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불자 요청으로 연기찬탄법회 열려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취재 정리 인도 다람살라 = 가연숙
베트남불교와 티베트불교, 언뜻 연관이 쉽지 않다. 우리에게는 평화 운동가이자 선승으로 프랑스에 망명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상센터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를 운영 중인 틱낫한(1926~ ) 스님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베트남불교의 선입견을 위한 지름길일 듯하다. 흥미롭게도 베트남은 동남아 여느 국가와 달리 대승불교를 따르는 불교국가다. 동남아시아의 불교국가들 대다수가 소승권인 이유다. 불교사적으로 중국 당대의 고승들은 인도로 향하는 구법 행에서 반드시 베트남을 경유해야 했다. 동시에 해상 경로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인도불교가 전래되는 등 베트남은 지리학적 특성상 불교 전래와 교역의 중심지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80%가 불교도일 뿐만 아니라 타 종교와도 조화롭게 어우러진 베트남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이다. 21세기 들어 종교는 단일한 주제 혹은 역할이 아닌 정치 경제 외교 분야로 더욱 복잡다단한 갈등 구조로 확대 되었다. 베트남 역시도 여과 없이 그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올해 7월에는 베트남 해상에서 미국과 해군 합동 훈련이 추진되면서 중국의 남중국해로도 동시에 여겨지는 베트남 해역이 중국 국방성의 경고를 받았다. 또한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칼라챠크라(Kalacakra)’ 행사를 주관키 위해 미국 워싱턴D.C에 방문한 14대 달라이라마가 16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비공개 회동하면서 중국 외교부는 미국의 내정간섭에 강력히 유감을 표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어서 17일에는 중국의 세계평화해방의 날 60주년임과 동시에 티베트 강제 무력 침공의 날이었기에 세계 인권단체는 일제히 티베트와 중국 그리고 미국의 행보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베트남 불자들의 요청으로 달라이라마의 법회가 열렸던 6월 28~29일. 다람살라는 몬순의 시작을 알리는 폭우를 연일 쏟아냈지만 청중들의 뜨거운 관심은 그 열기를 더해갔다. 달라이라마는 베트남 불자들의 요청으로 쫑카파 대사의 <연기찬탄문>을 주제로 한 법회를 열며, 삼보를 전체적으로 재 정의하고, 붓다의 법이 지닌 원인과 근거를 분석한 바른 바탕을 믿음으로써 지닐 것을 모두에게 강조했다. <다음은 법문 요지>
붓다의 반야부 경전은 크게 현관공성차체와 은희차제로 구분이 됩니다. 그 가운데 용수보살께서는 현관공성을 근거로 공성과 연기를 여섯 가지의 방식으로 논하였습니다. 이는 쫑카파 대사를 통해 티베트로 전승됐으며, 공성과 연기가 결코 다르지 않은 하나임을 체득하신 이후 붓다의 법을 찬탄하는 법을 저술한 것이 오늘 법문의 주제인 <연기찬탄문>입니다. <사백론>에 의하면, ‘연기에 의심을 지닌 이들을 대상으로 먼저 공성을 설하라.’고 하였습니다. 반야부의 핵심이 되는 《반야심경》은 대승불교권에서 통칭되는 반야의 정수입니다. 먼저 미륵보살의 <현관장엄론> 귀의문과 용수보살의 <중론> 찬탄문으로서 붓다와 불법에 귀의를 올립시다. 법(다르마, 췌)은 ‘지니다’, ‘건지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결과가 달라지는 도리야 말로 불교의 원칙입니다. 고통으로부터 건진다는 것은 감각으로부터 연유되며 의식이 없다면 감각은 느낄 수조차 없습니다. 이로써 감각은 의식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법은 ‘고쳐서 변하게 하다’는 의미 역시 지닙니다. 이는 다스림으로써 회복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는 이유입니다. 법의 목적은 다양한 종교관에 비추어 행복과 희망을 위함입니다. 불교, 자이나교, 수론학파만이 조물주와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모든 종교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일관됩니다. 불교에서는 아집을 반드시 끊어야 한다고 일컫기 때문에 무아(無我)를 강조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각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났으며, 행복과 불행을 겪는 ‘나’의 존재는 몸에 의지한 것일 뿐입니다. 모든 감정의 기복에 있어 구원자는 ‘나’ 자신입니다. 모두가 마음의 다스림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오온은 짐과 같고 인간(보특가라)은 그 짐을 든 이입니다. 불법에서는 마음을 다스려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합니다.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은 무지(無智)에 기인하며 그 단계도 여러 가지입니다. 붓다는 초전법륜에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통해 고통의 정의와 원인 그리고 끊고 수습해야할 것을 밝혔습니다. 무명(無明)으로 인한 행(行)이 식(識)에 쌓이게 되면서 열 두 연기는 돌고 돌며 서로 인과를 낳습니다. 무지는 ‘나’가 없음에도 ‘나’가 있다고 여기는 집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지닐 때야만 그릇된 무지를 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알파벳을 모르는 이가 있다고 했을 때 맹목적인 기도만으로 간절히 원하는 알파벳을 체득할 수 없습니다. 경험과 교육만이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안입니다. 이와 같이 무지를 벗어나는데 적절한 방편이 필요하듯, 불교의 아집을 벗어나는데 있어서도 보편적인 무아의 측면에 있어서 오온과 ‘나’가 의지하지만 따로함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침내 무명을 끊게 되면, 무명으로 인한 행이 끊겨 업이 식에 쌓임이 더 이상 없게 되고, 마침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기에 괴로움을 멸하게 하는 진리라고 하였습니다. 