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는 삼보에 귀의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개인이 깊이 숙고한 후에, 불법승 삼보가 참으로 진실이고, 궁극적으로 귀의할 대상이라고 확신한다면, 아직 스승을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실제로 불교도가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신적인 행복을 삼보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귀의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삼보에 귀의하는 불교의식에 참가했더라도, 삼보가 궁극적으로 귀의할 대상이라는 확신을 얻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의심 때문에 당분간은 수행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귀의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에 대해서 말할 때, 부처님을 과거의 인도에서 태어나 정신적 삶의 길을 보여준 역사적 인물이라고 한정시켜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의식(意識)의 수준들’이나 ‘정신적 깨달음의 수준들’이라는 개념을 바탕에 두고 ‘부처의 경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의 경지는 ‘존재의 어떤 정신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 경전에서는 과거의 부처님들, 현재의 부처님들, 미래의 부처님들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다음에 나올 질문입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인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를 우선 묻게 됩니다. 그 대답은 불교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불교가 있으면, 승가(僧伽)도 분명히 있습니다. 승가는 불교가 가르치는 길을 따라가며,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만일 승가의 구성원 중에서 ‘거친 단계의 악행과 번뇌가 없는 정신적 상태들’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도 악행과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상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부처의 경지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의 불교와, ‘귀의’와 관련해서 말할 때의 불교를 구분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경전상의 불법(佛法), 즉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서 수행한 후에 얻는 정신적 깨달음을 말합니다. 귀의와 관련해서 말할 때의 불교는 두 가지 면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과 번뇌를 소멸시키는 ‘길(道 :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소멸’ 그 자체입니다. 진정한 소멸과 그 소멸로 이끌어 가는 길을 알아야만 해탈의 상태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생겨납니다. “존재하는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불교를 아는 사람이요, 불교를 아는 사람은 부처를 아는 사람”이라고 부처님은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나가르주나죂龍樹죃의 중관(中觀)철학을 가지고 그 말씀을 해석하면, 그 의미를 가장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가르주나를 편애한다고 저를 비난하셔도, 저는 그 비난을 달게 받겠습니다. 나가르주나 식으로 해석하면, 앞에서 말한 부처님 말씀의 의미를 세 단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불교학파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연기법’ 즉, ‘의존적 발생의 원리’에서 보면, 앞에서 나온 부처님의 말씀을 인과적 연기(因果的緣起)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을 싼쓰끄리뜨어로는 ‘쁘라띠띠야싸무뜨빠다(pratityasamutpada)’라고 합니다. ‘쁘라띠’는 ‘의지함’을, ‘싸무뜨빠다’는 ‘발생’을 말합니다. 이는 결합되어 세상에 생겨난 사물들은 여러 원인과 조건이 서로 작용해야만 그 결과로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사물이 원인과 조건이 없이 무(無)에서 생겨날 가능성과 초월적인 창조자가 있어 사물을 창조할 가능성을 부정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