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의 <입보리행론>법회 동남아시아 불자 요청으로 열려
인도 다람살라 = 가연숙
베트중앙행정부 신임 총리 롭상상게(Robsang Sangay, 43세)의 취임식이 있던 8월 8일 이후, 중국정부는 자국 내 서장자치구(티베트)의 문제를 티베트망명정부 측과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외신을 통해 보도했다. 이에 지난달 8월 25일 유럽 5개국 법회를 마무리하고 50년 이상 머물고 있는 제2의 고향 다람살라로 돌아온 14대 달라이라마(텐진갸쵸, 76세)는, 유럽 순방 기간 동안 젊은 총리의 패기에 깊은 신임을 보이며 지지했다. 이어서 지난 9월 2일은 티베트중앙행정부의 민주주의 망명정부 수립 51주년을 수립한 뜻 깊은 날이기도 했다. 이날 롭상상게는 인도 히마찰프라데시 주지사(Prof. Prem Kumar Dhumal)와 대동한 기념식에서, “중국정부의 독재 식민 지배하에 살고 있는 티베트 동포들 보다 이곳 망명정부에서 민주주의 삶을 꾸리고 있는 티베트인들이 보다 진보됐다.”고 연설했다. 이어서 “최근 중국 쓰촨성에서 달라이라마의 귀환과 티베트의 자유를 주장하다 지난 8월 15일 소신공양한 승려(Tsewang Norbu, 29세)의 희생은 현재 중국의 간사한 두 얼굴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지 시공간을 달리할 뿐 부조리의 역사는 되풀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중국과 티베트는 과연 화해 가능한 교섭 지점을 찾을 길이 없는 것일까. 중국은 달라이라마를 가리켜 중국정부의 정책을 교란 시키는 악마에 비유했다. 달라이라마는 이러한 중국의 폭언에 대해 “어린아이 같다.”고 부언 없이 명료하게 평했다. 1989년 세계는 비폭력 노선으로 티베트의 자치를 위해 독립을 이끈 이러한 달라이라마의 공로를 인정해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바 있다.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모두가 행복을 위하고 선을 추구하지만 실상은 공평치 않은 듯 보인다. 공공의 선이 아닌 이유다. 얼마나 큰 조건의 인연이 만나야 궁극의 선이 일상에서 충돌 없이 평등하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그리고 드디어 달라이라마의 해외 일정 2달여간의 긴 갈증을 달래는 법회가 다람살라 쫄라캉에서 개최됐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무슬림을 주된 신앙으로 삼는 국가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의 불자들의 요청으로 8월 30일~9월 1일 3일간 열리게 된 것. 이번 법회에는 25개국의 외국인을 포함한 총 6천여 명의 청중이 관심을 보였다. 9월 중순이면 스웨터 사업을 위해 인도 각지로 떠나는 티베트인들도 이번 법회에 대거 참여했다. 티베트인들에게는 이번 법회가 내년 초 인도 비하르주 보드가야에서 개최 예정인 ‘칼라챠크라법회’를 기약하는 올해 마지막 법회가 되었다. 주제는 7~8세기 인도 나란다승원 출신의 중관학자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 전체 10장 가운데 ‘보리심 공덕 찬탄품, 죄업 참회품, 보리심 전지품, 보리심 불방일품, 그리고 호계 정지품’ 총 5장을 주제로 했다. 달라이라마는 법회를 열며, “샨티데바는 보리심 수행을 최고로 여기고 그 공덕을 찬양한 분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긍정의 습을 들이겠다는 선한 동기로써 이번 법회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법문의 요지)
#목적 없는 행위는 의미가 없네 스스로 수행을 하는 바에 세간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신심과 자비심은 거듭 사유함으로서 증장되는 마음의 힘입니다. 선업은 결코 저절로 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깊고 두터운 번뇌의 근원인 무지만이 시작을 알 수 없는 이래의 뿌리로 뻗어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외부의 물질이 지닌 해악을 바르게 알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삼보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악이 멸한다면 일찍이 세상은 평안을 누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지닌 개개인의 모습만 보더라도 실질적인 선한 마음의 변화를 추구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확실한 것은 외부의 강압된 힘은 결코 근본적인 내면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의 한역본에는 ‘오온개공(五蘊皆空)’으로 역경된 것이 티베트본에는 ‘오온 조차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에 대한 가설의 바탕이 실체를 찾았을 때는 그 조차도 무자성하다.’는 것이 산스크리트본의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실상의 현실을 바로 알아 변화를 분석하며 받아들이라고 일깨웁니다.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는 미세한 의식을 헤아리라고 합니다. 실상은 상호 의존적입니다. 행복을 예로 들었을 때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같고, 그 행복을 느끼는 자신이 주체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 주체가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려 보면 실체를 절대 규명할 수 없습니다. ‘나’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일 뿐 독립적이지 않은 것이 실상의 ‘나’입니다. 즉 불교는 연기의 사상인 것입니다. 급속한 물질적 발전의 시기인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가난의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번영과 동시에 내면의 평화 역시도 균형을 맞춰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에 들어 신경과학 분야에서는 전반적인 이러한 상황이 마음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보편성에 입각한 도덕과 정의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이타심과 연민 즉 사랑을 다시 정의하는데 이르렀습니다. 행복을 구하는 마음은 합당한 근거가 있는 동기입니다.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치 않음에는 특별한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구하고자 하는 진정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비로소 대승보살의 자량도에 입문하게 됩니다. 두려움 없는 나의 완성은 오직 善業뿐 지난날 즐겨왔던 향락 가운데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저승사자에게 붙잡혔을 때 오직 공덕만이 스스로를 지켜줄 것인데 나는 이 역시도 쌓지 못 하였네
