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화의 시대. 오늘날 간디가 남긴 정신적 유산은 인간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원칙에 영감을 줍니다. 저에게 있어 간디는 그의 일생에서 보인 삶의 방식과 구현된 가치를 통해 내면의 평화와 만족을 구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비폭력에 근거한 간소한 생활을 접목한다면 간디가 남긴 평화의 메시지를 회자하는 또 다른 의미가 될 것입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10월 2일 인류 비폭력 평화의 상징 간디의 탄생 145주년을 맞아,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79)의 노벨평화상 수상 25주년을 동반 기념하며 인도 다람살라 남걀사원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날 2만여 명의 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캐나다에 본부를 둔 노벨평화상 여성연대 주관으로 1997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 조디윌리암스(Jody Williams, 미국, 64), 2003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 시린에바디(Shirin Ebadi,이란, 67)가 다람살라를 찾아 달라이라마의 평화사상과 노선을 지지했다. 달라이라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케이프타운에서 10월 13~15일로 예정된 제 14차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남아공 정부의 비자 불허를 사유로 지난 9월 4일 회담 불참을 결정한 상태다. 이에 9월 15일자로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가운데 14인이 연대하여 노벨평화상이 지닌 가치적 의미를 존중하여 차별 없는 비자를 발급할 것을 남아공 제이콥주마 대통령에게 요청하는 공개 성명서를 냈다. 성명서는 ‘달라이라마는 더 이상 티베트의 정치적 지도자가 아님을 우선 고려해야 하며 순수한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명목으로 회담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리고 10월 2일, 달라이라마의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식이 끝난 당일 오후 남아공 정부는 14차 정상회담 개최를 전면 취소하며 그 장소를 유럽 국가로 변경하고 공식 발표했다. 이날 달라이라마의 오랜 지인이자 이번 남아공 정상회담 주최 재단 대표인 데즈먼드투투(1984년 노벨평화상 수상) 명예 대주교는 한 달여간의 침묵을 깨고, “남아공 정부가 달라이라마 비자 불허를 통해 중국 정부의 비위를 맞추려다 노벨평화상 정신이 훼손됐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투투 대주교는 그의 80세 생일 행사에 달라이라마를 남아공에 초청했으나 정부가 비자를 불허하자 그 다음 해인 2012년 3월에 인도 다람살라를 직접 찾아 달라이라마를 만나기도 해 외신의 화제를 모았다. 다람살라는 바야흐로 법문의 계절이다. 동남아시아 불교도 국가들과 대만을 비롯한 몽골 그리고 한국과 러시아 불자들이 달라이라마의 법을 청하며 다람살라를 찾는 시기다. 동남아시아 불자들은 올 해 법회 주제를 지난해에 이어 『입보리행론』의 정진, 선정, 지혜품을 이어 갔다. 나란다 승원의 중관학자 샨띠데바께서 저술하신 세 권의 논서는 『대승집보살학론』과 『제요경집』 그리고 『입보리행론』입니다. 그 가운데 수행자의 지침서인 『입보리행론』은 총 10장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올해는 7장의 「정진품」을 주제로 법문을 열겠습니다. 보살행의 입문은 발심을 시작으로 합니다. 이어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실천하는 과위로서 성취하는 차제를 이어갑니다. 정진이란 무엇입니까. 게으르지 않고 선업을 쌓아가는 즐거운 수행입니다. 회상해 보건데 저의 어린 시절은 경전 공부를 매우 지루해 하는 게으른 학승이었습니다. 다행히 저의 스승님께서 매우 엄격하셨던 덕에 온전히 수학 정진을 할 수 있었고 『현관장엄론』과 『입중론』을 모두 암기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 철이 들어서는 경을 외우고 암송하는 이유와 그 이득을 알게 되었고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수승한 기쁨이 되었습니다. 정진이란 기꺼이 마음을 내어 실천에 임하는 것입니다. 선법을 기뻐하고 애쓰는 것이 바로 정진입니다. 우리는 항시 기도에 임함에 세 가지 독이 되는 번뇌를 여의고 지혜의 밝음을 열어 보살의 행으로 들어가도록 서원합니다. 욕계의 번뇌를 여읠 때야 비로소 색계의 번뇌에 들어가며 이로서 무색계의 선정을 얻습니다. 삼독의 번뇌 가운데 어리석음인 무지를 제거하면서 동시에 지혜를 점차 증장시켜 갑니다. 보살의 길이란 여섯 가지 바라밀 행의 차제를 밟습니다. 최종의 지혜바라밀에 이르기까지의 근간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로 공성의 지혜입니다. 저는 70억 인류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 살기에 인간이라고 하며 서로 의존하여 삶을 영위합니다. 의존하고 의지하여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 발생하는 고통으로부터 극복하는 힘을 얻기 위해 다양한 그들만의 종교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번뇌는 부처의 손으로 씻어질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개인 스스로 극복해야하는 철저한 자신과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시대에 야기되는 괴로움들은 사람 스스로가 야기한 고통들입니다. 때문에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또한 사람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짧은 소견으로는 근본적인 어려움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겪는 고통을 타인들이 겪는 고통들과 공감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지금 힘들다고 여기는 삶의 갈등에 대한 근심이 실제로 삶을 힘들게 합니다. 그것은 나와 나의 것 나와 연계된 관계로만 연결 짓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삶은 두렵고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이 모든 괴로움은 나와 나의 것이라는 집착 때문에 일어난 현상들입니다. 넓게 멀리 보세요.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관망해 봅시다. 