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달라이라마(텐진갸초, 76세) 그를 향해 법왕, 승왕,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 21세기의 살아있는 붓다라고들 칭한다. 더불어 이곳 중앙티베트행정부에서는 통상적으로 겔와린포체(존귀한 정복자), 예쉬노부(소원을 이뤄주는 보석), 홀리니스(신성한 분)로 존칭된다. 1959년 중국의 침공으로부터 인도에 망명한 이후 북인도 산간 마을 다람살라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중국과의 외교 회담이 수차례 오갔지만 현재까지 별다른 진전을 거두지 못했다. 달라이라마는 세계 각지에 티베트 난민을 포섭해 줄 것을 요청했고 1970년대 들어 급속히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티베트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려가게 되었다. 달라이라마가 외국인을 위한 법회를 처음 열게 된 것은 1990년대 대만불자들의 요청에 의해서다. 그 두 번째가 한국으로, 1999년 여수 석천사 진옥스님의 주관으로 개최된 이래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2005년도에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추진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그의 제자와 다른 덕 높은 수행자들이 대신 한국을 찾아 티베트불교와 한국불교의 교류를 잇고 있다. 10월 23일 법회 시작 날. 400여명의 한국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법당을 찾았다. 아침 9시(현지 시각)부터 시작된 법문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하루 두 차례씩 삼일 간 진행됐다. 달라이라마는 법문을 하시고 통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일일이 한국의 불자님들과 눈을 맞춰 인사를 나누시는 소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셨다. 달라이라마는 신라시대의 고승 원측스님의 <해심밀경소>을 거론하며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어서 21세기 불자로서 우바새 우바이의 사회적 역할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일상에서 수행 가능한 마음 다스림의 방법을 권고했다. 이번 법문의 저본은 쫑카파 대사의 <보리도차제론>을 삼았으며 그 가운데 지관수행의 핵심적인 부분을 설했다. 달라이라마는 법회를 열며, “삼매와 관 수행은 도를 닦음에 필수 단계이다. 오늘의 법문이 각자의 근기에 맞는 수행을 취하고 향상시키는데 윤활제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법문 요지)
■선한 삶과 신앙 생활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신앙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좁은 생각입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다양한 종교 가운데 다수를 주도하는 종교의 이념이 인류 전체를 통섭하고 있지 않은 현실에 비추어 보십시오. 다만 신앙을 통해 우리는 개개인의 도덕과 선행을 발전시킬 수는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일상에서 짓는 선한 업을 통해 내생에는 선취를 이루거나 해탈을 이루는 종교적 성취를 제안합니다. 현생에서 필요한 것을 이루기 위해, 선한 도덕적 삶을 이루기 위해, 종교와 관계없이 행복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삶을 이뤄가야 할까요. 이생의 행복을 논하는 것은 마음의 행복을 논하는 것의 다른 이름입니다. 일상에서 구현하는 행복은 돈과 같은 외부조건이 아닙니다. 종교를 떠나 세속적인 일상에서의 도덕적 실천으로서 행복을 구현하는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입니다. 붓다의 네 가지 몸에 관한 개념[법신-보신(미세한 색신)-화신(중생의 근기에 맞춰 나툼)-지혜법신]을 근거로 <보성론>의 여래장에서 이르기를, ‘현재 마음상태 존재하는 허물과 붓다를 이룰 수 있는 근본 그리고 근치인으로서 마침내 청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객진의 허물이 모두 제거 되었을 때 객진청정신과 자신청정신을 구족하며 마침내 궁극의 깨달음을 이루게 됩니다. 붓다의 생을 요약한 것이 삼학(계정혜)입니다. 붓다께서 몸소 보이신 출가의 모습과 실천은 계학, 6년 고행은 정학, 이를 말미암아 이루신 보리의 정각이 혜학입니다. 붓다의 이러한 행장은 수행자의 본보기가 됩니다.
■무명은 어떻게 없애는가 반드시 체득 즉, 진여를 실질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필요한 것이 일념의 삼매입니다. 이것은 정념(바른 기억)과 정지(알아차림)를 통해 가능해집니다. 이를 일상에서 점차 발전시키면 삶에서 영위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지닌 덕성들과 집중력을 발전 시켜서 수행을 통해 인식에 만족하는 것에 머무는 것을 넘어 분석함으로써 깨달아갈 수 있습니다. 대상을 진여로 삼아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삼매를 이룬다면 그에 해당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정지와 정념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불방일로서 진행됩니다. 이 불방일은 계학을 통해 진전시킬 수 있습니다. 해탈 여부의 관건은 전적으로 나 스스로의 문제입니다. 붓다의 세 가지 법륜에는 초전(사성제), 중전(무상법륜으로서 반야부로서 인과를 다룸), 삼전(유식의 견해를 중점으로 한 <해심밀경>이 삼전법륜의 하나, 의식을 주요로 다룸)이 있습니다. 허물은 우연하고 일시적인 객진이기 때문에 대치법을 통해 완전히 번뇌를 끊을 수 있습니다. 반야경에서는 직접적으로는 공성차제를, 숨은 의미로는 현관차제를 설합니다. 미륵보살의 <현관장엄론>에는 반야바라밀의 비전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의와 불요의를 시작으로 선정을 이루는 과정은 제8장에서 지관을 다루고 있습니다. 티베트의 논장으로 번역된 본으로는 원측스님의 <해심밀경소>가 있습니다. 미륵보살의 저서 <중변분별론>과 무착보살의 <유가사지론>에서도 지관수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까규의 마하무드라(지관을 이뤄가는 과정), 닝마의 족첸수행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수행의 단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관의 대상이 되는 공성의 견해는 비슷하지만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차이를 보이는 다른 저서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상요가의 탄트라에서도 지관수행을 주제로 다루기도 합니다. 쫑카파 대사는 ‘내가 알고 있는 일부 경서에 만족하지 말고 모든 경서를 폭넓게 배우고 익히도록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는 최상승 수행의 바탕이 되는 바를 머릿돌로 삼아 순차적으로 공부해 나가야겠습니다.
