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사람의 말에 의지하라. 단지 말에 의지하지 말고, 말의 의미에 의지하라. 단지 말이 추론한 의미에 의지하지 말고, 말의 명확한 의미에 의지하라. 단지 이해한 바에 의지하지 말고, 체험한 바에 의지하라.” - 불교 수행의 네 가지 의지 처 -
인도 다람살라 망명정부 산하 학교에서 수학하는 학인들을 설판제자로 6월 4~5일 양일간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9)의 『반야심경』 법회가 열렸다. 매년 6월이면 티베트어린이마을(TCV)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달라이라마와 학생들의 만남이다. 달라이라마는 법문에 앞서 열린 학생들의 불교 논쟁을 참관하고, “이제 그만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긴장을 푸는 농담을 건넸다. 본인이 학인으로써 마지막 토론 시험을 치르던 때에 스승이셨던 용첸 링 린포체로부터 이제 대론을 마무리해도 좋다는 말씀을 들었던 당시의 감회를 떠올렸다. 그 느낌은 마치 비할 바 없는 큰 안도감이면서도 동시에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고 하는 쾌감과 같았다며 달라이라마 특유의 웃음을 보였다.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 법회 이틀째인 5일에는 티베트 망명정부 역사의 획을 긋는 행사가 조촐하면서도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티베트 망명정부 총리이자 교육부 장관인 롭상상게 박사는 외교부 디끼최양 장관을 대동하고, 달라이라마로부터 망명정부의 중도中道주의 국정 정책 ‘우메람(UMAYLAM, 중도의 티베트어)’을 선언하는 증명을 받았다. 달라이라마의 이번 정치적 회동은 2011년 3월 정치적 지도자 직무에서 공식 은퇴한 이후 3년만이다. 당시 달라이라마는 국정에 관해 조언을 구하는 일이 생긴다면 적극 협조할 것을 밝힌 바 있다. 우메람선언에 관한 달라이라마의 증명은 법회가 끝난 직후 5분여 만에 신속히 진행되었다. 이는 법문중인 회장에 총리와 외교부 장관이 합석하고 법문을 마무리한 후 퇴장하기 위해 법석에서 일어난 달라이라마에게 우메람 선언문을 올리면서 법회의 대중과 외신 기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이른바 긴밀히 협의된 의식이었다. 달라이라마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다만 “지금이야말로 우메람 정책을 확립해야 하는 최상의 시기임을 확신한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젊은 정치 세대들이 현명히 그 길을 모색하는데 전력투구해야할 것”이라고 격려하고 바로 법회장을 떠났다.
붓다의 말씀은 실상의 도리를 깨우치게 하는 자력의 수행입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행복을 구현하고자 함에 먼저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그 답을 찾아가는 환희심의 연속인 구법여행이지요. 붓다 역시 우리와 다름이 없는 하나의 인간으로써 유한한 생을 살며 진리를 구하는 간절한 실천으로서 마침내 깨우쳐 최상의 지혜를 구함에 더 이상의 경계가 없는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전 세계에 두루 한 700만여 불교도는 누구보다 선두에 서서 다양한 종교만큼 다채로운 신앙의 형태로 지구상의 인류가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 종교를 존중하고 저마다 지닌 가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불자의 근기에 있어서 석가모니 붓다께서 심신의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의 화합으로서 하나의 생명 지닌 존재를 규명하신 바와 같이 일체는 연기의 화합으로서 어우러진 하나임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니게 합니다. 대승의 철학 체계에 있어 불교는 나란다 승원의 학제를 따라 철저한 논리학의 개념입니다. 과연 붓다는 누구이며 동시에 무엇이고 이어서 그 길에 대해 묻는다면, 티베트불교야 말로 모든 의문에 대한 최상의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불교를 수학하는 환경에 있어서도 북인도 히말라야 지역에서 남인도에 이르기까지 티베트불교의 다양한 종풍은 두루 존중받으며 그들의 사원에서 수학되고 있습니다. 우려하는 것은 다만 보살계(왕)와 같은 의식에는 구름처럼 대중이 몰리는 반면 붓다의 경과 논에 관한 법담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대중들의 풍토는 어서 개선되어야 할 바입니다. 기도는 굳건한 신심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킵니다. 그러나 진언기도나 관상 수행과 같은 것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근본의 무지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취함에 긴장하지 마세요. 막상 불교를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심오한 가르침의 영역에 질려 시작부터 머리가 아파질 수도 있습니다. 의식의 중심에 붓다께서 깨우치신 네 가지 고귀한 진리의 가르침을 두고 마음에 항상 유념하면서 사유의 근거로 삼도록 스스로를 잘 바라보는 신념의 훈련을 하기를 바랍니다. 불교로서 현상들의 실체를 보고 사유케 하여 스스로 실상의 근본을 파악할 수 있는 근기를 향상시키는 것이지, 무상과 무아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허무주의 혹은 절대주의를 일으키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겔룩빠의 수행 전통은 철저히 논리적인 분석과 토론에 기반을 둡니다. 때문에 공성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쥘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금을 연마하는 것과 같아서 고귀한 가르침에 다양하고 치밀한 의심을 일으켜 논쟁으로서 한 치의 불순물이 없는 정제된 금을 추출하고 취합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와 같이 <반야심경> 또한, 일체의 번뇌가 제거된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길로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스와하’의 만뜨라로 함축되었습니다. 