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해탈에 이르는 세 가지 길 법문
당신은 21세기 불자입니까? 불법을 따르며 모나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던 어느 날, 불현듯이 거룩한 삼보를 향한 귀의와 초발심만을 움켜쥔 악착보살, ‘나’와 마주할 때가 있다. 반야용선에 오르려 하나 범부의 근기는 한계가 있고, 욕망의 시대 나를 둘러싼 수많은 갈애들 속에서 본래 성질을 헤아려야 하는 난제의 해답을 구할 때, 붓다는 공성의 지혜로 실상을 간파하라 취모리의 검을 건넨다. 복을 짓는 것에도 법도가 있는가? ‘법에는 항상 바른 동기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8). 때문에 달라이라마는 법을 설하는 스승 즉, 시대의 지도자 역시도 선한 마음의 동기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바른 동기로서 법을 청하며 지니는 바람에 있어서도 21세기의 불자라면 반드시 자신의 명예와 성공이라는 소인배의 측면이 아닌 보다 긍정적이고 거국적인 공공의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그 권고다. 붓다께서 나의 죄를 씻어 줄 수 있을까요? 과연 궁극의 해탈은 무엇입니까? 진언을 수만 번 독송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까? 달라이라마는 부디 어긋난 단견으로부터 깨어나기를 당부했다. 우리가 붓다와 같은 성취를 이루기를 바란다면 선현들의 수행법과 공덕을 면밀히 새겨 보라는 것이 그의 뜻이다. 나에게 있는 본래의 불성이 공함을 알고 대상을 대한다면 세상의 이치와 도리는 스스로 그 답을 드러내 보인다는 이치다. 겨울의 다람살라는 시리고 또한 한적하다. 12월 25일부터 열흘간 남벨라쿠피 소재 티베트 난민마을에서 열리는 보리도차제론(람림) 법회로 전 세계의 불제자들이 몰리는 이유다. 달라이라마는 지난 해 남인도 문곳에서 쫑카파대사의 보리도차제론 법회를 1차로 연 것에 이어 올해에는 세라사원에서 제 2차 법회를 연다. 때문에 오늘의 법문은 보리도차제 법문에 앞서 쫑카파 대사의 『삼종요도』 가운데 핵심을 전하고자 한다. 쫑카파 대사의 저서에는 총 18권이 있습니다. 붓다의 설법을 근간으로 난란다승원의 전승인 중관과 유식 그리고 경에 대한 논서가 그것입니다. 오늘 법문의 저본인 『삼종요도』는 쫑카파 대사의 노년기 저서입니다. 불교에서 귀의란, 자신이 믿는 대상에게 간절함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외도의 수론학파에서도 귀의의 개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타 종교와 완전히 구분이 됩니다. 연기 사상으로부터 비롯되는 해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참이며 진리라고 여기는 일체 모든 것들은 연기법으로부터 헤아려봐야 합니다. 잘못을 만드는 원인을 찾고자 한다면 연기로써 따져 나아가 그 뿌리를 찾아내도록 해야 합니다. 불법을 통한 해탈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무아의 사상에 있어서 반드시 삼보에 의지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은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불성에 대해 심화로 미륵보살의 「보성론」을 보면 일곱 가지 금강의 깨달음에 대한 방편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삼보에 의지하여 최후의 깨달음에 이르는 보리의 과정입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전기를 보면, 스스로 왕궁에서 벗어나 출가하여 6년의 고행을 하고 후에 보드가야에서 성불을 이루며 5대 비구에게 법을 설한 후에 비로소 대중에게 전승하고 있습니다. 한 인간이 붓다가 되는 일곱 가지 금강의 단계 가운데 그 첫 번째가 붓다이며 두 번째는 법보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승보입니다. 이 삼보는 내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 있어서 나만의 번뇌를 끊는 것을 넘어 진리를 아우르고 동시에 타 중생을 위함이 함께 병행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중생의 근기 즉, 불성입니다. 내 마음 자체인 불성을 통해 끊어야 할 바를 끊고 궁극의 붓다를 이루는 것이며 이를 성취한 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는 불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참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내가 대하는 대상의 본질을 바로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대상의 청정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시작은 거론될 수 없습니다. 시작이 있다면 반드시 끝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내가 보는 것과 여기는 것의 본질과 그 청정함이 자성과 차이가 없을 때 그 자리가 바로 해탈의 자리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소서’ 기도를 올립니다. 