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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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애심과 염리심으로 해탈 구하세요
이 글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지난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남걀사원에서 한국인 불자들을 위해 <금강경>을 주제로 법문한 것으로, 현대불교신문 803호 34면에 게재됐던 내용이다.
<편집자 주>

오늘 설법할 주제는 반야경의 핵심을 축약한 <금강경>입니다. 이는 티베트인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널리 독송되는 경전입니다. 그러나 방대한 500권 반야경은 티베트어로 번역되지 못했습니다.
반야경의 수많은 해설서와 주석서 가운데는 미륵보살이 지으신 <현관장엄론>이 있습니다. 현관의 차제를 70가지 의미로 분석해, 공성의 바탕 가운데 5온 18계 16처 5위 등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무착 보살의 주석서와 나란다의 수많은 선지식의 주석서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기인해 우리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 동일하게 존재하는데, 이는‘나’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각각의 감정을 만듭니다. 오근에 의지한 행복의 감정이 있는가 하면 육체적인 감각에 의지하지 않은 행복도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경쟁심 자신에 대한 특별한 질투심과 아만 같은 것은 바깥의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지나친 탐착과 혐오하는 마음을 통해 표출됩니다.
인간의 행불행의 가치와 강도가 더 크다고 보는 것은 인간이 지닌 이성적 힘인 사고력이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불행히 만드는 그 원인을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질투 자만 아만이 마음의 평화를 깨 불행을 파생시킵니다. 우리에게 지나친 질투나 의심이 존재하기 때문에 큰 공포와 두려움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불행을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자애심, 사랑의 마음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는 불과 3000년 전부터 그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적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나’라는 것에 태초라는 시작이 있는가. 이런‘나’의 마지막이 있는가.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나’는 몸과 마음에 의지해 가립(假立)된‘나’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나’의 생물학적 시작인 부모에 의한 수정체로 거슬러 올라 그 흐름을 보면 수천만억 년 전에 지구의 생성시기로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빅뱅(우주 대폭발) 그 이전, 우주 물질 존재의 가립에 도달해도, 그 근원으로 또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합니다. 이렇듯 태초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착 보살은“지금 현재의 대상들이 변화하는 무상한 결과물이라면 그 원인 역시도 무상하다”고 논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식인‘나’라는 가립하는 것과 상응하는 것을 통해 현재 의식이 존재하고 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부유인’이 될지언정 본질인 ‘근치인’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된 지견은 끊길 수 있습니다. 이는 대치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서 끊기지만 본래 존재하는 청정은 적수가 될 만한 조건과 원인들이 존재치 않기 때문에 그 의식들은 계속 유지 존속됩니다. 번뇌나 전도된 지견은 대치법에 의해 소멸될 수 있으나 고유의 청정함은 유지 존속되며 자아는 가립하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존재는 결과적으로 마지막 또한 없습니다.
“발심으로 인해 바로 보리를 이루네. 70가지의 의미를 밝힘에 있어 그 중심이 바로 보리심이라네.”
반야경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 함축됩니다. 방편의 보리심과 그 뜻을 드러내 밝힘으로써 심온한 공성과 보리심이 그것입니다. 선취에 태어나 해탈을 구하는 바가 바로 번뇌로 벗어난 해탈과 성불의 지혜입니다. 일체 종지는 보리심이 선행되고 그 이전에는 이상적인 극락 세계에 갈 것을 갈망하는 염리심(厭離心)이라는 해탈을 구하는 마음이 선행돼야 합니다. 윤회에서의 고통을 원치 않는 마음을 염리심이라고 합니다. 붓다는 이러한 고통을 수반하는 번뇌와 윤회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고 사성제에서 처음 밝히셨습니다.
염리심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 그 고통을 인식하고 해탈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타인들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그들을 함께 해탈로 이끌어야겠다는 마음이 바로 보리심입니다. 이 보리심은 일체 종지를 이루기 이전에 선행되는 마음입니다. 이후의 육바라밀과 지관쌍수의 수행 역시 보리심을 바탕으로 한 보살의 학처입니다.
붓다의 법은 광대한 보리심과 심대한 지혜를 다룹니다. 공성의 지혜란 공성을 인식하고 이해를 통해 확신에 이르러야만 지혜를 이루기에 불교 수행자는 공성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실상의 본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때 궁극의 원하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리심과 공의 지혜가 중요한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아름다운 대상을 보고 탐착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대상을 향해서 분노하는 마음에 각기 본래 그러한 성질이 있을까요. 있다면 모든 이가 그 대상에 대해 한 가지 생각을 일으켜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각기 다르게 일어나는 것은‘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대상 그 자체에 대한 반응이 각각 존재한다는 것은 대상 그 자체에서 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맞물려서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며 절대 나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에 대한 집착은 번뇌의 부정적인 마음을 만들어 냅니다.
