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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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교의 청사진(9)
8. 복수관福壽觀 : 옹유지도擁有之道

다복다수多福多壽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가지는 희망이며, 인류의 공통된 소원이다. 그러나 다복과 장수를 함께 얻기는 어렵고 힘든 일이다.
나라를 살 만큼 돈이 많아도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제대로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도록 장수를 누리며 살지만 평생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복덕과 인연이 구족되어야만 무량한 복과 장수를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복과 수명은 어떻게 심고 가꿔야 할까? 다복과 장수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도 아니고, 타인이 나에게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자신의 업력으로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가에는 “스스로 지은 대로 받는다(自作自受)”는 말이 있다. 자신의 청정한 수행으로 짓는 선업은 무량한 복과 수명을 가져오지만, 비열한 행동으로 짓는 악업은 복과 수명을 만드는 인연을 끊어버리고 행복을 짓밟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계五戒처럼 도둑질하지 않으면 복 있는 과보를 받을 수 있고, 살생하지 낳으면 오래도록 장수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의 오계를 엄격하게 지켜야 다복과 장수를 누릴 수 있다.
『팔관재경八關齋經』에서는 “복은 일일이 셀 수 없으며, 팔관재계八關齋戒를 지녀 받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구경』에서도 “항상 예절을 잘 지키고 웃어른과 노인을 공경하면 네 가지 복이 절로 늘어나노니 아름다움과 힘, 수명과 편안함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법원주림法苑珠林』에서도 일곱 가지 보시 법문을 실천하면 무량한 복과 장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일곱 가지란 다음과 같다.
①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셔라.
② 과수원에 나무를 심어라.
③ 항상 병을 구할 의약을 보시하라.
④ 사람을 건너게 할 배를 만들어라.
⑤ 도로와 다리를 만들어라.
⑥ 우물을 파고, 등을 밝히며, 차를 나눠주어라.
⑦ 백성의 편리를 위해 화장실과 욕실을 만들어라.

『대교왕경大敎王經』에서도 “복록을 얻고, 장수와 복이 늘어나며, 성대해지고, 과보가 원만하기를 원하는 자는 선을 행해야 한다. 또한 승보에 손실을 입히지 말고, 법보를 멸하지 않으며, 불보를 없애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왕의 지위도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고, 대신이 되는 것도 덜어지거나 잘못되지 않으며, 사람으로서의 수명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보三寶, 부모, 스승, 제자, 병자, 위급, 근결根缺, 온갖 고생 등이 우리가 다복과 장수의 복을 짓도록 만들어주는 것들이다.
인광印光 대사는 「심명시心命詩」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마음이 착하고 명운도 좋으면 늙을 때까지 부귀를 누리며,
명운은 좋으나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복이 재앙으로 변한다네.

마음은 착하나 명운이 나쁘면 화가 복으로 변해 돌아오고,
마음도 나쁘고 명운도 나쁘면 재앙, 가난, 요절의 재앙이 온다네.

마음은 명운을 되돌릴 수 있으니, 인과 도를 지님이 가장 중요하며,
명운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요, 길흉은 사람이 초래한다네.

명운만 믿고 마음을 수양하지 않으면 음양을 바로잡기 어렵고,
마음을 수양하고 명운을 따른다면 천지가 절로 보호해준다네.

