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와 자비 그리고 기쁨 평등심을 항시 바르게 명상해야 하네. 비록 최상의 불과를 증득하지 못하더라도 범천의 지복을 얻으리니. 잠자리에 들어서도 결실을 얻는 법 바른 억념으로 선업을 닦아야 하리. 보시와 지계 인욕과 정진 선정과 지혜의 한량없는 바라밀을 닦아 생사의 바다를 건너는 승리자가 되리라.’ -용수보살의 『벗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인도 고대 불교왕국 라다크 레에 위치한 티베트 난민지구 촉람사. 1950년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9)의 인도 망명 당시 라다크는 다람살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당시 상당수의 티베트인들이 이곳 레에 정착하였고 생계를 위해 무슬림으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2010년 8월에 발생한 홍수 피해로 2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을 당시 재난 구호를 가장한 세계 각국의 선교 단체가 레에 몰려들었고 라다크는 불교와 이슬람교 힌두교 가톨릭 그리고 개신교에 이르는 다양한 신앙 활동이 혼재하며 지금까지 무리를 빚어오고 있다. 라다크 불교협회와 사원연합 그리고 조낭빠와 티베트 꽁뽀지역 주민들의 주관 하에 달라이라마로부터 올해 칼라차크라(KALACHAKRA) 법회 확정을 받게 된 때가 2014년 3월 19일. 이번 칼라차크라 법회를 통해 달라이라마가 몸을 담은 티베트불교의 겔룩빠 산하 가덴사원(수장 간덴뜨리빠)이 중심이 되어 티베트불교 종파간의 화합과 각기 다른 종교들을 존중하기 위한 그 기반을 다진다는 것이 이번 법회의 동기다. 달라이라마의 집도하에 개최된 이번 칼라차크라 법회는 7월 3일~16일까지 총 14일간 촉람사 광장 마하보디 사원군에서 개최되었다. 달라이라마의 첫 라다크 칼라차크라 법회가 개최됐던 1976년 이후 1988년 잔스카르에서의 두 번째 칼라차크라에 이어 올해로 세 번째 칼라차크라 관정 법회임과 동시에 달라이라마의 생애 두 번의 티베트에서의 칼라차크라에 이어 총 서른세 번째 칼라차크라 법회다. 이번 의식에는 전 세계 74개국에서 연인원 15만 명의 청중이 동참했으며 한국에서는 123명이 참석한 것으로 집계됐다. 대중에게 이미 잘 알려진 헐리우드 영화배우 리차드기어와 헐리우드 여배우 우마서먼의 아버지이자 티베트불교 승려이기도 했던 『과연 달라이라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의 저자 로버트서먼, 중국인으로서 달라이라마와의 만남을 책으로 엮은 『달라이라마의 관용』 저자 빅터챈을 비롯해 티베트 본토에서만 400여 명의 티베트인과 중국 본토에서 500여 명의 중국인이 함께했다. 달라이라마의 법회 일정은 새벽 3시 기상으로 시작해 3시간의 명상 시간 이후 오후 4시까지 법문하는 일정으로 연일 진행되었다. 칼라차크라법회를 최종 마무리한 17일, 레를 출발해 델리에 도착한 달라이라마는 4일간 구르가온 소재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았으며, 퇴행성 관절과 결막염을 진료 받고 이생의 두 번째 고향 다람살라로 복귀했다.
시간의 순환을 의미하는 칼라차크라는 티베트불교의 무상 요가와 달리 보편적인 관정입니다. 스승 링 린포체로부터 사사하여 다람살라에서 세 번째 칼라차크라 의식 당시 부족한 수행력으로 집도하던 중 기이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만다라의 정 중앙에 앉아 깊은 관 수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당시에 저는 이번 생에 상당히 많은 칼라차크라 관정을 열게 될 것을 예감했습니다. 칼라차크라 의식의 목적은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포교의 방편입니다. 칼라차크라 의식의 첫 3일은, 대지수습, 예비수습, 근본수습을 통해 모래 만다라가 조성될 곳을 선택해 권청하고 정화하여 대지의 신을 모시고 수습하며 공양을 올립니다. 스승 달라이라마는 일면 이수의 본존으로 관하여 금강상사인 관정의 스승을 모시고 모래 만다라의 각 처에 일체의 붓다와 권속들이 거처하도록 합니다. 분명히 인지해야할 바는 관정은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불법을 진수에 둠을 그 목적에 둬야 함을 염두 하세요. 불법이 생하기 이전,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에 이미 인도에는 외도 수론학파가 있었습니다. 2천 6백 년 전에 자이나교가 번성하였고 불교는 그 이후에 생하였습니다. 이렇듯이 법의 생함 또한 연기의 인연입니다. 고대 종교로서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가 차례로 인도에 전파되면서 인도는 다양한 종교들이 각자의 꽃을 피웠습니다. 인도 안에서의 종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는 매우 본받을 만한 종교의 모범적인 자세입니다. 칼라차크라 관정은 불법의 한 부분이기에 먼저 법에 대해 논리적으로 사유해야 합니다. 법이란 ‘지니다’ ‘구제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제하고 구원하는가. 중생이 원하는 행복,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괴로운가요. 이는 ‘나’를 너무 소중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원인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이 클수록 마음의 공포심이 증폭됩니다. 이로써 서로의 의심과 불신을 야기합니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반대로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증장될 때 ‘나’라는 생각으로부터 비로소 유연해 질 수 있습니다. 분노와 질투의 반대가 되는 사랑과 자비를 모든 종교에서 강조하는 이유는 ‘나’라고 하는 것과 ‘나의 만족’을 절제할 때 행복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유대교 기독교에서도 모두 사랑과 자비의 반대가 되는 분노와 질투를 멸하기 위해 인내와 용서를 배우고 증장할 것을 권합니다. 