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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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특가라, 자성의 空을 찾다 그리고 空을 보다
인도 다람살라 = 가연숙

법에 목마른 이에게 바른 스승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10년간 14대 달라이라마(텐진갸초)와 법회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진옥스님(여수 석천사 주지)은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여행은 “정법의 스승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여행”이라고. 3월 29일 한국의 나란다 승원을 지향하는 중앙승가대학의 총동문회(회장 원정스님)가 대승불교의 원류를 찾아 인도 다람살라를 찾은 것도 같은 이유다.
이날 달라이라마의 관저에서 진행된 100명의 선재와 달라이라마의 즉문즉설(卽問卽說)은 한국에서 매듭을 풀지 못해왔던 법의 실타래를 한 치의 서두름 없이 여유 만만히 펼쳐 보였다. 쉰다섯의 선지식을 대면했던 화엄의 선재가 이와 같았을까. 다섯 시간여 남짓 이루어진 법담의 시공간에서 붓다의 땅을 밟은 한국 스님들의 눈빛은 마치 첫 눈을 만난 아이들 마냥 환희 가득한 마음을 머금고 있었다.
스승은 법담을 나누며 이따금 멀리 드리워진 히말라야 설산으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는 이내 해 뜨는 동방에서 먼 길을 찾아 온 구도자들에게 미소를 드리운다. 더불어 달라이라마는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의 선승과 티베트불교 수행자 그리고 뇌 과학자가 함께 만나 마음의 과학을 대론하는 기회가 마련되기를 희망했다.
(다음은 즉문즉설의 요지)



왜 교리를 배워야 하는가. 바로 금강승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가.
유치원을 다니지 않고 대학을 갈 수 없고, 기술이 없이 항공기를 운전할 수 없다. 금강승 수행은 관상 수행법으로서 일정의 경지에 이르면 자신을 본존으로 관하는 수행으로 들어간다. 불교에서는 윤회의 아집을 끊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관상만을 수행하면 외도와 다를 바가 없다.
인도 6대 학파와 불교 4대 학파의 개론서로서 금강승의 <종의보만(宗義寶)>을 저술한 인도의 수행승이자 붓다의 지혜를 상징했던, 윤회의 뿌리인 법집과 아집을 끊고자 하지 않고 오직 관상법만 수행하는 것은 윤회를 재초래 할 수밖에 없다고 논했다. 관상법은 반드시 공성을 깨우친 바를 바탕으로 수행에 임해야 한다. 공한 본존을 소연으로 하되 그 대상조차 자성이 없음을 수행하는 것이 본존 요가다. 이로써 금강승 수행자는 법집을 끊는다. 공성을 바탕으로 한 본존 관상은 아집에 결코 대치되지 않는다. 금강승 수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공성의 지혜로써 시작돼야 한다.
번뇌의 훈습인 소지장을 깨기 위해서도 공성의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깨달음을 위한 방편이다. 붓다가 되기 위해 수승한 방편으로써 공덕을 쌓아야만 소지장을 끊을 수 있다. 금강승 수행은 방편을 뒷받침한 공성의 지혜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이로 말미암아 번뇌의 훈습인 소지장을 끊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바른 금강승 수행을 위한 여섯 바라밀의 수행이 필요하다.
일체지를 위해서는 대자비심을 필요로 한다. 타인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대자비심이다. 우리는 오온의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소지장에 얽매여 있다. 때문에 오온의 실체를 바로 알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오온으로 인해 행고에 끄달리는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한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이후에 천신들의 간청으로 법륜을 굴리셨다. 사바세계에서 붓다의 초전법륜은 사성제이며 그 이후에 영축산에서 반야부를 설하셨고 이어서 세 번째로 <해심밀경>에서 말하는 분별 법륜을 설하셨다. 아리야데바와 용수 보살이 비유한 바와 같이 붓다의 법륜은 계단을 오르는 형식을 취한다.



무엇이 다음 생으로 윤회하게 하는가.
전생과 후생을 믿는가에 대한 여부는 불교의 비구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서양인들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도가 전생과 후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오백생은 거짓이 되고 만다. 중생이 지닌 여래장이 붓다의 씨앗임을 인정한다면 전생과 후생은 있다.
인간의 의식은 전생에 기인한다. 인식은 변화한다. 즉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으로써 인과 한다. 인간의 의식은 명료하게 대상을 인지하는 밝음의 자체로써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지닌 몸의 유전자는 부모에 기인하지만, 의식의 시발점은 그 근원을 규명하기가 어렵다. 붓다의 깨달음을 취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붓다의 정각 이전에 행고가 있었다.’는 것과 ‘깨달음 이후에 그 사실을 몸소 나툰 것이다.’라고 말하는 두 부류가 있다.
윤회를 인정치 않는 서양인을 어찌 설득하는가.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공통점은 사랑, 자비 그리고 인욕이다. 조물주와 창조주를 말하는 타 종교에서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자체이다. 기본적으로 자기 조상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종교를 믿는 것이 옳다고 본다. 불교도가 아닌 사람에게 불교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실례로써 티베트의 훌륭한 스승 송오 린포체의 한 외국인 제자가 묻기를, “나는 불교가 좋지만 불교의 전 후생을 믿지 못하겠다.”고 묻자 스승이 답하기를, “난 믿음을 강요한 적 없다. 못 믿겠으면 그대로 놔 두어라.”라고 답한 경우가 있다. 외국에서 열린 법회에서 한 기독교의 참된 수행자가 내게 공성에 관해 물었을 때, “기독교인에게 공성은 참견이고 간섭일 뿐이니 얽매이지 말라.”고 답해준 적이 있다.
창조주를 믿는 이들에게 전 후생을 근거로 말하고자 한다면 조물주는 바로 거짓이 된다. 기독교인에게는 공성을 말하기에 앞서 연기법을 다뤄야 한다. 조상 대대로 물려 받아온 종교를 거부하면 모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경우에 따라 ‘윤회’가 거짓이라면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붓다는 대승에서 십력과 사무애심의 능력을 두루 갖추었다. 그러나 전 인도인들을 불교도로 바꾸지 못하였다. 이전에 인도 나란다 승원의 용수보살을 비롯한 대학자들이 외도들과 논쟁한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외도로 그대로 남았다.
다양한 종교를 믿는 이들은 각각 개인의 문제를 안고 있다. 반대로 불교가 이치에 합당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현대 과학자들은 입증하고 있다. 20세기 이전에는 불교에 무관심하던 과학자들이 20세기 들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조상대대로 불교를 신앙하고 불교를 좋아하며 존경하는 우리들은 불교가 이치적으로 모순이 없음을 알기에 거리낌 없이 따르는 것이다. 이렇기에 우리는 21세기의 불자가 돼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밀다라고 말로만 읖조릴 뿐 그 반야바라밀다의 진정한 함의를 모른다면 무의미해진다. 우리가 삼보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붓다가 누구이고 법이 무엇이며 승가는 어떠한가를 모른다면 결코 바른 불자라고 할 수 없다.



