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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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각기 다른 법복 입은 삶의 수행자라네
헝가리 부다페스트서 ‘티베트 불교 입문’ 법문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인도 다람살라 = 가연숙
14대 달라이라마(텐진갸쵸, 76세)는 해마다 8~9월이 오면 해외 순방 일정으로 바쁜 일과를 보낸다. 지난 8월 8일 구루린포체(파드마샴바바)의 생신날에 맞춰 거행된 중앙티베트행정부 신임 총리 롭상상게(Robsang Sangay, 43세)의 취임식이 있던 바로 다음날인 9일, 달라이라마는 스위스행 여정 길에 올랐다. 9월 말 서남아시아 불자 그룹의 연합 법회가 열리기 전까지 꼬박 2달여 간 프랑스·에스도니아·핀란드·멕시코·아르헨티나·브라질 등의 법회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달라이라마의 76세 생신에 맞춰 한국에서는 ‘티베트하우스코리아’가 출범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당시 달라이라마의 친동생 텐진최걀(Tendzin Choegyal, 응아리린포체)과 부인 린첸칸도(Tibetan Nuns Project 총재)가 한국을 방문해 달라이라마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기사가 다람살라에까지 전해졌다. 21세기를 빗대어 소통의 시대라고 칭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경제와 정치적인 이유로 인간애와 박애의 상징적 인물인 달라이라마가 한국 방문을 거부당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이번 호에서는, 지리적으로 러시아와 유럽의 가운데 위치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 14대 달라이라마의 법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해 9월 18~19일 양일간 팝라즐로스타디윰(Papp Laszlo Sportarena)에서 진행된 법회에는 유럽 전역 이만 사천 여명의 청중이 관심을 보였다. 또한 러시아 불자 300여 명을 포함 유럽에 체류 중인 티베트인들도 대거 참여했다. 더욱이 이번 방문 기간 동안 부다페스트 시장은 달라이라마에게 명예 시민권을 수여하는 등 각별한 환영 행사를 펼치기도 했다.
이번 행사에서 달라이라마는 티베트 불교의 사상적 기반과 대승불교의 정신을 알리는 것 이상으로 이 시대에 바른 인류애의 길은 무엇인가 재 조망하는 시간을 가졌다. 달라이라마의 헝가리 방문은 이번이 일곱 번째다. 달라이라마는 1959년 중국정부에 대항했던 티베트인들의 민중 봉기에 빗대어, 1956년 헝가리의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면서 “격동의 시기, 소련에 대항하던 민주화 운동 당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해야 했던 아픔의 역사를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오늘날 재 승화시켰다.”며 러시아와 서유럽의 문화를 통섭해 헝가리 고유의 독자적인 문화로 재창조한 헝가리인의 정신을 극찬했다.
유럽인들이 달라이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락한 유럽 가톨릭에 대한 역작용일까. 헝가리의 불자가 10퍼센트에 남짓함에도 불구하고 해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힘사’ 인도어로 ‘무폭력’을 의미하는 아힘사는 달라이라마의 삶을 상징하는 또 다른 수식어였다. 달라이라마는 21세기 마하트마간디(1869~1948)에 견주어지는 현대의 성인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종교가 성인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달라이라마라고 하는 한 인간의 행적이 비추는 청정한 진실의 목소리가 종교를 초월한 존경심으로 이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영적인 충만감에 목말라했던 유럽인들은 세기의 성인의 이번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었다.
(다음은 법문 요지)

티베트불교는 인도의 정통 날란다 승원의 교육 체계를 따르고 있습니다. 범어(산스크리트어)를 저본으로 번역된 티베트 불교는 용수보살(나가르주나)에 의해 중관사상으로써 꽃을 피웠습니다. 8~9세기 경 인도 날란다 승원의 대 학자 샨타락쉬타의 노력으로 티베트에 도입된 인도불교는 그의 제자 카말라실라와 중국 선종의 대 학자 마하연(김화상)과의 논쟁(삼예)에서 승리한 이후로 ‘일체 제법은 공(空)하다’는 중관 입장을 따르게 됐습니다.
‘나’와 ‘나 자신’에 관한 문제는 인류가 지닌 보편적인 화두입니다. 고정된 ‘나’의 없음을 바르게 실천하는 불자는 잘 압니다. 대부분 로마가톨릭을 신앙해온 헝가리와 주변국은 창조주를 뿌리 삼아 인류사를 정의하는 문화를 따라 왔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계 유지의 핵심은 사랑 즉 자비심입니다. 그 근본은 불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불교와 모순되는 점이 있다면 인연으로서 생멸하기에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무상성과 창조주라고 하는 불변의 고정된 존재성의 관계입니다.
인도에 불교가 생겨난 이후 인도 문화는 불교와 쟈이나교를 중심으로 융성했습니다. 무수한 인류와 문화가 공존하는 인도에서도 나(아트만)와 무아(無我)는 하나의 결론으로 매듭지어지지 못한 논쟁의 핵입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는 모든 발전은 이전의 빅뱅(우주 대 폭발)에 기인했으며 시작을 알 수 없는 그 이전의 빅뱅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음의 조화 역시 이와 같은 원리로 인류사와 흘러 왔습니다. 나의 몸이 여기에 있고 천만 번의 세대가 미래로 흘러간다고 했을 때 나의 몸 또한 빅뱅을 거듭해 새로운 인연의 연결 고리로 작용되어 인류의 대를 이어갈 것입니다.