불교의 무아 사상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보편적인 무아 사상이 남과 타인이라는 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때는 모르는 소리가 됩니다. 보편적으로 나의 상대적인 남은 존재합니다. 남을 떠올려 의식하는 대로 현현하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불교의 무아입니다. 반야경은 보리심과 공성(무아)의 지견을 통해 나라고 하는 독립된 실질적인 존재성을 바로 해석합니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할 때 우리가 말하는 모든 부정적인 마음을 지워갈 수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실상에 대해 무지하고 바깥의 실상 역시 무지하기 때문에 분별하면서 문제가 야기됩니다.
나에 대한 무지와 제법에 대한 무지의 실상에 대해 바로 안다면 그로 인한 문제들은 줄여 나갈 수 있습니다. 나를 비롯한 제법의 실상은 무엇인가 하면 고정된 실재가 존재치 않고 문자적 언어적으로 이름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제법에 실체 없음을 안다면 진실은 분명하고 명쾌하게 드러납니다.
반야바라밀은 지혜를 수반한 신심을 근본으로 합니다. 바라밀이라는 것은 피안에 도달함을 의미합니다. 도피안은 두 가지로 해석해 어떠한 결과물로서 도달하는 곳으로서의 피안과 그 피안의 이득이라고 하는 길(道)의 입장이 있습니다.
다양한 배움의 문을 통해서 비량(比量)을 인식하고 지속을 통해 지혜가 일어나면 문·사·수(聞思修) 가운데 사해(思解)를 이룰 수 있습니다. 비량이 일어나 지혜를 가져오는 것을 사해라고 합니다. 사유를 통한 지혜와 확신의 대상들에 습관이 들면 굳건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습관의 과정을 수해(修解)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건이 가능케 되는 씨앗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를 통해 보리심과 자비심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평범한 범부의 마음이 더 수승하고 심오한 마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범부를 통해 진리를 보게 된다면 그를 바로 성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몽매한 장애들의 습기인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모두 부수는 것이 공성의 지혜이기에 능단(能斷)이라고 합니다. 반야는 지혜로서 진제(眞諦)의 보리심으로 속제(俗諦)의 보리심이 뒷받침된 승의 보리심이다. 진제의 보리심이 바로 지혜반야바라밀입니다.
붓다께서 비구의 모습을 하고 일반적인 비구승의 일상을 보인 이유는, 정념에 머무는 삼매 수행과 문사의 듣고 배우는 수행에 있어서 배움과 실제 수행이 사문이 해야할 바임을 행장으로서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당시 많은 비구들이 세존의 발에 정례하는 대중 가운데 수보리가 있었습니다.
보살승에 바르게 머물기 위한 해답으로 붓다는 보살의 18주처를 설합니다. 까말라실라의 주석서는 머무는 가운데 역경을 없애고 자량(資糧)을 쌓아가는 길로써 보살의 18주처를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자량도와 가행도(加行道) 두 가지 의미를 다룬 후에 견도와 수도에 포함되는 10가지의 보살 지위를 다룹니다.
붓다는 진리의 답으로 보리심의 방편과 공사상의 두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성숙해 무주처열반을 이룰 때 이러한 진리로서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붓다께서 경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보리심과 공성 수행을 통해 여러분도 부촉하시기를 발원합니다.
허공과 같은 중생을 모두 불지에 이끌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보리를 이루겠다는 마음을 내십시오. 보살은 중생에게 보여지는 몸으로서 색신을 구합니다. 이 또한 구족함이 없는 것은 이름만으로 존재함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밤에 바라보는 별무리가 낮에는 빛나지 않다가 태양이 없을 때 존재를 드러내듯이 무명의 습기에 젖어 있을 때는 그 무명의 암흑으로 인해 모든 것이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해 보입니다. 진제를 깨달아 선정의 지혜가 떠오를 때 희론은 적멸합니다. 저쪽 편에 존재하는 실체가 없음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은 눈에 병이 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대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속제 입장에서 존재 여부를 분별하듯이, 등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바람의 방해 없이 심지와 기름이 조건의 의지해야 밝혀지듯이, 장애로 인해 희비를 간택할 뿐 실체는 없습니다.
신기루와 같은 환영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을 만듭니다. 텔레비전이 환영임을 알고 보는 것과 같이, 환상과 환영의 대상에 어떻게 신심을 내야 하는가 물을 수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로 인한 지견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를 증대하기 위해서는 무아의 지견인 신심과 자비심이 뒷받침 돼야 합니다. 이슬은 무상이며 물거품은 고통을 본질로 합니다. 꿈, 번개, 구름 이 세 가지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비유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존재하지 않으며 번개는 찰나적으로 존재합니다. 구름은 스스로 어디로 갈 것인지 확정 된 바 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인도 다람살라 = 가연숙 현대불교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