지구상에는 60억의 신앙 인류와 10억의 무종교인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종교를 넘어 70억 인류의 공통점은 모두가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치 않는 점입니다. 인류가 지닌 세속적인 윤는 의식주의 측면에서 육신의 고통을 줄이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행복을 증장하는데 노력하도록 해야 합니다. 종교인은 사랑과 자비로서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장을 조성하고 주도하는 이여야 합니다. 사상을 지닌 교리가 있는 종교에서는 모두 사랑과 실천을 증장시킴에 있어 ‘나’를 사유의 근거로 둠이 그 이유입니다. 교리를 지닌 종교에서 사랑을 증장시키는 방법에 있어 외도인 힌두 이슬람 유대 기독교에서는 창조주는 무한한 사랑을 주는 조물주로서 사유의 근거로 한다는 근본 차이가 있으나 궁극의 핵심이 되는 사랑과 자비는 공통됩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상키아 학파와 자이나교 그리고 불교에서는 인과법을 근거로 사유합니다. 선인선과 그리고 악인악과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궁극의 목표로 하는 사랑의 증장은 인류를 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각기 다른 인종이 지닌 그들의 종교를 넘어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모두 선한 마음을 내고자 함께 한 것임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바른 동기를 세우세요. 이 지구상의 70억 인류의 공존에서 저는 하나의 사람입니다. 마음의 행복과 평화를 필요로 하고 간절히 원하지만 번뇌와 집착으로 인해 행복을 영원히 영위할 수 없습니다. 이는 70억 인류의 공통된 바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어머니의 젖으로 성장하며 사랑을 교감합니다.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서 신뢰해야 합니다. 외부의 장애를 없앨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니는 것으로 행복은 나의 것이 됩니다. 인류가 나라고 하는 한 명의 사람이 각각 저마다의 행복을 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통의 관심과 목적으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가난과 빈곤 그리고 환경적 영향으로 빈곤의 문제는 나라와 인종을 초월해 오늘날 공통의 관심사입니다. 라다크와 같은 메마르고 척박한 대지는 더욱 환경에 대한 구체적인 모색과 활동이 요구됩니다. 저는 불교도입니다. 지구상의 다양한 종교 가운데 사상과 철학을 지닌 주요 종교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인 사랑과 자비를 존중합니다. 이슬람 힌두 유대 불교에서 가르치는 사랑과 자비는 모두 상통합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과 자비는 비폭력입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야기되는 공포는 사랑과 자비를 근간에 두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해를 가하지 않고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반대가 분노입니다. 때문에 사랑을 지닌 이는 절대 분노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또한 진정한 용서란 나에게 해를 입힌 이에게 보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욕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에 있어 체험은 공유됩니다. 종교 간에는 반드시 존중하고 협동해야 합니다.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종교로 인해 분쟁이 발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얀마 그리고 스리랑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슬림과 불교도간의 분쟁이 그것입니다. 당부하건데, 우리 불교도는 분쟁을 일으키는 상대를 대함에 붓다를 바라보듯이 하십시오. 그리고 고통 받는 대상을 걱정하고 염려하며 마음을 아파하십시오. 지금의 이슬람교와 기독교간의 분쟁 역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불행의 현실입니다. 부디 종교 간의 모든 분쟁을 종식하고 이 시대의 종교는 서로가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티베트인입니다. 티베트의 6백만을 대표하며 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티베트불교는 현교와 밀교를 아우르는 소승임과 동시에 대승불교입니다. 더 나아가 붓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임이 아닌 이치에 근거하는 인명학으로 심화하였습니다. 티베트불교야 말로 인류의 숭고한 재산입니다. 타당한 이치를 근거로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하는 자량이 됩니다. 불법에는 사상과 행이 있습니다. 비폭력의 연기 사상이 바로 불법입니다. 사상에 있어서 연기법으로서 항상 의존해 있음을 염두하고 과보가 있음을 바로 아는 것이 그것입니다.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치 않는 것은 내가 짓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 판가름 되는 원리입니다. 내가 짓는 인으로서 행복과 불행의 과보를 받습니다. 연기사상은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절대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