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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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교의 청사진(4)
송나라 때 명교 계숭(明敎契崇, 1007~1072) 선사는 『선훈보림禪林寶訓』에서 “사람은 자신을 걸주유려(傑紂幽. : 중국 역사에서 폭군으로 유명한 왕들. 걸桀은 하夏나라 마지막 왕, 주紂는 상商나라를 망친 마지막 왕, 유幽는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 려.는 서주의 폭군)에 비유하면 화를 내지만,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비유하면 즐거워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걸주유려는 그래도 일국의 제왕들이었는데 왜 이들에게 비유되면 사람들이 화를 내고, 백이·숙제는 굶주린 사대부인데도 왜 이들에게 비유되면 기뻐하는 것일까? 이것은 도덕적이냐, 그렇지 못하냐의 차이이다.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도를 지키다 가난하게 죽을지언정, 도를 모른 채 부귀하게 살지는 않겠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송나라 때 분양汾陽 무덕無德 선사 또한 “오늘날은 학식을 중시하고, 과거에는 덕을 중히 여겼다. 덕과 학식은 서로 돕는 것이고 인간의 궤도와 법도가 되는 것이다.(今之重學 古之重德 德學相扶 堪爲軌則)”라고 말하였다. 세간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회를 올바로 이끄는 책임이 있으니, 도덕적 인격자는 몸소 실천함으로써 대중을 가르친다.
사람들은 재물이 많으면 가치 있는 인생이라 여기고, 명예와 지위를 가지면 의미 있는 인생이라 여긴다. 하지만 사실 인생의 참다운 요체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도덕적 인생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원만한 것이다. 개인의 도덕적 수양과 관련된 가르침이 들어 있는 불교 경전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땅히 사랑과 즐거움으로 인덕人德을 쌓고, 흔쾌한 즐거움으로 인선人善을 행하며 질시와 투기를 해서는 안 된다.(『아난문사불길흉경阿難問事佛吉凶經』)
타인의 착한 일은 널리 알리고, 타인의 잘못은 감춰주며, 타인의 부끄러운 바는 절대 밝히어 말하지 않는다. 타인의 비밀스런 일을 들으면 다른 이에게 전하지 않는다.(『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타인의 과오를 구하지 않고, 또한 타인의 죄를 들추지도 않으며, 해로운 말과 인색함을 멀리하면…….(『대보적경大寶積經』)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한 수행을 하며,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보지 말고, 입과 마음으로 타인을 헤아리지 않으면 삼업三業은 절로 청정하게 된다.(『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
타인의 잘못을 보고 함부로 입에 담지 말며, 자신의 그릇됨은 반드시 드러내라.(『제경요집諸經要集』)
자신의 잘못은 항상 반성하고, 타인의 허물은 논하지 말라.(『유마힐경維摩詰經』)
선한 것을 보려고 노력하되, 악한 것은 가까이하지 말라. 어두운 방에 있어도 귀빈과 마주한 듯하라.(『치문경훈緇門警訓』)
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관찰하고, 타인의 잘못한 바를 보지 않으며, 온화한 얼굴을 하고 대중들과는 다투지 않는다.(『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항상 부드러운 말만 하고 악한 말 멀리 여의면…….(『대방광십륜경大方廣十輪經』)
타인의 허물을 보지 말고, 타인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말며, 타인의 깨끗한 생활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모든 악한 말은 마땅히 버려야 하리라.(『발각정심경發覺淨心經』)
세상의 머묾과 근심을 보고, 몸은 가르침을 따라 행한다.(『오분율五分律』)
만약 타인이 때리고 욕을 해도 반격하지 않으니, 즉 싫어하고 원망하는 마음에 대해 원망을 내지 않으며, 성내는 사람에게도 마음이 항상 고요하며, 다른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은 하지 않는다.(『미사색오분계본彌沙塞五分戒本』)
자기가 즐거움을 받을 때 다른 사람을 경멸하지 않고, 남이 고통을 받는 걸 보고 좋아하지 않는다.(『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덕德은 바람과 같아서 백성은 모두 그 풍화를 입는다”고 했다. ‘덕’으로 감화시키면 모든 사람이 기꺼운 마음으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공하고자 하면 도덕적 수양을 게을리하지 말고 도덕적 생활을 영위해 나감이 가장 중요하다.
3. 생활관生活觀 : 자용지도資用之道
인간이 매일매일 생활을 영위해 나감에 있어 최소한 갖춰야 할 것이 의식주행衣食住行과 관련된 생활도구이다. 똑같은 물질적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사람마다 요구하는 바가 다르니, 산해진미를 먹고 커다란 저택에 살며 좋은 옷을 걸치고, 외출할 때는 항상 수입 외제차를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친 음식을 먹고 거친 옷을 입는 등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오히려 자유롭고 즐거운 사람이 있다. 그러고 보면 얼마나 많은 물질을 소유하야 즐거운지 정해진 기준은 없다.
불교는 일상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그 자원의 사용에 대해 신도들에게 지켜야 할 기준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먹고 싶으면 배불리 먹고, 입고 싶은 것 따뜻하게 입으면 된다. 물질은 우리의 욕망과 탐욕을 쉽게 불러일으키는 까닭에 음식과 의복 등 일상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 외에는 지나치게 낭비하지 말라고 한다. 물질은 무궁하지 않지만, 욕망은 무궁하다.