신중히 사유해 봅시다. 나를 둘러싼 심지어는 나 자신 조차도 관습적인 차원에서 소멸하며 생겨나고 다시 소멸했다 생겨나기를 되풀이 합니다. 이 멸하고 생하는 특징들의 본질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지금 공성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사리붓다는 묻습니다.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얻고자 마음을 낸 고귀한 이들은 그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관자재보살은 세 분류의 각기 다른 근기의 불상은 말이 없다 수행자를 위한 수행법을 일깨웁니다. 그것은 평범한 근기를 지닌 이들에게 그에 적합한 수행법을 개별적으로 지침 하는 것과, 출중한 근기를 지닌 이들에게 마음을 호위하는 수행을 지침 하는 것과, 핵심만을 취합하여 수행하는 것을 지침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공성에 대한 이해를 지식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수준인 자량도에서 보리심을 증장시켜 가행도로 나아가는 것이며 비로소 명료한 공성을 이해하여 견도로 나아가 견분과 상분의 경계를 분리하지 않음으로서 공성의 체험이 점층적으로 심화되어 수도에 도달함을 통해 보살의 초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로서 보살의 십지 수행을 통해 무학도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아집의 장애를 이미 여의었기에 공성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현대과학의 측면에서 오늘의 우리는 사유의 이면을 도출해 내는 시대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수행 체제와 매우 유사합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자신 스스로가 시대의 진리라고 하는 사유의 법칙 이면의 근본 원인이 되는 실상을 찾고자 치밀한 물음표를 들어 시험했습니다. 이는 철저한 의문과 증명을 통해 파악된 실체의 탐구였습니다. 붓다의 열반 이후 나란다승원 출신의 17분의 선지식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은 해체되고 논리화 되었습니다. 사원의 수문장격인 수호신장의 외형에서 드러나는 표정이나 모습에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불자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진정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미숙한 불자들의 잔재입니다. 무엇이 공포이고 두려움인지 그 실상의 본체를 바로 안다면 진정으로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해답 또한 구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은 이미 좀 더 다른 희망적인 구도로 펼쳐졌을 것입니다.
티베트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학의 논쟁은 인도 망명 직후 1960년 인도 마수리 지역에 설립된 첫 학교의 수업 과목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습니다. 당시 논쟁수업을 참관 하게 되었는데 열띤 논쟁을 선보이던 한 승려에게 급작스런 질문을 던졌지요. 그러나 그 승려는 긴장한 탓에 답을 못하였고 일순간 청중들 역시 정적과 함께 한 동안 고요했던 기억이 남니다. 삼보의 전당인 사원 소속의 승려들은 그들의 본분 상 불법을 명확히 정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망명정부의 모든 티베트인 학생들 역시도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기본 지침으로 삼습니다. 불법의 논쟁은 사성제를 기반으로 현상계의 실상을 논제로 하기에 보다 창의적이고 지능적인 마음 향상에 든든한 밑거름이 된다고 자부합니다.
여러분 앞에서 설법하고 있는 나는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길어야 20여 년 남짓이겠지요. 이 자리에 함께한 청소년들에게 불법을 수학하는 것에 있어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군요. 생각의 방향을 최대한 넓게 가지고 세상과 마주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한 누군가는 분명히 학인들을 양성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오늘 달라이라마와 함께했던 시간을 회상할 것입니다. 시간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한 때 누군가의 학인이며 또 다른 시각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아끼고 보존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티베트어와 티베트문화는 붓다의 음성에 가장 근접하기에 그 가치는 가히 비할 바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보편적인 윤리를 이해하고 보다 나은 세상으로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서양인들의 생활 기반은 그들의 유년기부터 물질적인 영역에 치중해왔습니다. 때문에 마음의 영역은 매우 애민하고 이기적인 성향으로 성장하였고 이들이 주도하는 사회와 국가는 공익의 증진이 아닌 보다 극단적인 사회 편향적 구조를 야기했습니다. 이는 보다 근본적인 가치를 탐구하지 못한 인과입니다. 여기서 종교인이거나 비종교인이거나를 분별하기 전에 도덕적인 신념으로 우리를 위한 공통의 대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음에 공감하기를 바랍니다. 붓다의 경전과 선지식 논사들의 대승논전이 생생히 보존된 티베트불교야말로 이 시대의 만연한 갈등의 실상을 바로 보는 수승한 가르침이라는 점을 자부하고 진심으로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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