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남미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람살라로 돌아온 14대 달라이라마(텐진갸초, 76세)는 9월 23일부터 3일간 열린 티베트불교 지도자 회의에 참석, 15대 달라이라마 옹립 여부에 관한 입장을 밝혔다. 내용은 그의 세납 아흔 세에 즈음하여 후대 선정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과 함께 티베트 역사와 달라이라마의 관계를 서술한 14장의 서신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후 중국의 서장자치구(티베트) 동부에 위치한 끼르띠사원에서 학인 승려 두 명이 소신공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이터를 선두로 한 외신이 가장 먼저 소식을 외부에 알렸으나 중국정부는 사망 여부 등의 진위를 함구하면서 우선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어서 또 한 명의 승려가 소신공양했고, 총 일곱 명의 티베트 승려가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면서 중국 내부의 인터넷 검열과 보안의 한계를 시사했다. 현재까지 중국내에서는 ‘티베트’와 ‘달라이라마’는 검색 차단어로 설정되어 왔다. 더불어 중국이 외교 경제적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외적 지원을 아끼고 있지 않은 현재, 달라이라마의 남아프리카 방문 비자가 불허되면서 갈등은 고조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10월 14일, 티베트청년의회(Tibetan Youth Congress)는 다람살라에서 집회를 열고 중국내 종교의 자유 억압과 티베트인권 탄압을 규탄하는 가두행진을 열었다. 이 집회는 19일 인도 델리에서 10만 명 티베트인들의 대형 집회로 확대되면서, G20개최국인 프랑스에서도 연달아 개최되었다. 그러한 10월의 다람살라에 1일부터 4일간 타이완 불자들의 요청으로 달라이라마 법회가 열렸다. 법문은 용수보살(Nagarjuna)의 ‘법계찬탄문(Praise of Dhammadhatu, Choying Toepa)’을 주제로 했다. 이번 법회에는 일천여 명의 내외 중국인을 비롯해 52개국에서 다양한 외국인들이 동참했다. 달라이라마는 법문을 열며, “보리심과 공성을 깨우치기 위해 지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불보살님들이 몸소 보이신 수행 자체를 바로 알게 됐을 때 비로소 금강승에 입문할 수 있습니다. 이번 법문을 통해 모든 중생이 지닌 무자성의 본질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다음은 법문의 요지)
불법이란, 교리에서는 연기법을 행위에서는 비폭력을 의미입니다. 연기법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인과 연기와 의존해서 이름 붙여진 연기가 그것입니다. 인과 연기는 불교의 4대 학파가 모두 인정하는 것이며, 의존하여 이름 붙여진 연기법은 중관학파 중에서도 귀류 논증에서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비폭력이란, 자신의 가능한 범위 내에서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다른 중생에게 피해를 끼친 원인으로 자신에게 고통이 옵니다. 이것이 인연법에 의한 연기법입니다. 이를 근거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고제의 세 가지의 괴로움 가운데 복덕이 아닌 행위에 의해서 우리는 삼악도에 태어나게 됩니다. 복덕이 아닌 업을 짓지 않음으로서 삼선취에 태어나게 됩니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면 줄수록 삼선취에 태어날 확률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용수보살은 <보만론>에서, ‘삼선취와 해탈 그리고 열반을 규명키 위해서는 인과 연기법을 통한 삼단 논법으로서 가능하다.’고 논하였습니다. 어느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은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모든 행복은 조건과 원인으로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이 그 대상이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고 느끼고 여기는 것과 다르게 실체는 본래 그러하지 않음을 앎으로써 시나브로 해탈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샨트락시타의 제자 까말라실라의 저서 <주진여인명학> 주석서에 이르기를, ‘인과 연기법을 통해 삼선취를 알며, 의존하여 이름 붙여진 것임을 알아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 지구상의 사람들은 고통과 폭력을 근저의 두려움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례로, 미국의 911테러 이후 미국인들은 공포를 기본으로 마음에 품게 됐으며, 정부 내 규범도 더욱 강화됐습니다. 더불어 아프카니스탄 국민 역시도 큰 공포를 가지고 삶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상의 혼란을 초래하는 폭력을 금하는 것은 다음 생을 위한 것만이 아닌 이생에서 추구해야할 최상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을 원한다면, 행복의 인연법에 좀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마음의 혼란을 초래하는 탐욕, 자만, 질투 등은 사랑과 자애의 마음을 낼수록 점차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사회 규범을 준수하기 이전에 자신 스스로가 지니는 올바른 규범으로서 사회에서 말하는 도덕을 성립할 수 있습니다.