한국 내에서 시끄러운 종교 분쟁에 대해 불교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종교가 다양한 형태의 분쟁을 조성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종교의 분쟁 원인을 분석해 보면 자본과 권력이 그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종교의 이름을 앞세운 것뿐이다.
정치 외교적으로 종교들은 변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 화합하고 있다. 반면 타 종교의 허물을 들추는데 여념 하는 종교들도 있다. 한 예로 몽고에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단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미화 15불을 주고 기독교를 믿을 것을 강요한다고 한다. 이러한 행태는 소수이기에 특별히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일 뿐 뿌리 깊은 다양한 종교들은 화합하는데 공통의 관심사를 보이고 있다.
타 종교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붓다께서도 인무아를 설하실 뿐 법무아를 설하지 않은 사례가 많다. 이는 중생의 근기에 맞춘 것이다. 기독교에서 불교의 오점을 들춘다면, 불교는 해명할 필요가 있다. 몽고의 불자들은 기독교 선교단들에게 “몽고는 조상 대대로 불교의 국가임을 존중하라.”고 말해야 한다.
인도에 망명한 십만의 어린이들 가운데 기독교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있지만 개종한 경우는 십여 명 남짓하다. 이유는 확실한 신심의 영향력이다. 한국의 불교도 역시 믿음을 강요하지 말고 불교만의 고유한 차별된 점을 확실히 밝혀서 교리적 뒷받침을 굳건히 할 필요가 있다.



불교와 과학은 어떻게 양립하는가.
자비심은 고통을 겪는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발로하는 것이며, 사랑이란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불교만의 것이 아니다. 다만 타당성을 밝히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불교는 중생 모두가 고통을 원치 하기에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물들은 모두 같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고, 무슬림은 알라가 만든 모든 창조물은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의식을 다룬다. 전생에 인하며 그 시발점은 무시이래이다. 의식에 수반되는 것이 감각이다. 이러한 관점을 과학자들은 생물학의 시점으로 다룬다. 따라서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을 불교의 인연법과 합일시 한다. 30년간 과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해탈과 열반을 주제로 다룬 적은 없다. 현대의 불법은 법 그 자체와 교학 그리고 과학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신은 수미산을 인정하는가?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붓다가 지구에 인간으로 생한 것은 사성제를 설하기 위함이다. 수미산의 유무와 상관없이 ‘고집멸도’는 진리다. 진나와 법칭 보살이 외도를 반박할 적에 삼단 논법을 쓰셨다. 반박은 외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도 적용된다. 수미산이 있고 그 그림자 밑에 인간이 있다면 활용해야 하지만 우주에서도 지구의 수미산은 찾아 볼 수 없다. 불교도 내에서도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를 반박했듯이 모든 것은 경험과 이치로써 타당성을 구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견고한 종교이다.
50년 전에 과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한 이래 40년 전에 한 기독교인으로부터 “과학자는 종교를 죽인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티베트 경전에서 붓다께서 이르기를, ‘비구들이여 내 말을 그대로 믿기 이전에 분석하라.’고 하였듯이 한치의 오차없는 타당성에 견주어야 할 것이다. 이에 그릇되면 맹신이 되고 만다.
오온은 하나의 짐과 같다. 그 짐을 드는 이는 ‘보특가라’이다. <반야심경>에 이르기를 ‘오온의 자성은 공하다.’고 하였다. 산스크리트 본에 근거한 티베트 본에는 ‘오온 그 조차도 무자성하다.’라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붓다에게 묻기를 원한다. 과연 “인아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아는 무자성인가?”
용수보살을 위시한 큰 스승님들이 이르기를 앞의 두 질문을 분석하건데 이치에 합당하고 확신이 서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붓다의 ‘수미산’은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 우리는 붓다의 다른 의도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이유는 인과의 연기법에 기인한다. 조물주와 창조주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인과와 연기법은 현대 과학자들이 지지하는 이론이다. 비롯되어 이루어지는 바가 자성으로서 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감정의 기복과 별개로 즐겁고 행복해야할 의무가 있다.
우리 불자들은 바른 불법으로 내면의 힘을 키워 투명해져야 할 것이다. 진심과 정직만이 확신의 다리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