지한 좋은 인연이 아닌 사랑은 자신과 남을 다 해치게 되니, 사랑도 결국 죄악을 만들 수 있다. 사랑은 죄악의 근원이지만, 삶과 죽음의 근본이 되기도 한다. 사랑이 있기에 삶과 죽음이 있긴 하지만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 있는 것도 사랑이다. 부처님 재세 당시, 마등가녀摩登伽女는 아난존자를 사랑했지만, 부처님의 적절한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일방적인 사랑은 괴로움의 근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능엄경楞嚴經』). 연화색녀蓮華色女는 감정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남자들의 감정을 희롱하며 복수를 하려고 했다. 나중에 목건련 존자의 인도를 받아 ‘옳지 않은 사랑은 죄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깨우쳐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왔다. 사랑은 윤리를 수호하고 질서를 바로잡는다. 부모, 부부, 자녀, 친구 사이에는 사랑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사랑으로 질서를 세운다. 부모, 부부, 자식조차도 필요 없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중생을 사랑하겠는가? 심지어 자신의 삶을 가볍게 여기고 자살하며 신체를 함부로 훼손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화엄경』은 우리에게 이르기를 “타인을 사랑하기를 자신을 사랑하듯이 하고, 자신을 이끄는 마음으로 타인을 따르라(愛人如愛己, 卒己以隨人)”고 하였다.
사랑하면 힘이 생기고, 사랑하면 희망이 생긴다. 사랑은 인류가 태어나면서 가지는 본능이므로 법률과 도덕에 위배되지 않고 세간의 인륜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불교에서는 이것을 부정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불교는 사랑에 대해 집착하지도 배척하지도 않는다. 특히 인간불교는 중도적中道的 생활을 제창해 왔다. 자비로 모든 사랑을 정화하고, 지혜로 모든 사랑을 인도하며,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모든 사랑을 이루고, 덕행으로 모든 사랑을 지켜가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사랑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순수한 사랑, 참된 사랑, 자비로운 사랑, 깨끗한 사랑으로 인간세계를 더욱 장엄하면서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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