일단 물질에 미혹되면 더 깊은 고해에 빠지게 되므로, 불도를 닦는 사람은 늘 소박하게 생활해 왔다. 평소 걸치는 의복의 합이 두 근 반을 초과하지 않았으며, 행각승은 버들가지(치아를 닦는 용도), 조두(.豆 : 콩이나 팥을 갈아 만든 가루비누), 물명, 좌구(坐具 : 앉거나 누울 때 까는 직사각형의 베), 석장錫杖, 향로, 여수낭(濾水囊 : 물속의 작은 벌레나 티끌을 거르는 주머니) 등 ‘두타십팔물頭陀十八物’과 ‘삼의일발三衣一鉢’을 지니고서야 천하를 주유할 수 있었다.
발우鉢盂는 승려의 공양그릇이다. 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하는데 음식을 절제하고 지나친 식탐을 자제하라는 의미이다. 『석씨요람釋氏要覽』에서는 “『범마난국왕경梵摩難國王經』에 말하기를 ‘음식을 먹고자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병이 나서 약을 복용하다가 병이 나으면 더 이상 약을 먹고자 하지 않는 것과 같다(夫欲食 譬如人身病服藥 趣令其癒 不得貪著)’라고 하였다”고 했으며,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사람은 마땅히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여 먹을 때마다 양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면 모든 괴로움이 적고 편하게 소화되며 수명이 보존된다”고 하였다. 『불유교경佛遺敎經』에서는 “모든 음식을 받으면 약을 복용하듯 하라. 좋고 나쁜 것을 따라 더하거나 덜하지 말며, 몸을 유지하고 주림과 목마름을 없애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음식이 들어갈 때 마음으로 오관게五觀偈를 외우는 것도 건강하게 음식을 즐기는 방편이다. 즉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노라”라고 말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끊으면 정신생활은 더욱 나아질 것이다. 부처님은 매일 마맥麻麥으로 허기를 채웠고, 마하가섭 존자는 총간(塚間 :무덤)에 머물렀으며, 조과鳥.선사는 나무 위에 둥지를 만들어 머물렀다. 대매大梅 법상法常 스님은 연잎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솔잎을 드셨고, 육조 대사는 육변채(六邊菜 : 고기와 함께 요리된 주변의 채식)를 드셨으며, 여러 곳을 주유하던 행각승은 삼정육(三淨肉 : 부처님께서 병든 비구에게만 먹을 것을 허락한 세 가지 고기)을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절벽이나 물가에서 하루 한 끼의 식사로 지냈다. 의복과 발우(삼의일발) 외에 다른 장물(長物 : 옷 세벌과 발우 하나 이외의 물건) 하나 없이 마음에 걸림 없는 그들을 두고 가난한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급 주택에 머물러 고급 자동차를 타고 아랫사람을 부리지만, 매일 돈을 굴리고 주식의 오르내림에 따라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을 부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재물과 전답은 가득해도 쓰는 데 인색하고 항상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부자라고 반드시 부자는 아니고, 가난하다고 진짜 가난한 것은 아니다. 빈부는 결코 금전이나 물질로 잴 수 없다.
불교는 소비 생활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는 않지만, 세상에 살면서 장엄하게 꾸미기라도 하려면 재물은 있어야 한다. 웅장하지 않은 대웅보전에 누가 예불을 드리러 올 것이며, 장엄하지 않은 불상을 누가 존경하겠는가? 서방극락세계는 황금 바닥과 칠보 누각이 있고, 화려하고 웅장하기에 중생 누구나 그곳에 태어나려는 것이다. ‘물질에 담담하라’는 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요구이다. 이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불교는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라 하지만 시방의 대중을 위해 사찰을 크게 짓고, 시방의 대중을 모두 받아들여 묵게한다. 두보杜甫가 그의 시 「모옥위추풍소파가矛屋爲秋風所破歌」(草堂詩)에서 “어찌하면 천만 칸의 넓은 집 얻어, 천하의 빈한한 선비들 기쁜 얼굴 짓게 할 수 있을까!”라고 노래한 것과 같다.
불교에서는 사물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꾸짖고 물질에 얽매이는 것을 저어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적절한 물질문명의 향유는 도덕생활에 위배되지 않지만, 실천 수행하는 사람은 물욕에 담담함을 자신의 의지를 수련하는 기회로 삼아 깨달음에 이르길 발원한다.
불가의 총림에서는 극락왕생한 스승의 옷가지와 생활도구가 다시 제자에게 전승된다. 이렇게 의발 하나가 몇 대를 이어 전승되기도 한다. 나의 총림생활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물욕物欲을 멀리 떨쳐버리면 물질의 부림을 받지 않고, 미혹되지도 않을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색·성·향·미·촉·법 등 육진六塵의 환경에 머물지 말라고 하였다. 오욕五慾과 육진에는 수많은 함정과 고뇌가 있어 일단 그 안에 빠져들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는 “재보와 색욕과 왕위는 무상하고 신속히 지나가 잠시 잠깐일 뿐이니 지혜로운 자는 이를 즐겨 좋아하지 않으며, 매우 미묘한 부처님, 보리菩提를 힘써 구한다”고 하였으며,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부드럽고 참는 법을 즐기게 하고, 자慈·비悲·희喜·사捨 가운데 편히 계시네”라고 노래하였다. 물욕에 담담하고, 부처님 법 듣는 즐거움을 추구하며, 기쁨과 온화함으로 참고 인내하며, 자비와 보시를 행하는 생활이야말로 우리가 영위해야 할 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