삼독 번뇌를 소멸토록 하소서 지혜의 광명을 발하게 하소서 보살의 위의에 입문토록 하소서
삼독의 번뇌는 공성을 깨우친 지혜로서만 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탈을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삼선취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공성과 지혜를 함께 수행할 때 비로소 보살에 입문할 수 있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몸에서 시작돼야 합니다. 삼선취 가운데 인간의 몸을 온전히 갖춰야 합니다, 아리야데바는 <사백론>에서, ‘복덕이 아닌 것을 먼저 끊고, 나를 끊은 후에 일체를 끊도록 하라.’고 논하셨습니다. 복덕을 끊는 것은 타인을 헤치는 것을 끊는 것으로 열 가지의 불선행을 금함으로서 삼선취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의 공통 사항입니다. 이어서 ‘나’를 끊는 것은 불교의 독자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는 해탈을 의미합니다. 의존하여 이름 붙여진 연기일 뿐임을 알아 오온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완전한 해탈을 이룹니다. 이때는 번뇌장을 끊는 순간입니다. 아집으로 인해 우리가 지어왔던 번뇌장뿐만 아니라 공성을 깨우친 지혜를 바탕으로 소지장까지 끊음으로써 일체 종지 즉, 부처의 경지라고 합니다. 소시장을 끊기 위해서는 방편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복덕 자량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비로소 아는 이가 참으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붓다의 법 가운데 연기법을 보면, 몸의 질병조차 오로지 병의 원인이 되는 것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마음과 그 외부의 여러 조건 즉, 마음과 환경 그리고 경제적인 여건과 같은 것이 함께 조화를 이룰 때에만 쾌차가 빠르다고 하였습니다. 일생을 경제를 전공한 사업가들이 그토록 돈에만 열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파산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오로지 현재의 손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장기적인 넓은 시야를 갖추지 못한 이유입니다. 인과 연기법을 바로 알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건강과 경제의 어려움이 왜 발생했는지 어렵지 않게 해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과 무관한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손가락으로 칭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해 혐오감을 드러냅니다. 일전에 미국에서 만난 마음치료학자 아론백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어느 특정 대상에게 화를 냄에 있어서 세분화시키는 형상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 세분화가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혐오감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분노하고 타인을 혐오합니다. 재미난 것은 자비심 역시 바라는 마음입니다.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의존하여 생하고 소멸하였음을 어리석은 이가 어찌 알겠는가. 무자성은 법계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진제와 속제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분석과 관찰 없이 일상에서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속제’라고 합니다. 아리아데바의 <사백론>을 주석한 월칭보살의 게송을 보면,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본래 존재하는 것이 있지 않음으로 무아이다.’ 즉, 자신과 ‘나’는 차이가 있습니다. ‘무아’는 ‘자성으로 공하다’는 것이며, 나는 자성으로 공하기 때문에 무아가 아닌 광범위한 범위로서 모든 존재하는 것이 자성으로 있다는 자체를 끊었을 때 무아라고 정의합니다. 분석과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그 어느 것도 규명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제’입니다. 나무와 흙 그리고 동물과 어우러진 대상을 우리는 ‘산’이라고 칭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산을 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깊이 분석해 보면 ‘이것이 산이다.’라고 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다른 예로, 현재 ‘나’는 있고,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분석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라는 생각이 ‘나’라고 여기는 경우와,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의식이 ‘나’라고 여기는 경우, 경부 유가사에서 이르는 아뢰야식에서 일으키는 ‘나’라고 여기는 경우 그리고 중관학파의 입장에서 대상이 자성으로서 있어서 ‘나’를 말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실체적으로 규명했을 때는 ‘나’라고 하는 보특가라는 손으로 가리킬 수 없습니다. 깊은 수면에 취한 제6식의 ‘나’ 역시도 그러하며, 기절한 ‘나’ 역시도 이와 같습니다. <중론> 제2장에서 가고 옴을 분석한 행을 보면, 원소가 독립적으로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극한 티끌 조차도 전후좌우 방향에 의지해서 있음을 알게 합니다. 어느 순간의 시간을 이야기 하고자 할 때도 ‘이것이다’라고 잘라 분석 할 수 있는 규명할 대상이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해서 이름 붙여진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없는가? 몸과 생각하는 나가 있으나 규명할 ‘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해서 이름 붙여진 것일 뿐입니다. 무명에 의한 훈습 때문에 자체적으로 있고 실재한다고 여겨온 것입니다. 티베트에서 정의하는 ‘원인’이란 이로움을 주는 것이며, ‘결과’는 이로움의 행위의 대상입니다. 원인이 과에 의지하고 과 또한 원인에 의해 존재합니다. 중관학파의 많은 가르침 가운데 월칭보살께서 이르시기를, ‘대상을 인지하는 의식조차도 대상에 의한 것이며 이 대상 또한 의식되기 때문에 대상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유식학파에서 자증분을 통해 이르기를, ‘이 의식이 대상으로서 자증분이 있으며, 이 자증분으로서 이 대상이다.’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속제의 관점이며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고유함은 없습니다. 순간 그것을 볼 때 느껴지는 실체는 없습니다. <중론> 제20장에서 실유론자들이 논박하기를, ‘모든 자성이 공하다면 그 어떤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것이 세간이자 출세간이다. 보이는 모든 것을 부정한 용수보살은 미친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용수보살이 답하기를, ‘자성으로서 공하기에 행위와 행위자 그리고 그 행위자의 행위가 있다. 실유론자가 말하는 자성으로 있음은 존재를 불허하지만 자성으로 공하기에 세간과 출세간은 모두 있을 수 있다. 실유론자는 붓다가 설한 공성의 목적과 뜻에 무지하여 그리 논하였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공성의 지혜를 깨우쳤다면 속제의 논의 단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진실로는 있지만 자성은 있다.’와 같은 관점은 오류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희론을 여읜다는 것은 실상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 실상이 바로 공성입니다. 의존하여 비롯되었기에 공성입니다. 어떤 존재하는 것의 실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함을 알아 단견을 끊고, 의지하여 존재하기에 중도이며, 이로써 상견을 끊습니다. 토끼는 뿔이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없는 것과 의지해서 존재하지 않는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없음을 즉, 단견을 끊음을 비유합니다. 황소는 뿔이 있습니다. 의지해서 존재하는바로써 상견을 끊음을 비유합니다. 일반 선서의 법이 중도임을 <중관> 33송을 통해 이른 것입니다. 거울에 비춰진 나의 모습이 마치 수면에 담긴 해와 달과 같다고 여겨야 합니다. 의존하여 비롯된 바를 깨달아 무아를 증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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