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에 편재하는 고통’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만들어진 것들’에 본질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는 고통입니다. 여기서 만나게 되는 질문은, ‘왜 사물(만들어 진 것들)의 본질이 고통스러운가?’입니다. 그것은 윤회 속에서 생겨난 것은 모두 무지(無知)에서 기인하여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영향을 받는 한은 영원한 행복을 얻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말썽이나 곤란이 항상 생깁니다.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거나 혼동하고 있는 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무지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고통은 마치 잔물결처럼 계속해서 밀려올 것입니다.
고통은 무지와 무지가 불러일으킨 나쁜 업의 영향을 받는 생명체들의 진상을 가리킵니다. 그런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이 생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만드는 토대가 될 뿐 아니라, 다음 생에서 받을 고통의 원인과 조건들을 축적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윤회에 편재하는 고통들’이라고 부릅니다.
다르마끼르띠의《올바른 의식의 집성서에 붙인 주석》과 아리아데바(聖天, Aryadeva)의《중관사백송 中觀四百頌, Catuhsataka》에는 셋째 종류의 고통을 효과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어서 그런 종류의 고통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그 두 논서는 존재하는 것들의‘일시성’과‘무상(無常)’한 성질을 세세하게 고찰하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여기서 무상의 의미가 두 종류로 쓰이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생겨나서 잠시 머물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무상의 의미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덧붙여 생각할 것은, 어떤 것이 사라지려면 그것이 지속되지 못하도록 파괴하는 촉매 역할을 할 보조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상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는 두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더 정밀한 이 시각으로 보면, 방금 기술했던 외관상의 변화과정은 더 깊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동적(動的)인 변화과정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더 깊은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매순간 계속해서 변화합니다. 순간마다 일어나는 이 변화과정은 어떤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생긴 보조 조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물을 생겨나게 한 바로 그 원인이 그 사물을 파괴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의 발생 원인 속에 그것의 소멸 원인이 들어 있습니다.
한편‘일시성’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실체들이 존재하는 세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실체는 첫 순간에 발생하고, 둘째 순간에 머물고 셋째 순간에 분해됩니다. 둘째는, 각각의 순간 자체가 일시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순간은 정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은 생겨나자마자, 그 자체의 소멸을 향해 움직입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완전한 상태로 생겨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 자체를 해체할 잠재력도 내부에 함께 갖고 탄생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사물은 어떤 보조적인 외부 조건 때문에 소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들이‘다른 힘에 의해 촉진 된다’고 말합니다. 즉, 현상의 소멸은 그 현상의 원인들에 의해 촉진되는 것입니다. 사물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일시성 때문에 우리가 고통받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윤회하는 개체로서 우리의 삶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자체의 원인들과 조건들의 결합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그것 역시‘다른 힘’에 의해 촉진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 인과적 과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원인들은 무지와 무지가 일으킨 착각 상태입니다. 무지가 우리를 지배하는 이상, 영원한 기쁨이나 행복이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물론, 윤회 속에도 비교적 즐거운 상태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형태 있는 세계(世界)이든, 형태 없는 세계(無世界)이든, 욕망의 세계 (欲界)이든지 간에, 윤회 속에서는 영원한 기쁨이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요컨데, 우리는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종류의 고통입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