내가 항상 지니는 귀의와 발심은 거듭된 사유로써 스스로 확신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지닌 확신으로 하는 기도와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단 1분의 기도라도 달과 해를 넘기며 지속된다면 반드시 그에 준한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붓다는 티베트어로 ‘쌍게’라고 합니다. ‘허물을 완전히 여의었다’, ‘허물을 끊었다’는 의미입니다. 중생의 단계에 지닌 허물을 모두 완벽히 여읜 자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진리와 이치를 완전히 얻는 상태 이것이 쌍게의 ‘게’가 지닌 의미입니다.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에 확고한 의지를 지니십시오. 확신을 가지고 반드시 공성으로써 이치를 따져 봐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윤회하고 있는 것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목적에 대한 궁극의 물음입니다. 오온과 분리된 나는 없습니다. 이것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온과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습니다. 사성제는 빠알리어문 삼장인 계정혜의 계승입니다. 전승에 있어서 ‘계율’에 한 두 장의 차이는 보입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문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음의 정은 ‘선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혜의 전승에 있어서 빠알리어권과 산스크리트어권 간에 큰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불교 내에서도 사대의 분파가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 그리고 중관학입니다. 법무아를 지止의 관점에서 논할 때 중관학과 유식의 견해에 차이가 있고, 인무아의 자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있어서는 나라고 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육신이라는 견해인 설일체유부와 의식으로부터 발현한다는 관점인 유식의 견해 그리고 바깥 경계의 존재는 없으며 모든 일체가 의식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라는 중관학의 견해 등 각각의 차별이 그것입니다. 과연 도道란 무엇입니까? 도는 어는 특정한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향상되고 선한 쪽으로 변화시키는 것,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입니다. 아제의 자량도에서 아제의 가행도를 거쳐 궁극의 붓다가 되는 성취의 단계입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나와 번뇌를 지닌 나는 동일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어떻게 번뇌와 번민을 전환시킬 수 있는가. 그러한 비롯된 마음을 바꾸고자 한다면 내가 스스로 사유하여 지성과 의식의 힘을 통해 가능합니다. 우리의 시야를 흘러가는 수많은 현상들과 감촉을 자극하는 현란함들을 코끼리의 후각과 비교해 봅시다. 아무리 인간의 후각을 연마하고 향상시킨다 하더라도 코끼리의 후각보다 우월할 수 없습니다. 작고 나약한 토끼일지라도 인간은 토끼의 청각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생의 생을 거쳐 마음을 향상시킬 때에만 서서히 점증적으로 연마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생에 결과를 맺기 힘들더라도 정진력을 통한 체득으로 발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불법의 궁극적인 지향은 깨달음, 즉 해탈입니다. 나의 번뇌장을 모두 끊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용수보살로부터 아리아데바 불호보살을 거쳐 월칭으로 이어지는 법맥은, 번뇌를 끊는 경계에 있어서 어떻게 그 경계를 끊어야 하는가를 살피며 토론으로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지식의 논서를 근거로 하여 믿음만으로는 법을 통달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의 생각과 논리로써 관찰을 거듭해 가야할 것입니다. 번뇌뿐만이 아니라 번뇌의 습인 소지장까지 완전히 끊어야만 윤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해탈입니다. 해탈의 근간은 지혜입니다. 지혜를 일으켜 괴로움을 알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염리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공성의 지혜입니다. 나의 고통의 무게와 중생이 지닌 고통의 무게가 같음을 알아서 공성을 근간으로 부디 스스로를 구제하고 동시에 일체중생을 구제하도록 하십시오. 붓다가 되고자 서원한 이이게 오늘의 역경과 고난은 스스로에게 자부심입니다. 공성의 지혜는 그러한 당신에게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줄 것입니다. 누가 윤회를 하고 내가 깨달음을 어떻게 이루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진실된 마음과 마주해 인간의 몸을 받은 공덕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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