마음의 힘은 단순히 뇌의 작용에 반응하는 것일까요. 현대 정신 과학자들은 이 물음에 대해 불교로부터 해답을 구하고자 합니다. 기억의 저 편에 존재하는 예상치 못한 능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몸을 조정하는 하드웨어가 마음인가 혹은 뇌인가의 물음에 대해 기독교에서는 부정적으로 폐쇄적 경향을 보이는 반면 불교는 적극적으로 열린 대화를 시도합니다. 현대과학은 해체를 통해 시대의 혁명을 주도하는 주체이자 인류 문명 발전사와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인간은 사망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까요. 그러나 심장이 작동을 멈춘 이후에도 여전히 뇌가 작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과학자가 이러한 경우에 처한 환자의 뇌를 실험했습니다. 뇌가 작용하는 것은 사고가 진행 중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직까지 현대 정신과학 분야에서는 인간의 신체와 마음 그리고 뇌의 관계를 생물학적으로 규명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마음의 조종자는 과연 누구인가요. 잠시 행복했다가도 금방 우울해지는 인간의 마음이 지닌 모순성(섭스텐스/톤트리뷰트)을 불교는 삼매와 지혜로써 다독이고 붓다의 길로 안내합니다. 불교의 독자적인 핵심 수행은 모든 자연적 순리를 인정하고 연기 관계로써 일체 존재성을 조망한다는 것입니다. 조화의 유지와 균형으로써 평안을 유지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긍정적으로 서로를 비출 때 인드라는 붓다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미처 한 세기도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마음은 지혜를 이상 저 편에 존재하는 구할 것으로 규정하고 ‘나는 지금 수행한다, 수행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구속하며 자리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보편적인 마음은 수행을 통해 세속의 세계에서 다른 차원의 극락과 적멸의 이상 세계(목샤)인 붓다로 이동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한 마음은 분별과 산란한 마음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나는 오늘 문제와 사건을 일으켜 보겠다.”고 다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정신 교육은 꾸준한 시간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개개인이 지닌 행복은 건강한 사회와 국가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모두가 각기 다른 법복을 입은 삶의 수행자입니다. 다른 인종과 철학 그리고 문화가 공존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추구하는 해답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나가르주나를 비롯한 날란다 승원의 선지식들은 모두 붓다의 이러한 메시지를 명쾌하게 전하고저 인생을 기여한 분들입니다. 무슬림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한다면 분명코 인류는 거역없는 무슬림 신도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와 가톨릭 등 다문화 종교의 시대를 영위하고 있는 우리는 꾸준히 지속 가능한 대화를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안에 인류 공존과 평화의 해답이 있습니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만연한 종교의 경계도 그 선을 나누지 않기를 권고합니다. 보살계를 내릴 때마다 저는 항시 강조합니다. 불자는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 그리고 승가에게, 기독교인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그리고 무슬림은 알라에게 귀의하는 시간이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인류는 자연과 더불어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삶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류는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동일체입니다. 오늘날 파괴된 자연을 바라보며 인간도 많이 상처 받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내면의 평온은 현대 인류가 절대 가치로 지향하는 바가 됐습니다. 붓다 석가모니께서 일찍이 깨우치신 바와 같이 연기의 지혜로 세상을 바르게 사유할 때 당신은 불교 안에 이미 들어선 수행자입니다.
독립된 자아가 존재한다면? 불변해야 함이 진리이고 인간은 절대 생로병사의 순환 고리를 밟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변화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별개는 모두 그 자체로써 소중한 연기의 실상입니다. 그것이 붓다가 깨우친 실상의 진리입니다.
미국의 한 과학자가 ‘인간의 진보가 언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그의 부정적인 시각이 염려스러웠습니다. 그의 사상적 이론의 시각이 그를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미래를 설계하게 만든 것에 대해 불법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확실히 다른 영역입니다. 치밀한 지식이 그를 대 학자로 만들어줄 지라도, 슬기로운 인간으로 완성시켜주기 어렵기에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연민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 이런 유형의 사람은 고집도 매우 강해서 고착된 세계관을 유연하게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지식을 향한 집착력이 한 과학자를 종말론자로 내 몰은 것에 대해 심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티베트불교만의 독특한 색채가 있다면 밀교의 탄트라일 것입니다. 심온한 그 내면을 언어로써 모두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욱이 유럽에서 티베트 밀교의 의미와 수행법이 와전돼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 사례도 있습니다. 명상은 붓다가 열반에 이르는데 핵심 수행법으로 활용된 관문이자 결론입니다. 평안한 고요 속에서만이 일체를 바르게 관하고 사유함으로써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티베트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차제로써 강조하는 지(止)와 관(觀) 수행법입니다.
11~12세기 인도의 대학자 ‘아티샤’를 시작으로 티베트 탄트릭이 시작된 이후, 14~15세기 게룩파의 시조인 총카파 대사에 이르러 학문적 수행의 꽃을 피웠습니다. 이 모든 근원은 인도 날란다 승원의 교육 체계를 따릅니다. 궁극의 반야바라밀의 법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문(聞)사(思)수(修)의 지혜에 근거해 수습해야할 것입니다.
일체 모든 삶의 가치는 행복에 준해야 하며 행복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근본 바탕은 평온이며 모든 가치는 인류 보편의 행복을 성취하는 방향성을 지녀야 합니다.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다채로운 자비를 맞이하십시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내가 먼저 나누고자 하십시오.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당신은 오탁악세에 아름답게 피어난 연꽃 위의 보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