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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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는가?
사성제 중 첫번째는 고통에 관한 진리 입니다.
불교 내의 여러 학파들은‘진리’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해석합니다. 예를 들면,‘ 귀류논증중관파(歸謬論證中觀派, Prasangika)’와 ‘성문승(聲聞乘)’은 보통 사람들과 신성한 사람들을 구분하는 데 방식에서 서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성문승은 사성제를 직관적으로 직접 통찰할 힘을 얻었는가의 여부에 따라 보통 사람과 신성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귀류논증중관파’는 그런 기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도 사성제를 직관적으로 직접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깊이 다루려면 설명이 복잡해질 테니까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 대신에,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고통이 있기에 고통스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통이라는 것은 업이나 번뇌에서 지배되는 우리의 존재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상가(無着, Asanga)스님이《지식의 집성서 Abhidharmasamuccaya》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고통이라는 개념속에는 우리가 사는 환경과 그 속에 사는 개인들이 모두 포함되어야 합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환경을 알려면, 불교의 우주관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세가지 세계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욕망의 세계인 욕계(慾界)요, 둘째는 미묘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인 색계(色界)요, 셋째는 물질을 초월한 세계인 무색계(無色界)입니다.

이들 세 가지 세계를 이해하기는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특히 물질의 세계와 물질을 초월한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그런 세계들에 관해 말씀하셨다고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경전에 그렇게 쓰여있기 때문에 그런 세계들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는 없지요. 따라서 그런 세계들은 여러 가지 의식 수준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깨달은 존재와 깨닫지 못한 존재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각각의 의식 수준에 의거한 것입니다.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윤회나 고통의 상태에 있는 방면에, 마음을 절제하는 사람은 열반의 세계나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에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보통사람과 신성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도 의식이나 깨달음의 정도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성을 깨닫거나 존재의 절대적 본질을 직관적으로 직접 깨달은 사람을 신성한 사람이라 부르고, 그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을 보통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세가지 세계에 관해서 생각해봅시다. 개인의 의식수준이 미묘해질수록 개인이 사는 세계존재도 미묘해집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심한 욕망과 집착을 갖고 사는 사람은 감각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에게 집착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그 사람은 물리적 대상에게 느끼는 집착, 그 집착의 진행과정, 감각적 경험들 때문에 이생은 물론, 생이나 다음 생에서도 욕망의 세계(欲界)속에 갇힌 존재로서 살게 됩니다. 반면, 그들과는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대상이나 육체적 감각에 대한 집착은 초월했지만, 내면의 즐거움이나 환희에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다음 생에 훨씬 순수한 형태의 육채를 가진 존재로 태어날 원인을 축적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육체적 감각뿐 아니라 내면의 즐거움이나 환희에 대한 집착까지 초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평정상태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의식수준은 앞서 말한 두 종류의 사람들보다 훨씬 미세한 단계까지 이르러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특정한 형태의 존재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중 거친 부분을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즉 색계(色界)안의 넷째 단계로 이끌리고, 마음의 평정을 향한 미세한 집착은 물질을 초월한 세계, 즉 무색계(無色界)로 이끕니다. 이런 식으로 세 가지세계를 의식 수준과 관련시켜 생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