처음 붓다께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신 것은 근본 바탕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붓다는 자생이 아닌 범부의 상태에서 도의 과정을 거쳐 성불을 이룬 분입니다. 스스로 붓다가 되는 길을 보이신 것입니다. 성불의 과정은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와 같은 차제에 순응합니다. 원인도 결과에 의지한 것입니다.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에 원인이 성립됩니다. 행위자와 행위의 대상 역시 같은 이치입니다. 일상에서 선한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은 것은 인간의 몸을 받은 이래로 번뇌에 익숙하도록 습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몸이란 업과 번뇌로 인연 지어진 것입니다. 또한 몸은 의식과 연관 지어져 원하는 것을 가까이 하고자합니다. 더욱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감당키 힘든 번뇌에 휩싸이게 됩니다. 현재부터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임종 직전에 선한 마음을 일으키기란 불가능해 지고 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점에서 길들이기 시작해야만 비로소 내생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을 할 때 그 대상과 그 전의 의식인 등무관연이 연결의 고리를 만들어 또 하나의 의식을 발생시킵니다. 근치인을 생각할 때 가장 미세한 의식이 전생과 후생을 성립케 합니다. 인간의 몸이 무너지는 것에는 원인과 조건이 존재하지만 미세의식만은 지속됩니다.
#대승의 입문, 보리심을 일깨움 보리심이란 정법의 우유에서 뽑아낸 버터의 정수와 같습니다. 보살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아집이 적고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이타심이 큽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이타심보다 이기심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로서 있다고 여기고 내가 진실로서 존재한다는 마음이 있을 때 자만과 이기심이 생깁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건강한 몸을 지닌 이라면 오체투지로써 참회할 수 있습니다. 진언 또는 스승을 관상함으로서도 참회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탁월한 방법은 보리심을 일으켜 이타적 실천으로 발현하는 것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 정진하는 것이 선행입니다. 깨달음의 씨앗인 선업을 잘 키워 해탈의 나무로 키워갈 때 진정한 행복을 얻습니다. 어둠의 무명을 밝히는 등불의 기름이 바로 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을 낸 수행자는 길을 잃은 이들의 안내자가 되고 의지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용수보살께서 <보만론>에 밝힌 바와 같이, ‘중생이 원하는 모든 것이 되어서 아낌없이 베푸는 자가 되도록 하소서.’라는 구절처럼 오로지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해서 국한됨 없이 포용하는 이가 되십시오. 스승이 묻습니다. “그대는 보살인가?” 보살이 된다는 것은 보리심을 마음에 일깨우는 것입니다. 지혜를 갖추고 용기를 지닌 자만이 보리심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보살계를 마음에 수지함으로서 스스로 보살행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중생을 위해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이는 장님이 쓰레기 더미에서 마치 보물을 얻은 것과 같으니, 보리심이 생겨났음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리심은 오로지 타인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로써 상호의 믿음과 신뢰는 더욱 굳건해집니다. 윤회의 길에서 헤매다 지친 중생들의 휴식처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보리심입니다. 중생이 지닌 오온이 윤회를 이끕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그 오온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보리심을 낸 것은 번뇌의 열을 식혀주는 달이 떠오른 것과 같습니다. 주의해서 상처를 살피듯 경계 없이 마음의 상처를 돌보십시오. 마음을 다스리니 고통이 오고 간곳이 없음을 여실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윤회의 길을 떠도는 중생이 안락을 바라는 바와 같이 중생의 여행에 최상의 만족을 주는 길은 보리심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스스로 주체가 되어 보리심을 일깨워 보살계를 수지하고 항시 보리심을 관상함으로서 마음의 허물을 없애는 것을 거듭 사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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