나에게 원수가 있거나 나의 가까운 이가 있더라도 그들은 처음부터 나에게 악하거나 선했던 것이 아닙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일으키는 마음은 처음부터 그가 나의 적이었거나 친한 이였다는 착각을 일으키면서 발생합니다. 결국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야기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한 명의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견고한 믿음을 지닌 이가 있는 반면 탐심과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이는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없거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세속적 윤리와 연관된 부분입니다. 때문에 현대 교육의 체제가 추종하는 물질주의 경향의 풍조가 항시 염려스럽습니다. 인성 교육의 결여로 현대 사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야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인간 윤리 개념은 3천년 이전부터 기반을 다져왔습니다. 때문에 다양한 철학적 사유가 인정되고 공존해 왔습니다. 2천 6백여 년 전에 자이나교가 생겨났으며 이후 30여 년 후에 불교가 생겨났고 시크교가 생하였습니다. 그 외의 모든 종교를 아울러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자비입니다. 한 예로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것 역시 사랑과 자비에 기인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몸속을 흐르는 피 속에 사랑과 자비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사랑과 자비를 더욱 많은 이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종교가 지닌 각각의 사상과 철학을 제외하고 행위와 실천에 있어서 사랑과 자비는 공통의 화두입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인간 세에 계시기 이전부터 종교가 있었으며 불교 이후에도 다양한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중생이 지닌 근기가 달라 그들에게 각기 이익이 되는 방편을 구하게 되었기에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생겨났음을 인정해야겠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불교만이 최상의 진리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병든 이가 있어 그에게 처방을 내림에도 우선시 되어야 할 것과 후자가 되어야 할 것의 차례를 준수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 미얀마와 스리랑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교와 이슬람 간의 분쟁을 보면서 종교 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히 사회와 국가의 문제를 넘어 인류의 불안으로 야기되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불교의 무아사상은 불교만의 숭고한 가르침입니다. 나라고 하는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중생이 짓는 삶 안에서의 선업은 바른 생을 스스로가 섭수하여 증장시켜 가야 할 화두입니다. 때문에 중요시 할 것이 동기가 되는 마음가짐입니다. 붓다의 법은 속제와 진제로서 구분이 됩니다. 나가 없는 인무아와 그 반대가 되는 법무아가 그것입니다. 그 시작으로 무아의 정체를 앎으로서 경론을 수학하고 이치에 맞도록 의문을 풀어 삶에 적용해 나아감으로써 비로소의 법성을 스스로 사유해 갑니다. 그 완성은 하루 이틀 만에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년이 걸릴 수도 한 평생에도 모자를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항시 당부하셨습니다. 금을 연마하듯이 의심하고 한 번 더 해석하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요의와 불요의가 나왔으며 불요의의 대표적인 경이 『해심밀경』입니다. 스승의 말씀을 나의 지성과 사고로 논리에 근거하여 살펴보세요. 오늘의 불자들은 붓다를 비구의 수행자와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의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진리라고 하는 종교의 법을 사유함에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처방전이 되는 종교를 나의 신앙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지혜의 꽃봉오리를 피우기 위해 오늘도 정진하고 계십니까? 스스로 사유하고 경험해서 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를 살펴보세요. 붓다께서 무아를 설하심에 오온에 대한 이견을 보이신 바가 있습니다. ‘나는 반드시 오온에 의지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오온을 짊어지는 내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을 하신 까닭입니다. 아무리 맛이 좋은 고기가 있더라도 이가 성한 이가 맛보는 것과 이가 성하지 않은 이가 맛보는 것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종교를 신앙함이란 마치 부모의 유산을 소중히 섬기고 관리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티베트불교의 전승 법은 크게 세 가지로 실천이 되는 은희 차제와 현관 공성의 반야 차제 그리고 칼라차크라와 같은 가피의 전승으로 구분이 됩니다. 대승경전을 두고 거론이 되는 비불설이 합당하려면 보리심과 공성의 체득을 통한 수행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붓다를 성취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까?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과연 붓다께서 얻은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원인과 조건이 필요할까요? 스스로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나요? 재물을 얻기 위해 삿된 신에게 의지한 적은 없습니까? 지금의 당신의 마음에 보리심을 증장시키고 보다 타인을 위한 삶의 방향으로 더불어 살게 되기를 바라며 붓다의 법에 귀의하고 있습니까? 혹여 붓다의 법이 모두 옳다고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부디 오늘의 불자 여러분이 불법의 실상을 바로 알고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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