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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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바로 알기
“고제의 허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해탈을 향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네.
집제가 윤회의 인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윤회의 뿌리를 끊을 수 있을까.”
- 쫑카빠 대사 -

망명 난민의 역사 반세기. 티베트 사원은 웅장해졌고 티베트불교는 세계화 되었다. 그러나 많은 티베트인들은 여전히 배고프다. 고등 교육 이후의 청년들이 발 디딜 사회 영역은 좁기만 한 현실에서 인도를 떠나고 싶은 그들의 바람이 최상의 행운으로 종종 비춰진다.

성지순례 절정의 시기를 맞아 중국 티베트 자치구에서 다람살라 망명정부를 찾은 100여 명의
티베트인들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9)를 친견하고 그들의 평생 염원을 이뤘노라 말했다. 행복과 이상 그리고 현실은 때로는 도를 넘기도 하고 그 도에 못 미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비춰진다.
공동의 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다람살라 망명정부 티베트인들이 짊어진 번뇌는 달라이라마라고 하는 이름이 지닌 업의 무게를 가늠키 충분하다.

달라이라마는 걱정이 많았다. 불자의 신심이 증장되는 방향이 사원을 장엄하는 것으로 향하는 행태에 그 도가 넘지 않기를 염려했다. 티베트 불교문화를 따르고 후원해온 해외 단체들은 오히려 티베트불교 사원 밖, 갠지스강가에서 구걸하는 인도인들의 회복을 가늠키 어려운 가난을 더욱 심각히 여기게 되었다. 더불어 티베트 망명정부의 성장은 나름의 민주주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달라이라마의 중도정책 우메람(Middle Way)을 따라 중국과의 관계 완화를 시도하고 있는 지금, 티베트 새해인 3월 2일(로사)로부터 보름날 열리는 달라이라마의 <본생담> 법문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쫑카빠 대사의 저서를 살펴보면 수행의 근기를 따라 어렵고 난해한 부분은 거듭해 당부하고 수차례 비유를 들어 설명하며 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쉬운 부분만을 즐겨하며 어려운 부분을 건너뛰려 하지 말고 공을 들여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람림(보리도차제론)>에서 하사부와 중사부 그리고 상사부는 보리도의 근기를 증장시키는 순서입니다. 이에 근거하여 수행자는 정념과 정지에 의지해야 합니다. 경전을 대함에도 중관과 인명학을 서로 동시에 비교하며 깨우쳐야 합니다. 열 가지의 선을 행함에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로 향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십시오. 이 모두는 원치 않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며 윤회의 본질을 바로 보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생함에 비추어 어머니의 태안을 상상해 봅니다. 어둡고 악취가 나는 곳에서 머무는 오랜 시간에도 고통을 받습니다. 태어나서도 의식주에서 고통을 겪고 내가 아끼는 이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이들로 인해 다양한 고통을 접합니다. 나이가 들어 몸에 질병이 생기고 서서히 가죽이 말라가면서 오온은 점차 해체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언젠가 그 수명은 다해 내 것이라 영위하던 것들을 그 무엇 하나도 품지 못한 채 이생과 이별을 고합니다.

계율은 만연한 고통의 사바세계에서 균형을 잡는 중심축이 되어 줍니다. 쿠눌라마 린포체께서는 “공성으로서 윤회를 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성 그 자체가 윤회가 아님을 아는가. 윤회의 환멸로서 근본 원인인 무명이 전도된 것임을 깨우쳐 외경과 내경의 경계를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옥에서 스스로를 속박하려 합니까. 성을 내는 작용은 집착이 많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중관에서는 윤회하고 고통 받는 원인에 대해 업과 번뇌의 작용을 논의 합니다. 집착함으로서 존재성을 느낀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습에 의한 그릇된 관념입니다.

묻습니다. 내가 붓다를 성취하겠다고 염원하는 것 또한 집착일까요? 상대를 성취하려는 갈망에 깊이 탐하면 집착이 됩니다. 원하는 마음이 과연 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는 허물이 아니지만 내가 갈망하는 대상에 대해 전도된 의식이 작용되어 옳은 것으로 해석되면 집착이 되어 부정한 업을 일으킵니다. 집착의 대상에 고유한 성질이 있다고 여기는 것에서 마음의 번뇌가 일어납니다. 마음에 번뇌를 일으키는 대상은 모두 법집에 의한 작용임을 바로 보십시오.