■지관이란 무엇인가 이는 불교에만 있는 고유한 것이 아닙니다. 외도에서도 수행으로 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관수행 없이는 도의 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외도의 지관은 무아의 지견 없이 세간에 초점을 두는 반면, 불교에서의 지관은 소승과 대승에 공통되며 현교와 밀교에서도 공통됩니다. 지관은 일념의 마음 상태에서 몸과 마음에 경안이 일어나는 깨달음의 상태이며 분석을 통해 진면목을 일깨운 상태입니다. 월칭보살은, ‘해탈을 원하는 자의 귀의처는 삼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의 해탈은 번뇌를 완전하게 끊은 공덕이 완전히 발현된 상태를 말합니다. 아집에 속박되어 있어 우리는 해탈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아의 지견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이러한 무아의 법을 설하신 분이 붓다이며 이를 수행하는 이가 승가입니다. 무아의 지견을 깨닫는데 있어서는 출세간의 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지수행을 해야 합니다. 해탈을 위해서는 번뇌를 끊어야 하기에 이에 대치되는 무아수행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해탈을 위한 수행은 소승의 수행이 됩니다. 궁극의 이타(일체종지)를 이루기 위해 지관을 수행하는 것은 대승의 보리심을 근간으로 삼습니다. 정광명을 현현하기 위해 지관수행을 하는 것은 밀교의 지관수행입니다. 동기에 따라 희구심에 의해서 수행하는가, 개인의 해탈이 목적인가, 보리심을 목적으로 하는가에 따라 소승 대승 그리고 밀교의 지관수행으로 구분됩니다.
■지혜와 공(空) 선취에 나기 위해서는 인과법을 통한 지혜로서, 일체종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보리심을 바탕으로 한 공사상이 절대 요구됩니다. 해탈을 구하는 마음을 염리심(출리심)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공성에 대한 바른 지견 없이는 낼 수 없습니다. 단순한 공성의 지견이 소지장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보리심 수행을 근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보리심을 희구하는 동기를 낼 때만 소지장을 대치하여 최종의 성불에 이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인아집과 법아집 그리고 신견과 같은 지성적인 번뇌를 대치하는데 있어서도 자비심과 자애심의 방편을 요구합니다. 보리심의 근본이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출리심이 일어나야만 가능합니다. 붓다께서 처음 ‘고통을 알라.’고 설하셨을 때, 이 고통은 ‘행고(이 몸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행고에 대해서 하나의 고로 인식하고 이로서 벗어나고자 하는 출리심이 생겨야만 괴고(일상에서 느끼는 변화성을 느끼는 부분)와 행고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를 다룬 것이 <람림>의 중사도입니다. 선지식께서 말씀하시기를 ‘초석이 견고할수록 서까래를 얹을 때 보다 튼튼하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행고를 고로서 알고 이를 제대로 인식했을 때만 타인의 행고가 멸하기를 발원할 수 있습니다. 이로서 무주처의 열반에 드는 것이 상사도의 단계입니다. 보리심을 일깨우는 과정에서 원보리심의 발심 의식을 하고 열렬한 마음을 내어 보살계를 받아 지녀 여섯 가지 바라밀행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바라밀행의 마지막이 선정 그리고 지혜입니다. 이 선정 지혜 수행의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지관수행’입니다.
