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우리가 화를 낼 때는 성을 내는 대상과 성을 내는 자기자신, 이 둘은 우리에게 타고난존재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전에 설명했듯이 사물에는 이렇게 명확한 존재는 절대 없습니다.
우리가 타고난 존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을 만큼 그 타고난 존재의 의식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성냄'도 작아집니다.
바로 우리 인식은 사물에 대해 좋고 나쁘다를 아주 많이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원할 때나 싫어할 때, 또는 성낼 때, 그 사물을 아주 좋거나 나쁘다고 인식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물을 우리 인식이 만든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조용히 앉아 조금 전 사물에 대한 내 생각, 나의 바라봄, 내가 왜 그렇게 그 사물을 바라보는지 생각하게 되고 혼자서 웃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인식이 옳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며 믿게 됩니다. 이렇게 시달리는 의식은 어떤 정확한 바탕이 없습니다.
정신 분석적으로 마음이 타고난 존재를 살필 때, 위에 있는 논리를 통해서 사물은 어떤 사물이든지 타고난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런 믿음에서,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난 의식이 바로 바탕이 있는 의식이고, 정확한 바탕이 있는 의식입니다. 어떤 법정에서 토론할 때, 한 의식은 진실하고 정확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의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토론을 하면서 충분한 증거가 모였을 때, 진실한 편이 드디어 상대방을 이기게 됩니다. 이기게 되는 이유는, 그 의식이 분석에 맞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마음이 어떤 사물에 대해 반대하는 두 가지 의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에 대한 타고나지 않은 존재에 대한 앎이 익숙해질 때, 그와 관계된 타고난 존재의 의식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타고나지 않은 존재에 대한 그 앎에 대해 앎이 더 든든해질수록, 그와 관계된 반대쪽의 의식은 힘이 없어지게 됩니다.
위의 앎이 우리 마음에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 강력하진 않지만, 위에 설명한 그 앎이 우리 마음에 일어나게 하기 위해 명상을 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 마음은 흐트러져 있습니다. 마음의 흐트러진 힘은 어떤 댐을 통해서 전기를 만들기 위해 에너지를 모으듯이 우리의 힘도 그렇게 모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흐트러진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명상을 합니다. 그 다음, 이런 에너지는 지혜를 불러일으키는 데 이용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모든 본질은 우리 내면에 있습니다.
부처를 찾기 위해 바깥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고통을 없애는 과정도 성낸 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오직 빛나는 것,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동불처럼 청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 설명했듯이, 괴로운 감정이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더라도 그 괴로운 감정이 우리 마음의 본질을 더러워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나는 앎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자체도 한 의식이고 그래서 그 미움 본질도 결국 빛나는 것이고 앎입니다. 그 미워함이 자기 대상을 바르지 않게 보더라도 그 본질은 원래 빛나는 앎입니다.
우리가 지금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 즉 원인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도 부처가 되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다르마 길띠(Dharma Kirti, 인도의 고승)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한 포기 풀 위에 작은 벌레가 앉아 있고, 그 한 포기 풀 위의 벌레가 자기 카르마로 앞으로 태어날 100마리 코끼리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서, 지금 그 풀 위에 100마리의 코끼리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차이점이 있는데, 코끼리로 태어나는 원인과 뿌리는 벌레 자신의 카르마로 새로 만든 것이고, 다섯 가지 부처의 뿌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원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번역·정리 / 쉐둡 스님(translated by Shed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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