心好命又好 富貴直到老 命好心不好 福祿變禍兆
심호명우호 부귀직도로 명호심불호 복록변화조

心好命不好 轉禍爲福報 心命俱不好 遭殃且貧夭
심호명불호 전화위복보 심명구불호 조앙차빈요

心可換乎命 最好存仁道 命實造於心 吉凶惟人召
심가환호명 최호존인도 명실조어심 길흉유인소

信命不修心 陰陽恐虛矯 修心一廳命 天地自相保
신명불수심 음양공허교 수심일청명 천지자상보

일체의 복과 수명의 과보는 마음의 수행에 달려 있다. 평소 타인과 선량한 마음으로 인연을 맺고 복의 인연을 키우면 부귀는 절로 따라오고 장수를 누리게 된다. 마음에 악을 품으면 한동안은 즐겁고 순조로울 수 있지만, 한순간 재난으로 변해 재앙이 따르게 된다.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치거나 강탈하면 잠깐 동안은 즐겁겠지만, 이후 받을 고통의 악연도 깊이 심게 된다. 혀로 얼굴을 핥는 꿀벌은 얼굴에 묻은 꿀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지만, 혀 또한 상처를 입게 되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당장 인연이 구족되지 않는다고 해도 인자함과 후덕함을 가슴에 새기고 자비심을 지닌다면 재난 역시 언젠가 행복으로 바뀔 것이다.
다복과 장수에 관한 인과의 이치는 경전에서도 자주 보인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다복과 장수를 천지신명이나 보살, 부처님께 기원해야 하는 걸로 여기며, 욕심을 채우는 데 신앙을 이용한다.
『법구경』에서는 “복福을 구하고자 신께 제를 올리고 그 과보를 바라지만, 돌아오는 과보는 극히 미미하니 어진 이에게 예를 올림만 못하다” 하였다.
복과 수명은 구한다고 꼭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이유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스스로 다복과 수명의 인연을 심고 가꿔야 한다. 천상에 태어나려면 천상에 태어날 복이 있어야 하며, 신선에게 구한다고 신선이 반드시 이루어주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아무런 노력 없이 다복을 기원하고, 안 되면 모든 책임을 천지신명과 부처님께 떠넘기는 것은 인과因果의 도리에 어긋난다. 이는 무거운 돌덩이를 물 위에 올려놓고 가라앉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용서증광정토문龍舒增廣淨土文』에서는 “현세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현세에서 나쁜 일을 많이 하면 복과 수명이 줄어든다”고 하였다.
물 위에 떠 있는 뜨거운 기름을 보고 “기름아, 제발 가라앉아라!” 열심히 기도를 하여도 물 밑으로 기름이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인과의 법칙에 맞는 행동만 하면 복과 장수의 과보를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복과 장수를 얻는 것은 남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천지신명이라도 우리의 삶과 죽음, 그리고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이 복과 장수의 씨앗을 열심히 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다복과 장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소망이다. 특히 복, 관직, 장수, 재물, 즐거움 등 오복五福이 한꺼번에 굴러들어 온다면 이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복을 누리는 것이 후회없이 완벽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란 그저 오복을 얻는 것에 그치는 것일까?
세간의 일체는 모두 생멸生滅한다. 복과 장수 역시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며, 때론 흠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고 “참 다복하시네요”라며 부러워할 때가 있다.
복이 들어오면 운運도 따르게 된다. 자녀가 많으면 자녀로 인한 걱정거리 또한 적지 않다. 자녀가 어렸을 때는 잘 자라줄까를 걱정하고, 크면 멋지고 아름답지 못할까를 염려한다. 결혼을 하고 직장에 다녀도 가정에는 별일이 없는지, 사업은 잘 되는지를 또 걱정한다. 못난 자식을 두면 걱정할 일은 더욱 늘어난다.
자녀가 많으면 다복하고, 재물이 많으면 복과 운이 또한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닌다. 재물이 많으면 음악과 여색 등을 즐길 수도 있지만, 재물은 때론 생각지도 못한 번뇌를 가져올 수 있다. 자금은 제대로 융통되지 않고, 은행 영업시간이 끝나갈 때의 초조한 심정은 몸이 불구덩이에서 타는 것처럼 참기 힘든 고통이다.
복과 운은 그림자처럼 무척 밀접한 관계에 있다. 수명과 늙음 또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평소 우리는 “오래 오래 사십시오”, “백 살 하고도 스무 해 더 사십시오” 등의 장수를 기원하는 소리를 종종 들을 수 있다.
120세까지 장수하는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정말 120세까지 산다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100세가 된 그의 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없을지도 모른다. 80세 된 손자 또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심지어 60세 된 증손자 또한 죽었을 수도 있다.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오래 살아 자식과 손자를 먼저 떠나보내야 한다면 120세라는 생명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따라서 불교는 세간의 복과 수명은 궁극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도 아니라고 여긴다. 그렇다고 다복과 장수를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다만 불교에서는 복을 구하고자 하면 지혜의 복을 구하고, 수명을 늘리고자 하면 자비의 수명을 늘려야 함을 강조한다.
복의 과보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한쪽 바퀴로 갈 수 없고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혜가 융합된 복이야말로 공덕이 원만해질 수 있으며, 지혜가 있어야 자신의 복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장수를 누리되 선을 행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복智慧福과 자비수慈悲壽를 추구해야 한다.
사람의 생명은 이번 생이 지나면 또 다음 생이 오고, 심지어 생명은 끝없이 무한 반복된다. 꽃과 과일이 시들더라도 씨앗만 남아 있으면 두 번째, 세 번째, 심지어 무한한 생명을 피울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의 육체가 생겨나면 반드시 없어지는 유위법有爲法이라면, 생명과 정신은 무위법無爲法이자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수명인 무량수無量壽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명을 구하고자 하면 ‘무량수’를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