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 따레 뚜따레 뚜레 소하.”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명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전염병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석가모니 붓다의 정각지 보드가야에서 다람살라로 복귀한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5)는 지난 1월 말 남방불교 종교 지도자와 함께한 비공식 자리에서 시국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했다. 이어서 불교의 진언 수행자에게 따라보살 진언 기도를 통해 몸과 마음을 돌보기를 권했다. 이어서 달라이라마 대표부는 3월 9일로 예정된 달라이라마의 본생담 대중 법회를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다람살라와 사원의 검역과 위생을 당부했다. 티베트에 달라이라마 법왕이 옹립된 이래 현재까지 400여 년간 티베트력 새해 ‘로사르’ 보름날에 열린 야단법석 본생담 법회가 취소된 것은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선한 마음의 발로를 필요로 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동정심 용서 그리고 관용은 지성을 지닌 인간의 본성입니다. 또한, 인간은 의존의 방식으로 사회적 공동체를 영위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각 개인의 미래는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고 미래의 관건이 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대가 변화하며 지금은 한 집의 한 공간에서 가족이 함께 모여 살기가 힘들게 되었지만, 현대의 첨단 기술력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가족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네트워킹하고 정보의 벽을 허무는 것이 그러합니다. 모든 생명 지닌 존재는 삶을 영위합니다. 그 가운데 인간은 행복을 원하고 상대적인 고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인간은 지금의 내가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모두가 간절히 원하는 행복은 어떠한 원인으로 성취되지 않는가. 지금 이 시각 지구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와 갈등의 원인이 우리 인간이 파생시킨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실현토록 하는 자원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고 지속력 있는 행복의 원천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즉 ‘우리’입니다. 이는 행복의 논리에도 적용이 됩니다. 행복이란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대상이 있지요. 그것이 ‘당신’입니다. 나와 당신의 효과적인 행복을 증폭시키는 촉매제가 바로 이타심입니다. 이타심은 다른 말로 사태와 상황의 공감에 따른 염려심입니다. 이 염려의 마음에는 사랑 연민 친절 자비와 같은 감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더불어 행복할 수 있도록 공감하는 이, 우리는 그를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여전히 가난과 빈곤이 만연합니다. 국가의 가장 큰 예산은 군사 무기에 집행이 됩니다.
평화의 완성은 힘과 권력에 의해 평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리더들이 평화에 대한 주제를 토론하지만 우리는 점차 진정한 평화로부터 멀어져만 가는 듯 느껴집니다. 왜일까요. 평화는 간절한 기도만으로 성취되는 무엇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분쟁을 종식하고 무기 사용을 축소해야 합니다. 저는 인도의 비폭력 정신 ‘아힘사’와 ‘카루나’를 지지합니다. 이러한 정신 논리가 현대 교육과 결합 되어야 하는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물질적 욕망에 중독된 현대인에게 마음과 감정의 작용을 순화시켜 집착으로부터 유연토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수행하는 목적 또한 집착하는 의존의 관계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한 긍정적 기대 가치가 있습니다. 정진을 통한 성과로써 인식의 범위가 확장되고 큰 범위의 구조론에서 현상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개 강연이나 법회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바가 있습니다. 논리와 지혜가 바탕이 된 인지 수행을 통해 이타적 사랑은 성장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논리는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에 단계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현실을 왜곡해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고통의 근원을 불교에서는 ‘무지’라고 부릅니다.
인생이란 환멸 연기의 삶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고통 받지 않을 권리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을 이루기는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방향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좀 더 구체화한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