조건과 원인으로 인해 연기하는 것을 인과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방편에 있어서 대승과 소승으로 분류됩니다. 경지에 있어서는 크고 작음이 없으나 무한한 공덕의 사신을 성취해 모든 중생을 돕겠다고 발심하고 행하는 것이 대승입니다. 소승의 수행법만을 바탕으로 할 때 대승의 수행법에 들 수 없기에 소승을 제외한 대승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리에 있어서도 설일체유부·경량부·유식 그리고 중관학파로 분류되는 것 역시 각각 정의하는 연기법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연기법의 견해에 있어 인과 연기법은 네 학파 모두 동일하지만 중관학파에서 크게 차별된 관점을 보입니다. ‘의지해서 생겨나 의지해서 붙여진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찰나 변화하는 것만이 인과가 아닌 항시 하는 것조차 포함하는 것이 중관학파의 견해입니다. 여기서 ‘의지해 있음’과 ‘의지해서 비롯된 것일 뿐’의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의 본질은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연기는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인과연기법과 각 부분에 의지한 부분연기법 그리고 우리의 분석과 의식으로 인해 이름 붙여진 것일 뿐인 연기법입니다. 견해에 있어서도 미세함과 거침으로 구분되기에 무아 역시도 거친 무아와 미세한 무아로 구분되고 무지 역시 그러합니다. 오로지 분별로써 이름 붙여진 연기법은 가장 미세한 무아의 사상을 일컬으며 가장 미세한 공성을 의미합니다. 붓다께서는 스스로 분별로서 이름 붙여진 연기법을 보시고 위없는 지혜를 증득하신 후 자재하게 설법하셨습니다. 무지에는 미혹해 무지한 것과 전도된 견해로서 그릇됨으로 비롯된 무지 두 형태가 있습니다. 그릇된 분석으로서 전도된 확신을 지니는 것을 일컬어 ‘지혜번뇌’라고 합니다. 중관에서는 외경을 인정하지 않는 유식과 달리 외경을 인정합니다. 의식으로서 대상을 볼 때 대상을 진실로서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조차 진실로서 존재한다고 여기는데 이를 법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인식하는 대상이 그와 같이 보이지만 그 대상이 그와 같이 있지 않고 진실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님이 바로 법무아입니다. 실상의 진리를 파헤쳐 봤을 때 진리가 본래 있다고 여기는 것이 허물이며 연기일 뿐이지 이름 붙여져 존재하는 것으로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실체는 공하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여기는 그 자체가 맞는 것이라면 진실로서 분석해 보았을 때 실상이 분명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분명해 지는 것은 우리가 여기는 대상 자체가 실체가 없음을 증명합니다. 무아는 즉 연기입니다. 용수보살의 <중론>에 의하면 붓다의 종자가 ‘연기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미세한 연기의 진리로서 해탈로 향할 수 있습니다. 조건에 의지해 생겨난 것은 실재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자체에 자성이 없는 이유입니다. 원인과 조건으로 과가 생겨나는 것에 있어 본래 자성이 없기에 우리가 보는 그 자체와 같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의식에 비춰지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기준으로한 선과 악에 집착하는 것도 그릇된 분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의 근기와 서원에 따라 많은 성자들이 진리를 설했지만 연기법을 설하신 분은 오직 석가모니 붓다입니다. 근기에 따라 받아들이고 건지며 끊어야 할 바를 잘 알아 연기로서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인과의 연기와 의지에 이름 붙여졌을 뿐인 연기를 바로 알 때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거론할 때 현재의 거론 없이는 불가능하며, 현재 역시 시간적으로 다시 과거와 현재로 구분되고 지금의 현재는 상호 의지 하에 존재함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변화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행위와 관계된 예를 들어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행위의 주체인 행위자가 동작을 통해 작용을 일으키는 것 역시 상호 의지 하에 작용하는 연기입니다.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의지해서 존재하기에 연기를 비로소 공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지해서 존재하기에 비로소 중도입니다. 분석과 관찰로서 본래 자성에서 찾을 수 없는 자체가 아닌, 의지해서 붙여진 것이기에 찾을 수 없는 자성임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자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없습니다. 본질이 있다면 본래 고유의 성질 역시 인과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순간 변화하는 도리는 사물에서 조차 인과법으로써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씨앗에 물과 토양이 있어야만 싹을 틔우는 것이야 말로 지고지순한 인과의 도리입니다. 과에 의지하여 원인이 있으며, 원인 역시도 결과가 있기에 원인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성 이외에 그 어떤 법은 없습니다. 연기이기에 자성은 공합니다. 불호보살(붓다빨리따)의 <불호론> 22장에 이르기를,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모든 진여 그 자체를 말할 수 있어 상호의존을 거론할 필요가 없네. 자성으로서 존재한다면 상호의존하지 않게 되네.’라고 하였습니다. 연기는 실재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순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자성에서 벗어나라고 사자후로서 거듭 현명한 이들에게 설하신 바를 그 누가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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