■마음의 아홉 가지 머물음 마음의 상속은 습기를 의미합니다. 불상응행으로서 조건이 생기면 현행되는 ‘종자습기’와, 잠재력의 힘을 지닌 ‘잠재습기’로 다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를 해석하면 ‘가자. 가자. 저 피안을 넘어서 가자. 보리에 안주하자.’는 의미로 수도 5위의 도차제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자량도로서 대승에 입문하여 이때는 지관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두 번째의 가행도에서는 지관수행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문사수 가운데 수를 체득한 경지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의 ‘가자’는 견도의 경지로서 성인의 경지에 오르는 수행의 단계입니다. 대상을 잊지 않고 바르게 기억하고 있는가는, 정념으로서 바로 알아차리고 있는가는 정지로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상에 계속 마음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혼침과 도거는 일어납니다. 그 때마다 대치법으로서 대상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둘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저절로 대상에 마음을 둘 수 있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이 구주심 가운데 아홉 번째 단계입니다. 이 때 몸과 마음에 경안이 일어납니다. 이것에 습이 들면 초선정에 들게 됩니다. 이것이 지의 본질입니다. 몸과 마음에 경안이 일어나 저절로 대상에 마음을 두는 삼매의 상태에서 무아를 분석하고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 관수행입니다. 앞서 말한 지는 관상이며 관은 관찰지입니다. 지를 성취하면 무아와 윤회의 허물에 대한 산란이 없습니다. 선행을 지음에 부족함이 없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지수행은 선행을 하는데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이 오롯이 머문다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마음의 변화 역시 지혜와 방편으로서 가능합니다. 분석적인 방법의 수행으로서 진실된 뜻을 알고 이로서 확신을 일으킵니다. 이는 더 나아가 믿음으로 구축되며 확대되어 희구심을 일으킵니다. 이는 정진력으로 이어집니다. 일체종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점증적으로 분석적인 방법으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지혜가 하나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지수행입니다. 그렇기에 ‘지’와 ‘관’은 쌍수를 이루어 수행돼야 합니다.
■스스로를 구제하는 길 지수행을 하는 방법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자량이 요구됩니다. <해심밀경>에서는 ‘모든 불교 수행자가 금강승의 본존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각기의 근기가 모두 차별된 이유입니다. 선차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오직 선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세 가지 나태함을 끊도록 해야 합니다. 지수행으로서 몸이 가벼워지고 의식이 보다 명료해짐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진을 일으킬 때는 삼매를 구함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지를 얻고자 하는데 강한 성취의 의지를 필요로 합니다. 인무아가 있습니다. 이는 ‘나’가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식에서는 나의 습으로 인해 생각하는 것일 뿐 대상 그 자체에는 외경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외경과 내가 인지하는 의식의 관계성에 대해 진실로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본래 그렇지 않다는 중관을 통해서도 보다 심도 있게 나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반야부 경과 논서에서도 의식과 대상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키려 하면 할수록 어느새 자연히 나의 의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치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연기법 수행으로 가능합니다. 연기한 나는 오직 오온에 의지해 이름 붙여진 것일 뿐임을 알 때 비로소 윤회를 대치하게 합니다. 번뇌와 탐욕의 허물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때 부정관 수행이 큰 도움이 됩니다. 분노와 탐착, 치심 그리고 아만심이 현행될 때 이들을 어떤 식으로 대상을 삼아 대치법을 써야 하는가. 이 역시 지수행에서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지수행을 행하는 초심자 가운데 유독 산란함으로 치우칠 때는 눈을 뜨고 한 곳에, 지긋이 대상에 집중하도록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수행에서는 감각기관을 끊고 오직 마음 의식의 영상을 소연으로 삼습니다. 지수행으로서 지난 과거와 미래에 관한 생각은 잠시 쉬고 현재 상태 의식만을 남깁니다. 현재 상태에서 지수행에서 마음을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명과 료의 상태를 유지토록 해야 합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분별이 없이 현재만을 보면 ‘텅 빔’과 같은 현상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분별이 없어진 빈 상태입니다. 이를 지속시켰을 때 비로소 마음의 자성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지속적인 수행을 하다보면 바른 수행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정지’의 상태가 됩니다. 이는 현재의 거친 의식이 점차 정광명의 순수 의식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쫑까파 대사는, ‘우리가 지닌 기와 혈맥(챠크라)을 통해 정광명을 들어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광명이 드러난 상태에서 마음의 공성을 깨닫는 수행이 가능해집니다. 밀교에서 정광명이 일어난 자리에서 승의의 광명이라고 칭합니다. 현교에서 승의는 진제를 의미합니다. 반면 밀교에서 승의는 진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승의는 불교만의 용어가 아닙니다. 총체적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삼종요도>에는 ‘연기를 보지 못하면 붓다가 설하신 진여를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경과 논이건 간에 한 가지에 집착하게 되면 많은 모순을 낳습니다. 포괄적으로 다양하게 공부하여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하도록 해야 합니다. 세간인들은 특별한 가르침에 쉽게 솔깃하기도 합니다. 앞선 성취자들께서 검증하시고 일깨우신 바를 넓고 신중히 받아 들여야겠습니다. 삼매의 수행법을 바로 알아 수행한다면 구주심이 자연스럽게 순차적으로 일어납니다. <해심밀경>에서는, ‘정념과 정지를 지속적으로 의지했으나 노력이 없이 삼매에 들었다면 이는 지에 들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몸의 느낌이 확실한 경안의 상태에서 지속되면 마음도 따라 경안이 일어나 기운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분별하는 의식이 지닌 흔들림을 조종하는 기운(에너지)이 일어나면 초선정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수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삼매력을 배양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관을 이루는 버팀목이 됩니다. 성취된 지를 공성을 통해 관으로 이루어 가는 것을 지관쌍수라고 합니다. 오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관수행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밀교수행에 있어서도 지관수행은 필수 불가결합니다. 불교 내의 대소승과 현밀교를 막론하고 지관수행은 모든 수행의 핵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