번뇌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상대에 대해 바로 알 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과 조건 그리고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해법의 측면들을 면밀히 따져 봐야 합니다. 전도된 망상 즉, 모든 것에는 자성이 있다는 작용이 있어서 호불호를 만들어 냅니다. 그 가운데 관념에 의한 번뇌를 멸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스스로가 소중하다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자비심과 같은 타인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당장 자신감이 서지 않습니다. 수행으로서 습을 들이면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서서히 나의 원수를 향한 자비심 역시 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 의식의 미세한 작용들은 책으로만 접해서 이해한 것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유한 바를 실천함으로써 체득한 것을 통해서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해탈에 대해 얼마나 간절하십니까. <입보리행론>에서, ‘항상 나의 행복을 바란다면 타인의 행복을 먼저 구하라. 그것이 나의 행복을 이루는 지름길이다.’라고 이르고 있습니다. 나의 몸이 아프고 질병을 얻었을 때 보살펴줄 이가 곁에 있던 경험을 기억해 보세요. 내가 원하는 행복이란 이 순간뿐만 아니라 이 생 내내 영위되기를 바라지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타인을 신뢰하고 믿어 왔는가를 이 자리에서 상기시켜 보세요. 의심을 하면 그 정도만큼 두려움이 남습니다. 주변에서 남을 위하는 이가 있다면 유심히 그의 행적을 살펴보십시오. 마음도 몸도 모두 건강한 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나는 특별하다’는 아상에서 벗어나세요. 스스로를 구속해 왔던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순간입니다. 내가 대승을 따르는 불자라고 자부한다면 이생의 행복에만 머물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 생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이 모두가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구하는데 모두가 손을 잡고서 공통의 관심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법을 구하고 이해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지금의 어르신 불자들은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을 이해시킴에 업과와 지옥을 그 예로 들어야 대화가 통합니다. 쉽게 말해 과거의 불교는 겁을 줘야 신앙하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불교는 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로 대화하면서 합리적으로 삶의 난제들을 극복하고 그 너머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구한다면, ‘스스로에게 있는 여래장을 발현하여 번뇌를 멸하는 것’이라고 <보성론>에서 밝힙니다. 내 삶의 방식 그 체계가 과연 올바르게 흘러가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내가 살아가는 바의 가치를 점수로 값을 따진다면 몇 점인지 헤아려 봅니다. 이상이 <람림>의 하사부 단계에서 사유하는 주요 내용입니다.

삼학을 수행함에 해탈을 원한다고 하지만 과연 해탈에만 머물 작정입니까. 일체 중생을 위하는 평등한 마음을 낼 때 우리는 비로소 대승의 수행자가 됩니다. 보시하는 것의 최상은 삼독의 번뇌를 멸하는 길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타인을 위함이 과연 무엇이며 어느 정도인지 하사부의 수행자는 현실적으로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법을 설하는 것에도 허물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먼저가 아니라 타인의 근기와 성향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붓다를 성취하도록 하소서”라는 말은 허공의 메아리일 뿐입니다. <보리심석>에서, ‘일체 중생을 위함에 일시적으로 선한 마음을 일으킨 그 마음에도 공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만, 우리는 보다 지속적으로 장기적인 궁극을 향해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보리심과 공성을 스스로의 언어로 정의해 봅시다. <람림>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무시이래 모든 중생은 나의 어머니였음을 사유해 봅니다. 어느덧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나와 남을 서로 교환하여 상기해 보세요. 내가 지금 허기진 만큼 상대의 배가 고프고, 내가 현재 앓고 있는 병만큼 상대가 아프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만을 위해왔던 이기심을 타 중생을 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세요. 이것이 바로 보리심의 발현입니다.

인욕수행을 하는 이에게 “똥을 먹어라”라며 욕을 건넨 티베트 라싸의 유명한 한 수행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스로 인욕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고요한 곳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 속에서 어울려 스스로를 점검하는 것이 인욕수행입니다. 지금 내가 싫어하는 혹은 나를 싫어하는 이를 떠올려 봅니다. 나를 불행하게 한다고 여겨온 대상이 바로 인욕바라밀이니 지금 이후로 그를 향해 감사의 마음을 내십시오.

한 생을 바꾸면 그곳이 바로 붓다의 세상입니다. 붓다의 행적을 보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르게 사유하도록 지혜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내가 싫어한다고 여겨온 것들과 관계를 유연히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항상 <입보리행론>을 소지하고 거듭 사유하되, 수행론에 있어서는 8장을 인욕에서는 6장을 참고하기를 바랍니다.
그에 비추어 오로지 남을 어여쁘게 여기는 마음을 가꿔가 보세요. 반드시 실천하고 노력하겠다는 자세로 스스로를 격려하세요. 중생을 향한 평등한 마음을 일으킴에 자식을 아끼는 어머니의 미소를 지어 봅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그 바람은 모든 중생이 지닌 공통의 가치입니다. 나를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하는 대상이 있어 그 무엇 때문에 내가 잘못되었다고 원망해 왔던 어제의 나를 참회하세요. 지금부터 더불어 행복한 우리를 향해 솔선수범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어 틈틈이 보리심을 사유하세요. 중생을 위함이 나를 위함과 같음을 발견하고 그에 발현한 무한의 행복을 나누십시오.

보리심을 한 번 일으킨 이는 후퇴하지 않도록 항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불보살님을 향한 최상의 공양이 바로 퇴보 없는 보리심입니다. 이보다 수승한 공양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중생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고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보살이며 불교에서 칭하는 보살의 유일한 정의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게으르고 나태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의 범부 중생이 이 세상에 남아 그를 일깨워야 한다면 오직 보리심만이 그를 살리고 우리를 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